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패주 행각 “인민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6.06.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피로써 사수하라” 명령 뒤 평양 탈출…중공군에 작전권 넘겨
북한 인민군이 50년 6월25일을 기해 남침한 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절대로 서울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 다짐을 뒤집고 황망히 서울을 빠져나갔다. 이대통령은 6월28일 새벽 피난민들을 남겨 놓은 채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버렸다.

그렇다면 50년 9월15일 미군 제10군단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이튿날 주전선이었던 낙동강 공격선이 무너진 뒤 김일성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북한측 공식 문건인 〈정치사전〉(북한 사회과학원 펴냄)은 이 시기에 대해 ‘백전백승의 강철 령장이시며 천재적 군사 전략가이신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군사·정치 정세를 과학적으로 통찰하신 끝에 전쟁의 종국적 승리를 위해 전략적 후퇴를 조직하는 데 전력을 다하시었다’라고 적었다.

 
“조국 해방 전쟁” 명분도 내팽개치고…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석달간 김일성의 행적은 지난 40여 년간 베일에 가려 있었는데, 최근 한국전 연구가 박명림씨에 의해 그 전모가 드러났다. 박씨는 한국전을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장기간 추적한 끝에 김일성의 탈출과 후퇴 전말을 밝힌 별도의 논문(미완성) 초고를 〈시사저널〉에 공개했다.

논문에 따르면, 후퇴하는 김일성의 모습은‘백전백승의 강철 령장’ 또는 ‘천재적 군사 전략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그의 후퇴는 전황이 역전되어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자 황망히 은신처를 찾아 떠나는 용렬한 패장의 모습이었다. 그는 ‘조국 해방’이라는 전쟁 명분마저 지푸라기처럼 내버렸다. 아울러 그는 전쟁에 패한 책임을 ‘동지들’에게 전가하고, 자칫 흔들릴지도 모를 북한내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피난 와중에서도 각종 정치·군사 집회를 수없이 열어 경쟁자를 숙청하는 데 열을 올렸다.

박씨 논문에 따르면,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 지도부가 위기감에 싸인 것은 9월27일부터이다. 그는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하루 전인 이 날 도당위원장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와 당조직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 요지는 적들의 침공 속도를 최대한 지연시켜 강력한 반격 집단을 형성하며 계획적인 후퇴를 조직한다’라는 것이었다. 인민군의 후퇴는 급히 마련된 이 날 회의를 통해 공식화되었다.

본격 후퇴 준비는 국군과 유엔군이 잇달아 38선을 돌파하던 무렵인 10월 초순 착수되었다. 10월9일 북한 정부는 평안북도 강계를 임시 수도로 결정한 뒤 주요 기관과 단체 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또 평양 주재 외국 공관은 평안북도의 국경 도시 만포진으로 이전했다. 이틀 뒤인 10월11일 김일성은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는 내용의 방송 연설문을 발표했다. 김일성은 이 때 동부 전선에서 후퇴하는 인민군 2군단에 대해 황해도·강원도 일대의 넓은 지역을 장악하고 유격전을 벌여 ‘적’의 배후를 치라고 명령했다. 전신 연락이 끊겼기 때문에 이 명령은 대대장급 군관을 직접 전선에 파견해 간신히 전달했다.

김일성이 평양을 빠져나간 날은 10월12일이다. 북조선 인민들에게는 피로써 촌토를 사수하라고 요구하고 자신의 휘하 부대에게도 추상 같은 명령을 내려 사지에 뛰어들게 한 뒤, 자기는 극비리에 평양을 탈출했던 것이다. 평양 탈출로 시작된 그의 퇴각·은신 생활은 중국의 팽덕회(彭德懷)가 이끄는 ‘항미원조 지원군(중공군)’이, 북상한 유엔군을 본격적으로 치고내려간 시기인 50년 12월 말~51년 1월 초까지 이어진다.

북한군, 통제 불능 상태 빠져 ‘계획적 퇴각’ 실패


평양을 탈출한 김일성이 처음 머물렀던 곳은 묘향산맥 기슭의 험준한 산악 지대인 덕천(평안남도)으로 밝혀졌다(35쪽 지도 참조). 김일성은 이곳에서 며칠 머무르며 전쟁을 지휘했다. 10월16일 최고사령부와 함께 덕천에 도착한 김일성은 먼저 유엔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진격을 차단할 수 있도록‘제2 전선’을 편성하라고 긴급 지시하고, 사령관(후방총사령관)에 최 현을 앉혔다. 그는 또 군사 지휘관들을 북한 북부와 만주로 파견하여 예비 부대와 새로운 사단을 편성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계획적 퇴각’이 김일성의 희망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0월14일 김일성이 평양을 탈출해 덕천으로 이동하면서 북조선 인민군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장 박헌영과 함께 내린 공동 명령의 내용은 ‘계획적 퇴각 완수’라는 김일성의 전공이 거짓이었음을 보여준다.

극비로 내려진 이 명령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두 사람은 모두 전쟁 수행상의 과오를 인정했다. 먼저 박헌영이 과오를 인정한 부분이 있다. 박헌영은 ‘우리 많은 군관들과 정치 일꾼들은 첫 성과에 대하여 신중하지 못했으며 첫 성과들에 도취함으로써 적의 력량을 과소 평가하는 과오를 범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반대하여 미국이 전쟁에 참가한 결과, 력량 비례와 전투 행정에서 중요한 변천들이 발생된 것을 타산하지 못하였다’라고 시인했다.

김일성 역시 과오를 인정했다. ‘첫째로, 적을 포위 섬멸할 대신에 적을 밀고나감으로써 적에게 퇴각하면서 자기 력량을 보존할 가능성을 주었다. 둘째로, 차지한 진지를 더욱 공고히 하며 여러 가지 수단을 다하여, 즉 전호작업, 도로 교차점들에 지뢰를 파뭇는 것과 우리 부대들과 련합 부대들의 칙면(측면)을 보장하는 것으로써 적의 반격에 상당한 타격을 줄 대신에 적의 반격 시도를 좌절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이 명령서에서 ‘계획적 퇴각’과 관련하여 주목할 부분은 따로 있다. 김일성은 이 명령서에서‘각 전선 또는 군단·사단 별로 독전대를 즉각 조직하여…전투장에서 도주하는 일체 군무자에게 대해 그 장소에서 그들의 죄상에 근거하여 사형, 또는 처벌 부대로 넘기며 또는 그들의 원 부대로 반송시키는 처벌을 집행하는 권리를 부여하라’고 명령했다. 명령 후반부는 사실상의 ‘즉결처분권 부여’를 의미하는데, 이는 역으로, 전선 상황이 일사불란한 퇴각은 엄두도 못낼 정도로 심각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음을 말해준다.

덕천에 머무르던 김일성은 다시 10월19일 어둠을 틈타 대유동(평안북도 동창군)으로 들어갔다. 알려진 대로 대유동은 적유령산맥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 자리잡은 일제 때의 유명한 금광 지역이다. 김일성은 이곳의 한 농가에서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를 극비리에 만났다. 팽덕회가 국경을 넘은 것은 하루 전인 10월18일 밤이었다.

김일성·팽덕회 회담은 10월20일 오전 9시부터 열려 12시까지 거의 3시간 동안 진행된 것으로 알려진다. 팽덕회는 이 자리에서 중공군이 이미 10월19일 밤 중국 지역 세 방면에서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북한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김일성이 감사를 표시하며 곤란한 상황을 설명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김일성·팽덕회 회담의 실무를 맡았던 시성문의 회담 기록은 긴박하기 그지없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중요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김일성
:지금 우리는 가장 곤란한 시각입니다. 대단히 잘 오셨습니다.

팽덕회:수고하십니다. 당신들의 투쟁은 비단 당신들 자신을 위해서 뿐만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이미 막중한 민족적 희생을 치렀는데 우리가 지원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김일성:감사합니다. 정세가 매우 긴박합니다. 중공 중앙의 결정과 계획을 먼저 이야기하십시오.

팽덕회:우리 부대는 (10월)19일 밤 안동·장전·하구·즙안 등지에서 진격하고 있습니다. (생략)

김일성:(생략).

팽덕회:현재 문제는 부대가 강을 건너 진주하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고, 진지 구축도 시간이 소요됩니다. 지금 적이 미친듯이 진격하니 우리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김일성:적은 기세가 등등해서 무서운 것이 없이 날뛰고 있습니다. (각 전선의 상황을 설명한 후) 동부전선 여러 곳과는 전신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대단히 곤란을 겪고 있는 모양입니다.

김과 팽의 10월20일 회담은 또 다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작전권이 유엔군에 넘어갔던 것처럼, 이 날 회담을 기점으로 사실상 북측의 작전권은 북한에서 중공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이는 전쟁이 끝난 뒤 북한측이 오늘날까지 고집하는 ‘전쟁의 주체는 북한이었다’는 주장과 배치되는 사실이다.

팽덕회는 이 날 회담에서 평양-원산선 이북과 덕천-영원선 이남 지구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전투를 벌이겠다는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내놓았다. 팽덕회는 또 전적으로 중공군측이 군사 작전을 입안·집행할 것임을 넌지시 암시했다. “현재…가장 중요한 과제는 미국 침략군을 섬멸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고, 다음은 미국이 중국에 선전 포고할 경우에 대비해 준비를 안할 수 없다. 적어도 동북과 우리나라(중국) 공업도시 연해지구 폭격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팽덕회와의 회담에서 사실상 작전권을 넘겨준 김일성은 10월25일까지 대유동에 머무르며 작전회의를 주재하다가 10월25일 밤 평안북도 창성으로 떠났다. 미군의 북진으로 대유동마저 안심하고 숨어 있을 곳이 못되었던 것이다. 이곳에 머무르던 기간 김일성은 한 농민 집에 기거하며 작전을 지도하고, 미군의 공습을 피해 대유동 갱 안에서 작전회의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김일성은 11월3일까지 창성과 유평을 오가다가, 11월4일부터 압록강을 따라 북상을 시작해 11월8일 최장의 은신처요 마지막 근거지었던 고산진에 도착했다(35쪽 지도 참조). 그는 이동하면서 주로 터널·갱도나 농가에 머물렀는데, 이는 미군의 폭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숨어 있기 위함이었다.
인민군 총사령관 최용건은 전쟁 반대

10월 말부터 김일성은 고산진-강계-만포 별오리로 ‘3각 지휘부’를 구성해 각지를 오가면서 수많은 회의와 결정을 내렸다. 미군에 쫓기는 신세이고, 더욱이 주요 작전의 지휘권마저 중국에 넘겨준 상태여서 이 시기의 김일성은 묘한 이중적 환경에 놓여 있었다. 즉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에 몰릴 정도의 화급한 상태였으나 실제 행동(전쟁)은 중국이 했던 것이다. 박명림씨는 이를 ‘할 일이 너무도 많았으나, 딱히 할 일도 없는 이중 현상의 병존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 유지와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작업을 진행했다. 먼저‘인민군 철의 규율’을 강조함으로써 전쟁 패배로 인해 발생한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위 손상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다. 김일성은 전쟁 전부터 군부내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지들과 ‘전쟁 도발’ 문제를 두고 보이지 않는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와 만주 시절부터 생사를 함께 했던 사람 중 일부가 전쟁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한국전 직전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자 민족보위상으로서 군의 최고 책임자였던 최용건이었다. 그는 전쟁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다가 50년 9월 인민군이 ‘방어총사령부’를 설치할 무렵 비로소 전면에 등장했다.

김일성은 팽덕회와 대유동에서 극비 회담을 한 직후 조선로농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중요한 결정이 채택되었다. 인민군 안에 당 조직을 만들고, 인민군 문화부를 정치부로 개편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김일성은 군에 대한 당의 ‘우월성’을 내세워 전세 역전으로 인해 자칫 허물어질지 모를 자신의 지도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김일성의 규율 강조 작업은 50년 11월로 넘어가면서 더 두드러졌다. 10월30일 김일성은 창성중학교에 인민군 최고사령부 군관 3백명을 불러모아 장령회의를 열면서 ‘규률은 군대의 생명이며 전투력의 원천이다. 인민 군대를 당의 지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수행하며 어떤 난관과 시련도 용감히 뚫고 나가는 강철의 대오, 불패의 혁명 무력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강변했다. 그는 뒤에도 당 중앙위원회(11월2∼3일, 6일, 18일)와 군사위원회, 조선인민군 연합부대장회의, 정치부장회의, 내각 전원회의(12월10~12일) 등 수많은 회의를 열어 기회 있을 때마다 당의 강화 방침을 역설했다.

이와 동시에 김일성은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던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분위기 조성 작업에 나섰다. 사실상 이 시기는 북한 지도부의 퇴각 시기이자 권력 투쟁 시기이기도 했다.

 
북한 고위 인사, 미군에 김일성 위치 제보?


전세가 기울어지면 전쟁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지는 일은 당연하다.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먼저 김일성은 함께 전쟁을 일으켰던 박헌영과 최소한 두 차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최초의 논쟁은 11월7일 만포진 소련대사관의 10월 혁명 33돌 기념식장에서 벌어졌다. 논쟁의 초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스탈린 앞에서 박헌영이 북한군이 밀고 내려가면 남로당이 들고일어난다고 정세 보고를 잘못했다는 점(김일성의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왜 인민군 전부를 낙동강 전선으로 내몰아 후퇴 작전 때 인민군을 ‘독 안의 쥐’ 꼴로 만들었느냐(박헌영의 주장) 하는 것이었다. 전쟁 패배 책임을 둘러싼 ‘중대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에는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김일성의 주장은 결국 53년 휴전 직후 벌어진 박헌영과 남로당파에 대한 ‘피의 숙청’에 빌미가 되었다.

김일성 피난 시대의 막바지 기간은 이미 스칼라 피노 등 몇몇 사람의 연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 기간은 당시 민족보위성 부상이자 인민군 포병사령관이었으며,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을 계기로 김일성에게 장차 최대의 정치적 경쟁자로 등장하게 될 무 정(武 亭)을 숙청하는 작업으로 장식되었다. 무 정은 알려진 대로 광복 전 중국 8로군에서 활약했으며, 중국을 무대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그는 50년 12월21∼23일 강계에서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평양방위사령관으로서 평양 사수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문책당했다. 보고자는 당연히 김일성이었다.

박명림 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이같은 사건이 벌어졌던 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 장소는 정확히 강계가 아니라, 그에 인접한 장강군 향하리였다. 그리고 이 무렵 미군은 고산진 일대에 끊임없이 공중 폭격을 하고 있었다. 박씨는 이에 대해 두 가지를 추정하고 있다. 미군 정보기관이 북한 최고 지도부의 이동 경로와 주둔지를 정확하게 인지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북한 정부내 고위 첩자가 최고사령부의 이동을 암호로 미군에게 제공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이 있다. 김일성은 미군이 자신의 근거지를 알아내 정확하게 폭격을 가하던 바로 그 순간에도,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전우와 동료들에게 패전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한 일대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이 발발한 지 46년. ‘김일성 신화’는 끊임없이 부풀려져 왔고 지금도 부풀려지고 있다. 그 신화는 한국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 이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실체적 진실뿐이다. 그러나 진실을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숨겨진 것이 더욱 많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