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분야] 정치 개혁 부진 “최대의 실책”
  • 李叔伊 기자 ()
  • 승인 1998.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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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분야/“인사 문제 없고, 정국 불안은 야당 때문” … 북풍·환란 수사 결과에는 부정적
이제 ‘정치 9단’이라는 찬사는 빛이 바랜 것일까? 취임 100일을 평가하는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받은 정치 점수는 65.9점이다. 이는 국정 전반에 관한 평점의 평균치나 경제 점수보다 2∼4점 낮은, 그야말로 낙제를 겨우 면한 수준이다.

세부 항목에 대한 평가에서도 정치 분야는 주로 못한 일에 많이 꼽혔다. 취임 후 김대통령이 가장 잘한 일을 꼽는 베스트 5 가운데 ‘지역 갈등 해소’가 겨우 이름을 올린 반면, 가장 못한 일을 꼽는 워스트 5에서는 ‘정치 개혁’과 ‘정부 인사’가 1위와 4위를 차지했다.

각계 전문가들이 정치 개혁(26.5%)을 최대 실책으로 꼽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김대통령의 개혁 의지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들은 50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자 불안한 가운데서도 상당한 기대를 가졌었다. 구태 의연한 정치 관행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였다. 하지만 이번 여론조사 결과에서 나타났듯이 그 기대는 서서히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출신지보다 비개혁적 인사 중용한 것이 문제”

응답자들이 정치 분야의 실책 2, 3위로 정부 인사(20.1%)와 정부 조직 개편 (16.7%)을 꼽은 것도 결국은 정치 개혁에 대한 불만과 연결되어 있다. 개혁을 추진할 주체 세력과 틀이 제대로 꾸려지지 않았음을 꼬집은 것이다.

정치 개혁이 DJ 정권을 평가하는 주요 잣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 여론조사 결과 곳곳에서 감지된다.

우선 정부의 인사 정책에 대한 평가에서 응답자들은 ‘호남 일색으로 편중 인사를 단행하고 있다’는 야당의 주장보다는 ‘역대 정권의 왜곡된 지역 편중 인사를 바로잡은 것’이라는 여권의 주장에 더 공감했다. 그것도 37.8% 대 61.2%라는 압도적 차이를 보였다. 이는 야권과 언론이 DJ 정권의 최대 문제점으로 지적한 ‘호남 편중 인사’가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흥미로운 결과다.
그렇다면 앞서 총론적 평가에서 응답자들이 인사 문제를 김대통령의 주요 실책 가운데 하나로 지적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에 대해 설문에 응한 한 정치학자는 ‘출신지보다 비개혁적 인사를 중용한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치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대통령에 당선되면 자신의 스타일을 가장 잘 알고 보좌할 핵심 측근을 요직에 임명한다면서, 그 예로 클린턴 대통령의 조지아 사단과 부시 대통령의 예일 대학 출신 고향 친구들을 들었다. 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측근을 중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말이다.

문제는 비개혁적 인사들이 ‘화합’이라는 명분을 업고 대거 요직에 발탁된 점이라는 지적이 많다. 시민단체의 한 간부는 “김대중 정부에 대한 평가는 결국 개혁을 얼마나 성취했느냐가 기준이 될 것이다. 개혁을 잘 추진할 수만 있다면 호남 출신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느냐”하고 라문했다.

그러나 호남 편중 인사에 대한 반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영남권을 중심으로 DJ 반대편에 섰던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호남이 다 말아먹는다’는 분위기가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개혁’과 ‘지역 통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할 김대통령으로서는 섣불리 어느 한쪽에 힘을 실을 수 없는 난처한 처지다.

둘째로, 정국 불안의 원인을 진단하는 데서도 전문가들은 개혁을 이유로 여권의 손을 들어 주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야기된 정국 불안이 ‘거대 야당의 발목 잡기(여당 주장) 때문인가’ 아니면 ‘김대중 대통령과 여당의 정국 운영 미숙(야당 주장) 때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여당 주장에 동의한다는 답변(69.1%)이 야당 주장에 동의한다는 답변(28.4%)보다 2배 이상 나왔다. 이런 결과는 정계 개편에 대해 지지하는 응답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조사 결과(16∼18쪽 기사 참조)와 곧바로 연결된다.

요약한다면 응답자의 상당수가 정치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원인을 거대 야당의 발목잡기로 진단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기 정계 개편이 바람직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청와대의 상황 인식과 거의 맞아떨어져 앞으로 정국 운용의 주요 지표가 될 전망이다.

호남 편중 인사 시비나 여소 야대 정국에 대한 평가에서 여권의 주장을 옹호한 응답자들은, 그러나 북풍 사건과 환란 책임에 대한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먼저 김대통령 취임 후 여야간 최대 쟁점 가운데 하나였던 북풍 사건의 처리 과정 및 결과에 대해 ‘매끄럽게 처리됐다’고 보는 응답자는 44.6%, ‘잘못 처리됐다’고 보는 응답자는 53.4%로, 부정적인 답이 더 많았다. 이는 북풍 사건의 최대 희생자임을 주장하며 구 여권의 북풍 공작 전모를 명확하게 파헤쳐 보겠다던 김대통령측의 의도가 결과적으로 한참 빗나갔음을 의미한다. 이대성 파일과 국민회의 인사들의 북풍 연루설, 그리고 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자해 소동으로 이어진 북풍 사건은 요란했던 수사 과정에 비해 결과가 명쾌하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 언론인은 “북풍 수사는 진실이 덮인 채 또하나의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언젠가는 이 미제 사건이 김대중 정권의 부담으로 떠오를 것이다”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북풍 수사에 대해서는 특히 법조인들의 불만이 80%로 높았다.

북풍과 함께 김대중 정권 초창기의 양대 쟁점이었던 환란 수사에 대해서는 북풍 사건보다 더 가혹한 평가가 내려졌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환란 수사가 ‘잘됐다’고 평가한 사람은 24.5%인 데 반해, ‘잘못됐다’고 평가한 사람은 75%나 된다. 그것도 ‘매우 잘됐다’고 응답한 사람은 2명(1%)뿐이고, ‘매우 잘못됐다’고 응답한 사람은 60명이 넘었다. 특히 설문에 응한 법조인 5명은 모두가 환란 수사가 잘못되었다고 평가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북풍 수사에 대해 가장 너그러웠던 기업인들이 환란 수사에 대해서는 몹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점이다. 환란 수사가 ‘매우 잘못됐다’고 응답한 비율은 기업인 집단에서 가장 높았다.
대통령 친인척 관리 “잘하고 있다”

환란 수사에 대한 여론이 나쁘다는 것은 환란 책임이 전적으로 YS 정권에 있다고 주장해 온 DJ 정권이 어설프게 손을 댔다가 오히려 손해만 입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환란 수사의 어떤 부분이 비판거리가 되는 것일까? 정치권과 법조계 일각에서는 한때 ‘정책 판단은 사법 처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에 대한 사법 처리가 부당하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응답자들은 ‘정책 판단도 사법 처리 대상이 될 수 있다(65.7%)’며 여권의 사법 처리 방향이 옳았다고 평가했다. YS 정권의 실정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사법적 심판이 가능하다는 의견이다.

이런 여론에 비추어 볼 때 환란 수사에 대한 비난의 요체는 ‘형평성’에 있는 것 같다. ‘벌 받지 않아야 할 사람을 벌쓰게 했다’가 아닌, ‘벌 받아야 마땅한 사람을 그냥 놔두고 있다’는 것이 환란 수사에 대한 평가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원인인 셈이다.

북풍 수사와 환란 책임 규명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공안 당국의 정치적 중립성 여부를 묻는 질문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응답자들은 김대중 대통령 취임 이후 검찰·경찰·안기부 등 이른바 공안 당국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느냐는 질문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잘 지켜지고 있다’ 44.1%, ‘지켜지지 않고 있다’ 54.9%). 특이한 것은 역대 정권이 공안 당국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가장 진저리를 쳤던 시민단체들이 이번에는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언론인들이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이다. 최근 한 언론은 사설에서 ‘우리 정치는 검찰을 너무 좋아한다. 검찰은 정치에서 멀면 멀수록 좋다’라고 주장해 현정권에서도 여전히 공안당국이 정부와 밀착해 있는 것 아니냐는 세간의 의심을 반영했다.

이 밖에 응답자들은 DJ의 친인척 관리에 대해서는 ‘잘 지켜지고 있다’ 78.4%,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12.3%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번의 DJ 정권 100일 평가에서 가장 도드라진 대목은 국민들이 진정으로 개혁을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 정계 개편 등 약간의 무리수가 따른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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