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국민·새 정부, 구조 조정 한목소리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8.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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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국민·새 정부, 구조 조정 한목소리
김대중 차기 대통령으로부터 재벌 창구 역을 부여받은 박태준 자민련 총재는 기업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답게 노동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잘 안다. 그의 이런 면모는 노·사·정 대타협을 끌어내기 위해 잇달아 노동계를 방문한 자리에서 돋보였다.

예를 들어 그는 ‘구조 조정 과정에서 기업이 근로자들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대신 더 직설적인 화법을 즐겨 사용했다. ‘노동자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기업들은 내가 경을 치게 하겠다.’ 이런 솔직한 태도는 노동계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고, 대타협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박총재의 말이 노동자들에게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로서는 그만큼 맺힌 응어리가 많다는 얘기다. 대타협으로 실업 공포에 직면한 노동자들은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신세다. 게다가 새로 출범할 김대중 정부가 재벌을 직접 손대기는 쉽지 않다. 박태준 총재도 늘 얘기 말미에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직접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만큼 자리를 걸고 재계를 설득하겠다’는 식으로 꼬리를 내렸다.

재벌들 “DJ의 요구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한국 재벌의 문제점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재벌이 생겨나서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재벌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던 적도 없다. 우선 노·사·정 대타협 과정에서 노동자를 비롯한 서민과 정부의 고통 분담안의 대강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들보다 먼저 고통을 나누어 가질 것 같던 재벌의 움직임은 미온적이다. 이번 외환·금융 위기를 부른 주범은 재벌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도 없다.

재벌의 경영 실패가 금융기관의 부실 채권 증가로 이어지고, 금융 부실이 다시 외환 위기를 촉발했다는 논리를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메커니즘에 따르면, 진정 국면에 접어든 외환 위기나 이제 비로소 시작된 금융 위기는 병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일 따름이다. 결핵 환자가 기침을 자주 한다고 해서 기침약만 처방하고 치료를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의미에서건 대부분의 국민이 이번 경제 위기 수습의 대단원이 재벌 개혁으로 끝나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꼭 경제적인 의미가 아니더라도 재벌에 대한 수술은 필요하다. 한국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를 받게 되면서, 재벌을 포함한 가진 자들에 대한 서민의 불만이 사상 유례 없을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달러와 금 모으기 운동이나 근면·절약 캠페인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계층은 더 부유한 계층이 부른 참화를 자신들이 대신 수습해야 하는 상황을 선뜻 납득하지 못한다. 이런 불만의 소리는 사회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다. 기독교방송(CBS) <라디오쟁점: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서민들로부터 매일 전화를 10여 통씩 받는 오숙희씨는 “요즘처럼 격분한 서민의 목소리가 경제 전문가의 주장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앞으로 재벌 구조 조정 과정에서 양산될 실직자를 감안하면, 이런 불만은 더욱 높아질 것 같다(16~17쪽 기사 참조).

재벌들로서도 할 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주된 불만은 김대중 정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총수의 사재(私財)를 출연하라는 것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는 빅딜(big deal)이 핵심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기 정부의 재벌 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기업이 가장 큰 손해를 볼지도 모를 일이다.” 30대 재벌 그룹에 속하는 한 그룹 기획조정실장의 주장이다.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된 데는 김대중 차기 대통령의 경제 측근들 간에 손발이 안맞은 면도 있으나, 이를 보도한 언론의 잘못도 있다. 재벌 정책의 수단을 목표로 혼동한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책임은 구조 조정을 일종의 ‘정치 협상’쯤으로 여기는 재벌들에게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DJ의 재벌 정책 핵심은 ‘집중과 전문화’

재벌들은 정권 교체기에는 정부가 으레 재벌에게 압박을 가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노태우 대통령 임기 말에 정부 일각에서 추진했던 신산업정책이나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제시했던 신재벌정책이 그런 예다(신재벌정책은 언론이 만든 조어이고, 김영삼 정부는 신산업정책이라고 표현했다). 그때마다 재벌들은 경제에 충격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재벌 정책의 힘을 빼놓곤 했다. 이와 관련해 김영삼 정부 이전까지는 정치 자금으로 재벌 정책을 무산시키는 추악한 뒷거래가 성행했음은 이미 밝혀진 대로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재벌들이 잊고 있는 대목은, 역대 정부가 요구한 사항들이 재벌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현실성이 없거나 역효과가 확실해 보이는 정책 대안도 일부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한국 기업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금융연구원 양원근 연구위원은 “재벌 스스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정부가 종용해야 하는 현실을 외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김대중 정부의 재벌 정책 또한 같은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차기 정부가 추진하는 재벌 정책의 핵심은 집중과 전문화로 요약할 수 있다. 재벌을 인위적으로 해체하기보다는 외국 대기업들과도 맞서 경쟁할 수 있도록, 자신 있는 몇 가지 분야에 힘을 집중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는 현재 재벌의 위기, 나아가 한국 경제의 위기가 6백조원에 이르는 기업들의 빚과, 많게는 전체 기업의 3분의 1에 이르는 부실화한 계열사 탓이라는 인식에서 말미암는다. 물론 그 배경에는 독선적인 재벌 총수의 판단 착오가 자리잡고 있다.

이같은 분석은 한보·삼미·기아의 연쇄 부도 과정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한보 그룹의 경우 총수인 정태수씨의 잘못이 가장 컸다. 그는 순전히 감에만 의존해 검증도 되지 않은 신공법을 도입해 철강산업에 뛰어들었다. 치밀한 사업 계획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금 조달 계획도 막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초 2조7천억원으로 예상했던 당진 제철소 건설 비용이 5조7천억으로 늘어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를 메우기 위해 자기 자본의 20배나 되는 은행 돈을 끌어썼다. 이 자금 가운데 일부를 로비 자금은 물론 전처에 대한 이혼 위자료로까지 제멋대로 꺼내 썼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한때 탄탄한 기업이었다가 무리하게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면서 은행돈을 자기 자본의 22배까지 끌어 쓴 진로도 사정은 비슷했다. 기아의 경우는 위기의 진원지가 모기업이 아니라 기아특수강·기산·아시아자동차 같은 계열사였다는 점에서만 다소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결국 좌초한 재벌들은 모두 막대한 빚과 부실 계열사, 전횡을 일삼은 총수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사업 구조 조정이다. 아주 부실한 기업은 문을 닫게 하되, 주력 기업이 아닌 업체는 외부(외국 포함)에 팔게 하자는 것이다. 반면 사업의 전문화를 위해 필요하다면 다른 재벌들과 계열사를 맞바꾸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새 정부의 입장이다. 내년까지 64조원에 이르는 재벌 그룹들의 계열사간 상호 지급 보증을 없애는 것이나, 올해부터 외국인들에게까지 적대적 합병·매수(M&A)를 전면 허용한 조처는 이같은 새 정부의 입장과 맥을 같이한다.

또 한 가지는, 국제적 기준, 특히 미국식 경영 관리 체제를 갖추는 일이다. 주주들이 경영자의 경영 성과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묻자는 것이다. 내년부터 재벌 총수가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계열사를 하나의 기업으로 보고 결합 재무제표를 작성하게 한 것도 이를 위해서다. 그렇게 되면 경쟁력이 없는 구색 맞추기식 계열사가 많은 재벌은 허약한 체질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18~19쪽 딸린 기사 참조). 이 밖에도 사외 이사제와 소액주주 대표 소송제 등 선진국에서 행해지는 제도와 장치를 들여오거나 확산시킬 계획이다.

이런 방향은 지난달 김대중 차기 대통령이 5대 재벌 총수와 회동할 때 문서로 재벌측에 전했다. 지난 2월6일 김 차기 대통령이 30대 재벌 총수들과 면담한 뒤에는 비상경제대책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재벌 정책의 구체적 방향을 담은 문건을 작성하고 있다. 그동안 사재 출연과 빅딜 등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가열되어 이를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생존 위해 자발적으로 구조 조정할 것”

재벌의 구조 조정에 변수로 등장한 것이 바로 금융 위기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최근 정부와 국제통화기금은 고금리와 자금난을 해소하는 문제를 놓고 협의해 왔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하는 고금리 수준을 장기간 유지할 경우 괜찮은 기업들까지 쓰러질 수 있으므로 금리를 일찍 내리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협상 과정에 참여한 실무자들에 따르면, 국제통화기금측은 ‘1년간 약을 먹어야 할 결핵 환자가 병세에 약간 차도가 있다고 석 달 만에 약을 끊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논리로 우리측 요구를 일축했다(우리측은 ‘석 달만 투약해도 되는 신약이 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맞섰다). 국제통화기금이 단계적 금리 인하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는 하지만, 고금리는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커졌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추산한 바에 따르면, 평균적인 한국 기업이 견딜 수 있는 금리는 14∼15%라고 한다. 현재와 같은 30%의 ‘살인적 금리’에서는 천원짜리 물건을 팔면 오히려 60원을 손해보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본다. 상황을 다속 낙관적으로 보아서, 금리가 당분간 20% 선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30대 재벌은 약 19조원을 손해볼 수밖에 없다(산업연구원 <한국 경제의 실상과 IMF 체제 하의 구조 개편 방안>, 30대 재벌의 매출이 3% 줄었다고 가정할 경우). “이런 상황이 된다면 대부분의 재벌이 생존을 위해 자발적으로 구조 조정을 하려 들 것이다.” (가제)이라는 책을 곧 펴낼 예정인 재정경제원 이호철 서기관의 주장이다. 재벌들로서는 박태준 총재의 불호령이나 성난 민심에 맞서기보다 생존을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가혹한 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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