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지방 선거 배수진 진격
  • 崔 進 기자 ()
  • 승인 1998.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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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선거는 개혁 보루” 필사의 결의 압승 후 대규모 정계 개편 완수 계획
청와대에 비장한 기류가 감돈다. 김대통령이 차가워졌다. 입에서 ‘기필코’‘단호하게’라는 강한 말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온다. 5월1일 근로자의 날, 청와대에 DJ 정권 출범 이후 처음으로 최루탄 연기가 날아들고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청와대 관계자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취임한 지 두 달밖에 안됐는데….” 이날 김대통령이 어떤 표정을 짓고 뭐라고 말했는지 박지원 청와대 대변인은 공식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김대중 정부는 벌써 난관에 부딪쳤는가, 아니면 역대 정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과성 상황에 불과한가. 시각에 따라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리는 것 같다. 먼저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김대통령에 대한 국민 지지도가 여전히 80%대를 넘고 있다는 점을 내세우면서, 조만간 여소야대의 벽이 허물어지면 한나라당이 맥을 못 쓰게 될 것이라고 본다. 6·4 지방 선거 역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연대한 여권이 거의 싹쓸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의 얘기는 다르다. DJP 공동 정권의 수레바퀴가 벌써부터 삐걱거리고 대규모 실업에 따른 불만이 점차 여권으로 향하고 있어서 현정권의 위기가 의외로 빨리 닥치리라는 전망이다. 김대통령과 국민회의에 대한 높은 지지도에 대해서도 한나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집권 초반에 흔히 나타나는 거품 현상 아니냐’면서 언제든지 급전 직하할 것으로 보았다.

요컨대 요즘 정국은 여권에 대한 지지도가 높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의 강도 역시 높은 이중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이를 ‘반(半) 반(半) 정국’이라고 표현했다. 절반의 지지와 절반의 비판이 팽팽이 맞서 있는 고빗길이라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무게 중심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대세도 그 쪽으로 쏠리게 된다는 점에서 여권은 어떻게든 대세를 지지 쪽으로 틀려고 하고 있다.

여권 핵심부는 이 대세를 움직이는 데 필수적인 것이 바로 정계 개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대통령이 최근 들어 정계 개편의 깃발을 높이 치켜 들면서 강경 기조로 방향을 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대통령은 그동안 “인위적인 정계 개편은 없다. 대신 여당이 도와 주어야 한다”는 신중론을 펴 왔으나 최근 들어 ‘야당이 협조하지 않으면 정계 개편을 할 수밖에 없다’는 강경론 쪽으로 급선회했다. 국민회의의 정계 개편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여권은 5월5일 현재 7명의 한나라당 의원을 영입한 것을 시발로 이미 1단계 개편 작업에 들어갔다. 앞으로 4명만 더 한나라당을 탈당하면 여소야대의 벽이 허물어진다. 국민회의는 현재 서울과 인천 출신 2∼3명, 경기 출신 2명 등 한나라당 의원 5명 정도가 곧 국민회의에 추가 입당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바야흐로 국민회의가 꿈에도 그리던 여대야소 국면이 실현될 날이 코앞에 닥쳤다.

국민회의는 연합 공천을 통해 지방 선거에서 압승한 뒤, 대대적인 정계 개편을 단행한다는 시나리오를 세워 놓고 있다. 국민회의의 한 고위 당직자는 “한나라당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여소야대의 벽이 깨지면 그동안 지연되었던 개혁 작업을 마음껏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대야소만 실현되면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정상 궤도로 진입할 것이라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김대중 정부가 여소야대에 발이 묶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의석 탓이라고 말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우선 정계 개편을 위해 국민이 납득할 만한 대의 명분이나 명쾌한 청사진이 없다. 개혁 세력끼리 손잡는 노선 연합 형태도 아니고 지역 연대 형식도 아니다. 역대 정권이 으레 사용해 온 ‘몸통 불리기’와 다른 점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정계 개편의 주요 대상도 바뀐 것 같다. 국민회의는 당초 동교동과 상도동이 다시 손잡는 민주 대연합이나 민추협 동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최근 들어 민정계 쪽을 끌어들이는 보수 연합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분위기다. 대표적인 예로 국민회의에 입당한 한나라당 의원 5명이 한결같이 민정계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이종찬 안기부장이나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 등 구여권 인맥의 연고가 작용했을 개연성이 높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민정계이다 보니 아무래도 과거에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들어오기 쉽다. 실제로 이번에 입당한 한나라당 의원들 가운데는 이부장이나 김실장과 가까운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영입 대상, 민정계→민주계 순

김대통령과 국민회의가 아예 내놓고 ‘도와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지역은 두 말할 것 없이 대구·경북이다. 김대통령은 첫 지방 순시 지역으로 택한 대구에서 ‘이번에 당신들이 나를 도와주면 다음에 이 지역 사람을 밀어 줄 수도 있다’는 메시지까지 던졌다. 최근 정치적 재기설이 나도는 전두환·노태우 씨와 그 측근들에 대해 여권이 비교적 우호적인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도 다 TK 민심을 고려해서다. 5·18 때 발포 명령 혐의를 받았던 정호용씨의 국민회의 입당 타진설이 나돌 정도이고 보면, 국민회의와 5·6공의 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김대중 정권의 실세인 이종찬 안기부장과 김중권 비서실장이 각각 5·6공 출신이라는 사실도 그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민주계와의 연대를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다. 따지고 보면 환란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현정권이 봐주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민주계와의 연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다만 집단성이 강한 민주계의 속성상 이들을 끌어들이기에는 좀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당장 여소야대의 벽을 깨야 하는 국민회의로서는 일단 오겠다는 민정계 인사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말하자면, 민정계는 단기 카드, 민주계는 중장기 카드인 셈이다.

여권이 정계 개편을 성공시키기 위해 당장 넘어야 할 고비는 6·4 지방 선거이다. 국민회의는 김대통령이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가려면 지방 선거, 특히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선거에서만큼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보고 있다.

5월4일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에서는 고 건 전 총리를 비롯해 지방 선거 출마 후보자 및 지구당위원장 5백여 명이 참석해 지방 선거 전진대회를 성대하게 치렀다. 이 자리에서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은 “새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밖에 안됐는데 국민들은 모든 것이 더디다고 조바심을 내고 있다”면서 만약 이번 6·4 지방 선거에서 여권이 패배하면 김대중 정부는 커다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회의는 고 건 전 총리의 지지도가 단연 높다는 점을 들어 승리를 장담하고 있다. 더구나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단일 후보인 데다 서울에는 전통적으로 DJ 고정표가 많아 승리는 어렵지 않으리라고 본다.

서울시장·경기지사 대결도 만만치 않은 상황

그러나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한나라당 최병렬 후보 자체가 만만치 않은 강적인 데다 이회창 명예총재가 제2의 대선으로 알고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겠다는 강한 의지를 일찌감치 피력해 왔다.

게다가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박찬종 국민신당 고문이 최병렬씨의 지역구에 출마하는 조건으로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시사저널>이 조사한 서울시장 후보 호감도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회창 16.1%, 박찬종 10.4%로 비교적 높게 나왔다. 이들이 3자 연합 작전을 펼칠 경우 국민회의는 의외로 고전할 수 있다.

더군다나 국민회의 당직자들은 동교동계인 한광옥 부총재가 서울시장 출마를 중도에 포기한 이후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다.

모든 당력을 기울여도 버거울 판국에 당원들의 사기를 어떻게 진작시킬지 관건이다.

경기도의 임창렬 후보도 안심할 수 없다. 국민회의는 임후보의 지지도가 한나라당 손학규 후보보다 10% 이상 차이로 우세하다는 점을 들어 승리를 자신하고 있지만, 환란 태풍이 워낙 거세 상황을 예측할 수 없다. 게다가 한나라당은 연일 대변인 논평과 성명을 쏟아내며 임후보를 환란의 공범으로 몰아가고 있다.
지방 선거가 중요한 또다른 이유는 이번 선거가 김대중 정권을 내놓고 비판하는 첫 공개 무대라는 사실이다. 전국의 수많은 야당 후보들이 현정권의 실책, 예컨대 환란 책임론이나 호남 출신 인사 편중 문제를 집요하게 공격할 것이 뻔하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기선을 잡지 못하면 이후 김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올 것이다.

연합 공천, 정계 개편 지렛대로 활용

국민회의는 이번 선거에서 연합 공천 전략을 최대한 활용해 정계 개편의 지렛대로 활용할 계획이다. 국민회의가 취약한 선거구에서 강자를 밀어 주고 강세 지역에서는 자기 당 후보를 단일 후보로 내세우는 연합 공천이야말로 정계 개편으로 가는 징검다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회의가 정계 개편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면 무엇보다 자민련과의 관계를 확실히 정립해야 한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5월4일 김대통령이 국민회의와 자민련 양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부부 6백여 명을 청와대 녹지원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과거처럼 권세도 부리지 못하고 고생만 하고 있다”며 다분히 감성적으로 호소한 것도 내심 양당의 갈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김대통령은 이어 경제난 극복과 중단 없는 개혁을 위해서는 지방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고 필승을 당부했다.

여권이 정계 개편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반드시 지방선거에서 이겨야 한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정치판의 지형을 송두리째 뒤바꿀 수도 있는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김대중 정부의 점수가 매겨진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여야가 필사적으로 덤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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