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 지배자는 누구인가
  • 이인석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프랑크푸르트 무역관장 ()
  • 승인 1998.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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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자본·다국적 기업·국제 금융기구, 약소국 흥망 좌우
사회주의가 몰락함으로써 냉전은 끝났지만, 패자만 있고 승자는 없이 종전을 맞은 세계는 금융 자본과 다국적 기업들의 활동 무대로 변해 가고 있다. 물론 이들의 보호자는 자유 시장 경제 논리로 무장한 미국이고, 후견자는 국제 기구들이다.

자유 시장 경제란 한마디로 시장은 크게, 국가는 작게 한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시장에서 해결하고, 국가는 경제 활동에 대한 간섭을 줄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시장은 선(善), 국가 규제는 악(惡)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깔려 있다. 그래서 개방만이 성장과 번영을 보장한다는 깃발을 높이 쳐들고 경제의 글로벌화·규제 완화·민영화 등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국경을 허물어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자는 것이 자유 시장 경제가 품고 있는 비전이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외환 딜러”

만약 이같은 새로운 게임의 룰을 지키지 않으면 자본 유입 통로가 막히고,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한다. 또 자국 기업이나 산업을 감싸고 도는 나라는 응징을 받게 된다. 금융 대란으로 국내 시장이 무너지고, 경제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 한국의 예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경제의 글로벌화가 진척될수록 국경 높이는 낮아지고, 시장의 지배력은 한층 더 거세지게 된다. 이쯤되면 국가 권력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넘어가고, 시장의 힘에 눌린 정부는 자칫 ‘죽은 손’이 될 위험이 있다.

더욱이 냉전 시대와 달리 체제의 자유가 아닌 시장의 자유가 기준이 되면, 우방의 얼굴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방과 규제 완화라는 글로벌 경제의 계율에 따르려면 먼저 국가의 기능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미국·영국·일본에 이어 90년 프랑스·이탈리아가 각각 규제의 사슬을 풀면서 자유화한 금융 자본이 바로 경제의 글로벌화를 가속시킨 주인공이다. 국가의 손에서 풀려난 후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데까지 이른 금융 자본을 보면, 쇠사슬에 묶여 있던 프로메테우스를 연상하게 된다.

전세계 하루 외환 거래액은 대략 1조5천억달러이고, 세계 금융 시장을 좌우하는 미·일의 국·공채 거래 규모는 실물 거래의 50배를 넘는다. 실물과는 완전히 독립해 독자적인 왕국을 이룬 금융 자본의 목표는 고수익이다. 90년 개도국 전체에 흘러 들어간 민간 자본은 5백억달러였으나, 96년에는 3천억달러로 무려 6배가 증가했다.

주로 투기 자본인 이들 민간 자본은, 금융 시장의 체온계에 미세한 변화만 보여도 10분의 1초 안에 게릴라처럼 증권·외환 시장을 번갈아 공격해 수백만∼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시세 차익을 거둔다. 따는 자들이 있으면 잃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지난해 7∼9월 동남아 국가들이 잃은 재산은 2천5백억달러인데, 여기다가 홍콩과 한국을 합하면 손실액은 87년 월가에서 잃은 5천억달러를 훨씬 넘는다.

컴퓨터 마우스 하나로 24시간 지구를 도는 외환 딜러들의 파괴력은 군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들은 한 나라의 정부에 힘을 실어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정부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97년 12월 한국 대선에서도 금융 자본이 미친 영향력을 과소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금융 자본 앞에서는 강하고 약한 정부가 따로 없다. 92년에는 영국이 무릎을 꿇었고, 94년에는 스웨덴에서 정권 교체를 불렀다. “윤회설이 있어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같아서는 금융 자본으로 환생하고 싶다.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위협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92년 클린턴 대통령의 선거 참모였던 제임스 카빌의 이같은 말에서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백악관이 두려워하는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외환 딜러라고 말한다. 주인마저 위협하는 것이 금융 자본이다.

자본은 고향이 없다. 버나드 쇼의 말이지만, 고향이 없기는 다국적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담배에서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부품으로 만들어진다. 나이키의 예를 보자. 미국 본사에는 직원이 9천명 있지만 생산직은 한 사람도 없다. 생산은 한국·대만·인도네시아·중국에 있는 독립 업체들이 맡아서 한다. 이런 식으로 전세계에서 나이키를 위해 일하는 인력은 무려 7만5천명에 달한다.

유리한 생산지를 찾아 국경을 넘나드는 다국적 기업 수는 현재 3만7천개이며, 이들의 해외 자회사는 20만6천개에 이른다. 이들이 고용한 인원은 모두 7천3백만명인데, 여기다가 관련 부품사와 자문사 들을 합하면 전세계 취업 인구의 20%를 차지한다. 또 총매출은 4조8천억달러로 국제 상품 교역액을 크게 능가하고 있다. 포드의 매출은 뉴질랜드의 국내총생산보다 많고, 도요타는 노르웨이를 능가한다. 세계 상위 15개 기업들의 총매출이 개도국 1백20개국을 합친 것을 압도하고 있다.

레스터 서로 교수가 지적한 대로, 규정을 만드는 것은 기업들이고, 국가는 이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또 다국적 기업이 진출해 있는 나라의 정부가 자기들에게 불리한 대우를 하면 바로 생산지를 옮기거나 투자를 중단한다. 때문에 ‘글로벌 플레이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나라마다 감세 등 갖가지 우대 조처를 펴면서 치열한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다.
다국적 기업, 항공기·군수산업까지 ‘꿀꺽’

다국적 기업들의 궁극 목표는 세계 시장 지배다. 그래서 적절한 상대가 나타나면 합병·매수나 제휴를 서슴지 않는다. 소비재에서부터 항공기·군수산업에 이르기까지 세계 시장 어디를 가나 이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런데도 사나운 매처럼 이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냥감을 찾고 있다.

국제 기구가 강대국 외교 정책 수단으로 이용되는 때도 있다. 지난해 12월 서울에서 숨가쁜 금융 지원 협상이 벌어지고 있을 때, 립튼 미국 재무차관이 막후에서 국제통화기금을 지휘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제 금융기구의 운영 방식은 이번 한국 사태로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환자의 건강 회복보다는 강대국 이익 대변을 중시하는 처방이 오히려 한국 경제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처 안팎을 일시에 수술하는 식의 개혁이 몰고 올 사회적 파장에 지극히 냉담하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이렇듯 금융 자본과 다국적 기업, 그리고 이들의 후견인 격인 국제 기구가 글로벌 경제를 주름잡는 ‘3인의 사무라이’인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금융 자본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상태라면, 21세기는 정글의 세기가 될지 모른다는 경고가 최근 들어 독일·프랑스 등에서 계속 나오고 있다.

규제 완화와 시장 개방은 글로벌 자본주의에 편입되기 위해 건너야 할 강이고, 넘어야 할 산이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외국 자본과 기업들에게 문을 활짝 열고, 국내 기업들이 유리한 생산지를 찾아 해외로 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편 적자 생존의 가혹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기업들은 생존력을 잃은 업종이나 조직을 가차없이 잘라낼 수밖에 없다. 미국 컴퓨터산업의 대표격인 선마이크로시스템의 게이즈 사장은 21세기에 필요한 노동력은 전체의 20%이고, 나머지 80%는 노동 시장에서 밀려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노동 없는 자본주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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