외국 컨설팅 회사의 뼈아픈 충고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7.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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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22일 두산그룹 기획조정실 이계하 과장(38)은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를 마치고 귀가하면서 이과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미 부도가 났거나 앞다투어 구조 조정과 감량 경영 계획을 발표한 대기업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퇴직을 걱정하고 있다. 대농에 다니던 한 친구는 이미 직장을 그만두었다. 다행히 이과장이 다니는 두산그룹은 2년 전부터 구조 조정을 단행해, 최근 휘몰아치는 구조 조정 회오리에서 벗어나 있다.

이과장은 2년 전 그룹의 구조 조정 계획에 불안해 했던 때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당시 다른 그룹들이 너도나도 신규 사업에 진출하는데 우리 그룹은 반대로 사업 규모를 줄이는 것을 보고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 구조 조정에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 부도 그룹 명단에 두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두산그룹을 수렁에서 건져준 매킨지

두산그룹이 보여준 구조 조정의 성과는 눈부시다. 95년 1천4백19억원이나 되는 적자에 시달리던 기업이 구조 조정을 단행한 지 2년 만인 올해 흑자 2천50억원을 낼 전망이다. 그동안 두산그룹은 계열사 29개를 19개로 줄였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네슬레·3M·코닥의 지분을 매각했고, 음료사업 부문을 코카콜라에 팔았다. 심지어 그룹의 발생지인 영등포 공장 부지도 매각했다. 95년 말 그룹 임직원은 2만1천명이 넘었으나 지금은 1만8천2백명 가량이다.

두산그룹이 구조 조정의 필요성을 일찍 깨달았다는 것이 경영 수지 개선에 크게 기여했지만 구조 조정의 설계도를 작성한 이는 따로 있다. 미국 전략컨설팅 업체인 매킨지가 그 주인공이다. 두산그룹 박용만 기획조정실장은 96년 초 매킨지와 경영 컨설팅 계약을 맺은 것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매킨지는 이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매킨지 서울사무소 로버트 팰튼 디렉터는 “매킨지는 고객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어서 (두산그룹 구조 조정 참여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매킨지는 국내 기업들의 경영 행태에 대해 비판적이다. 국내 기업들은 매출과 자산 규모만을 중요시한다. 기업 순위를 매기는 기준도 매출이나 자산 규모이다. 국내 기업들은 매출액을 늘리고 덩지를 키우는 데만 주력했다. 삼성·현대 그룹을 포함해 국내 30대 그룹에 속하는 기업들은 사업 영역을 다각화한다는 명분으로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사업 영역을 넓혀가며 덩지를 키웠다. 몸피가 크면 은행으로부터 대출받기가 쉬웠고, 계열사 한 곳이 어려우면 다른 계열사가 번 돈으로 보전하면서 한계 사업도 끌어안고 지금까지 버텨 왔다. 80년대까지 이 전략은 유효했다. 그때 국내 시장은 수요가 공급을 초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 만들어내면 팔려나갔다. 매출이 올라가면 수익도 올라갔다. 국내 기업들은 어느 분야에 진출하더라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며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는 이미 지났다. 90년대 들어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자 만든 물건이 재고로 쌓이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과거 관행대로 60∼90일짜리 단기 부채를 끌어들여 투자를 늘리며 생산 시설을 넓혀 갔지만 수요는 제자리를 걸었다. 앞다투어 시장에 진출한 업체들은 제한된 수요를 두고 출혈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출혈 경쟁은 기업의 수익성 악화를 초래했다. 국내 20대 재벌의 수익은 미국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선정한 5백대 기업의 수익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매킨지는 기업 경영 성과 지표로 매출과 자산 규모보다 투자자본이익률(ROIC)과 현금 흐름을 더 중시한다. 투자자본이익률은 투자 자본 대 그 이익에 대한 비율이다. 즉 일정한 자본을 투자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창출했느냐를 산출하는 경영 지표이다. 매킨지 서울사무소 로버트 팰튼 디렉터는 “최소한 은행에 맡기는 것보다는 수익이 높아야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하는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국내 기업들은 지금까지 은행 이자 이상의 수익을 내기는커녕 자본을 까먹기 일쑤였다. 수익이 없다 보니 내부 유보가 있을 리 없어 은행에서 돈을 빌려 쓰게 되고, 금융 산업에 위기가 닥치자 기업들도 덩달아 어려움에 처한 것이다.

기업에게 ‘현금은 왕’이다

현금 흐름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언제라도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풍부한 기업은 금융 위기에 따른 어려움을 피해 갈 수 있다. 또 현금이 풍부한 기업은 그렇지 못한 기업보다 유망 업종에 빠르게 진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상승 효과가 충분한 유사 업체를 합병·인수해 자기의 핵심 업종을 강화하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매킨지 서울사무소 로버트 팰튼 디렉터는 “현금은 왕이다”라고 말한다.

현금을 충분히 확보하고 투자자본이익률이 높다고 해서 무턱대고 신규 사업에 들어간다면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 국내 최고 경영자들은‘왜 다른 기업들보다 우리 기업이 이 사업을 했을 때 유리한가’라는 질문에 명쾌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기업이든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업종이 있다면 그것이 그 기업의 핵심 업종이 될 수 있다. 해당 기업은 모든 기업 활동을 핵심 업종을 키워 가는 데 맞추어야 한다. 이에 비해 국내 기업들은 핵심 업종과 관계 없이 마구잡이로 사업 영역을 넓히다 위기를 자초한 예가 많다.

국내 기업 경영인들은 위기에 처한 기업만 구조 조정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킨지 서울사무소 로버트 팰튼 디렉터는 “구조 조정은 기업 여건과 관계 없이 계속 실행해야 하는 삶의 방식이다”라고 말한다. 세계 초일류 기업 제너럴 일렉트릭이 81∼92년 1백10억 달러나 되는 계열사를 팔아 치우고 2백10억 달러나 되는 신규 사업체를 사들이며 구조 조정을 끊임없이 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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