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박찬종, 여당 대권 후보 1ㆍ2위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6.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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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박찬종 독주…김윤환 하락세, 이홍구 떠올라
 
이회창·박찬종은 끝났다, 두 사람은 철저하게 YS의 총선 돌파용 카드로 쓰였을 뿐이다. 두 사람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언제 어떤 형식으로 팽당하느냐 하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4·11 총선이 끝난 뒤부터 정치권에서는 이런 관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영입 인사의 ‘비극적 최후’를 입에 올리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판단은 정치권의 상황 인식과는 크게 다르다. 상당수 국민은 두 영입 인사가 여권의 최종 대권 주자가 되리라고 믿고 있다. 〈시사저널〉은 지난 5월 말 ‘여권의 차기 대권 후보’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는 이번 ‘야권 후보 단일화’에 관한 여론조사에 앞서서 사전 조사 형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사전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여권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가장 유력시되는 인물’로 이회창(31.3%) 박찬종(26.7%)을 나란히 1,2위로 지목했다. 응답자 10명 가운데 5.8명이 이회창·박찬종 중 한 사람을 지적한 셈이다. 그만큼 두 사람은 국민 사이에서는 배타적인 독주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치권의 기류와 국민 의식 간의 이러한 간극은, 여권이 차기 주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과 내부 분란을 겪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두 영입 인사 중에서도 이회창의 약진이 눈길을 끈다. 그는 이번 조사에서 ‘여권 차기 주자로 가장 유력한 인물’에 지목되었다. 두 사람이 신한국당에 입당한 직후인 지난 1월 실시된 〈시사저널〉 여론조사 때만 해도, 그는 박찬종에 이어 2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여론조사 대통령’으로 불리는 박찬종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이회창에 대한 지적률은 겉으로만 본다면, 지난 1월 지적률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조사 방식의 차이(1월 조사는 대권 후보 2명을, 5월 조사는 1명만 지적하도록 했다)를 감안한다면, ‘대권주자 이회창’에 대한 기대감은 더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집권 여당의 간판으로 나서 4·11 총선거를 치르면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것과 대중적 인기를 확보하는 데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를 지적한 비율은 특히 40대(40.1%) 대학 재학 이상(41.5%) 화이트컬러(38.1%) 서울(41.4%)에서 높게 나타났다.
 
“오판 말라. 이회창에게 줄서면 안된다”


그러나 앞에서도 거론했듯이 정치권에서는 총선이 끝남과 동시에 ‘이회창은 끝났다’는 시각이 급속하게 형성되고 있다. 총선 이후 김대통령은 당과 국회직 개편을 통해 민주계 전진 배치를 완료했다. 요즈음 민주계 핵심부에서는 은밀하게 ‘이회창 불가론’이 거론되고 있다. 불가론의 배경은 간단하다. 이미지 관리에 집착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그가 김대통령의 퇴임 후 안전을 보장하거나 막후 영향력 행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므로 차기 주자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회창 불가론은 단순히 설왕설래하는 수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4·11 총선 때 ‘이회창 대권주자론’을 주도했던 충청권의 한 민주계 중진 의원은 최근 이 지역의 초·재선 의원들에게 ‘절대로 오판하지 말라. 이회창에게 줄서면 안된다’라고 충고했다.

이회창 진영도 돌아가는 상황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점을 감지하고 있다. 지난 5월 중순 〈한겨레 21〉과 가진 인터뷰에서 ‘실질적인 자유 경선’을 주장하면서 YS에 대한 간접 비판을 감행한 것도, 총선 이후 여권내 흐름에 대한 불만과 위기감을 표출한 것이라고 보는 이가 많다. 그는 이 인터뷰가 공개된 뒤에도 아무런 추가 해명이나 변명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 발언이 확고한 소신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했다. 그의 한 핵심 측근은 “이러다가 팽당하는 게 아니냐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다. 갈수록 첩첩산중이고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팽하면) 그쪽에서도 상당한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여권 내부에서 그를 둘러싸고 미묘한 흐름이 전개되는 가운데, 야권의 끈질긴 ‘이회창 흠집내기’도 진행되고 있다. 국민회의는 여야가 대치하는 개원 정국 내내 ‘여당은 무리한 과반수 확보로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데, 대쪽을 자처하는 그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며 이회창을 향한 파상 공세를 펼쳤다. 국민회의는 이러한 공격을 통해 개혁을 외치는 신한국당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잠재적 대권 주자’인 이회창을 미리 흠집내는 다목적 효과를 겨냥하고 있다.

그는 여야가 의장단 선출을 놓고 본회의장에서 몸싸움을 하는 동안 내내 굳은 얼굴로 자리를 지키면서 ‘노코멘트’로 일관했지만, 여권의 인위적인 여대야소 만들기와 무리한 밀어붙이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면서도 정치권에서는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회창의 이중적 상황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될 공산이 크다.

같은 영입 인사인 박찬종 앞에 놓인 상황도 이회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갑갑하다면 더 갑갑한 처지다. 4·11 총선의 잔치 분위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는 수도권에서 여당이 대약진한 데 일등 공신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그런 공훈에 대한 보상은 아직까지 받지 못했다. 국회에 들어가지 못한 원외 인사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정치권에서 잊힌 인물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이 발버둥을 쳐야 하는 처지이다. 하지만 그는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대중 정치인으로서의 저력을 재확인했다. 비록 2위로 처지기는 했지만, 금배지도 달지 못한 그가 ‘여권의 차기 주자’ 2위로 지목된 것은 결코 간단하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그가 여권의 차기 주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응답은 특히 30대 이하 여성(35.6%), 학생(40.5%) 경남(43.2%) 지역에서 높게 나타났다.

총선이 끝난 뒤 박찬종의 정치 행보는 이회창에 견주어 훨씬 보폭이 빠르고 거침이 없다. 그는 지난 5월 한달 동안 전국 배낭 여행, 일본 방문, 대학 강연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보냈다. 종로구 관훈동에 자신의 사조직인 우당 산악회 사무실을 마련하고 회원 배가 작업에 들어갔다. 수도권 선대위원장 시절에 거느렸던 방대한 참모 조직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는 이 달 안에 제2차 전국 배낭 여행과 미국 방문에 돌입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다.

총선 직후부터 ‘박찬종 대통령 만들기’에 들어간 그의 참모들은 그에게 이미지 변신을 강력히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성·학생층에 집중된 종래의 지지층을 넓히기 위해서는 다소 가벼운 이미지에서 좀더 무게 있는 이미지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바리 코트를 입은 인기인’이미지에서 탈피하려는 그의 대권 전략은 최근 그의 언행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5월28일 연세대 경영대학원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부국강병론’과 ‘정치권의 일대 발상전환’을 주장했다.

이홍구 대표, 대중적 이미지 취약

영입 인사의 여전한 독주와 함께, 이번 여론조사에서는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현상이 발견된다. 김윤환 전 신한국당 대표의 하락세와 이홍구 신임 대표의 상승세가 그것이다. 이런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응답자들은 정치 뉴스에서 사라진 김윤환 대신 새로이 뉴스 전면에 등장한 이홍구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과를 김윤환 가라앉음, 이홍구 떠오름으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김윤환은 4·11 총선에서의 부진한 성적과 대표직 경질에도 불구하고 3위 자리를 지켰다. 반면 이홍구는 차기 주자군에 새로이 진입하기는 했지만, 대표 취임과 2002년 월드컵 유치 등으로 뉴스가 집중되는 가운데에서도 4.3%라는 비교적 낮은 지목률에 머물렀다. 이번 여론조사는 한마디로 정치인의 대중적 기반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도, 하루아침에 사그라드는 것도 아님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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