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P 한계' 극복하라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8.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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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재벌·군을 지지 기반으로 만들어야
김대중 정부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의문을 푸는 열쇠는 4세기 전에 활동한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쥐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정치적으로 소수파인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지와, 역대 정권을 떠받쳐 온 관료·군·재벌이 김대중 정부의 지지 기반으로 바뀔 것인지, 아니면 ‘반김대중 세력’으로 남을 것인지 통찰력 있는 해답을 담고 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고독 닮은 김대중의 고독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6세기 초 사분오열된 채 외침에 시달리는 이탈리아를 구할 지도자는 행운(fortune)과 능력(virtue)을 갖추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이처럼 행운과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임혁백 교수(이화여대·정치학)는 지적한다. YS의 경제 실정,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 시비, 여권 분열 같은 행운이나, ‘DJP’라는 승리 연합을 구성한 능력 중 어느 한 가지만으로 김대중 정부의 출범 배경을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키아벨리가 이른바 ‘새로운 군주’에게 더 많이 기대했던 덕목은 행운보다는 능력이다. 마찬가지로 김대중 정부의 출범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도 김대중이라는 지도자의 능력이라는 것이 임교수의 지적이다. 다시 말해서 김대중 후보가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와 DJP 연합을 이루어 수도권과 호남에 편중된 지지 지역을 충청권 전체와 영남권 일부로 넓히지 못했다면 집권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DJP 연합을 지역 연합이라고만 규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지역주의가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에 이어 김대중 정부 출범에까지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DJP 연합이나 박태준 총재까지 가세한 DJT 연합은 지역 연합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진보로, 김종필 명예총재나 박태준 총재는 보수로 평가되기 때문에 이들 연합은 ‘진보와 보수 연합’이나 ‘민주화 세력과 근대화 세력 연합’이라는 시각으로도 보아야 한다고 임교수는 분석한다.

그러나 문제는 김대중 정부의 출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DJP 연합이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이는 DJP가 이념 연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DJP 연합에 따른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동 정권인 김대중 정부를 상이한 이념을 가진 인사들이 구성하는 만큼 각 부문 개혁이 ‘산으로 갈’ 가능성이 없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다시금 ‘마키아벨리적 능력’이 요구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자기가 구상한 정치 및 경제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73년 자신을 납치한 중앙정보부(안기부 전신)를 창설한 김종필 명예총재 등 태생적으로 정치적 입장이 다른 인사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DJP 연합을 이루어 대선에서 승리한 것과 같은 마키아벨리적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적 능력이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느 지도자도 이같은 능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정적들의 엄청난 저항에 직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16세기 초 유럽을 사실상 지배했던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에 <군주론>을 바치고 낙향한 뒤 고독을 느껴야만 했다. 그같은 능력을 갖춘 ‘새로운 군주’가 출현하기 어렵다고 예감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취임하면서 ‘마키아벨리적 고독’을 느낄 개연성이 높다. 김대통령이 자민련이나 6공 출신 세력의 이질적인 입장을 효율적으로 통제해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불안해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의 목표가 단순히 대통령이 되는 것에 있지 않고 대통령이 된 뒤 IMF 한파를 돌파하기 위해 정치 및 경제 개혁을 성공시키는 데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다.
군부, DJ 정권의 개혁 대상에서 비켜나

그러나 마키아벨리적 능력이 더욱 요구되는 곳은 다른 데 있다. 역대 권위주의적 정권을 물적·이념적으로 뒷받침하면서 ‘김대중 비토 세력’으로 기능했던 군·관료·재벌을 김대통령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마키아벨리적 능력이 절실한 것이다. 만약 이같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 DJP 연합의 내부 모순이 드러나고 군·관료·재벌까지 ‘반DJ 세력’으로 남게 된다면 정치 및 경제 개혁이 성공하기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이 마키아벨리적 능력을 발휘했을 때 군·관료·재벌의 성격이 변화할 것인지 여부이다. 이는 김대통령의 구체적인 개혁 과제와 맞닿아 있다. 그가 추진하고자 하는 개혁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김영삼 정부 때 이룩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진정한 의회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개혁이다. 그리고 작지만 강력한 정부를 위해 관료주의 폐해를 극복하는 개혁이다. 마지막으로 재벌을 개혁해 민주적 시장 경제를 건설하는 일이다.

군은 김대중 정부의 개혁 대상에서 사실상 비켜 있다. 이는 김영삼 정부가 군에 대한 문민 통제를 이룩한 결과라는 것이 임혁백 교수의 지적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하나회’를 축으로 한 이른바 정치 군인들을 숙정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군의 영향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군과 마찬가지로 재벌 개혁도 굳이 김대중 대통령의 마키아벨리적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 부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외환 위기에 따라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는 전제 조건으로서 상호지급보증 금지와 결합 재무제표 작성 등 재벌 개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구제 금융을 받지 못하면 국가 부도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재벌로서도 이같은 개혁 조처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재벌로 대표되는 토착 자본가 세력이 김대중 정부의 통치 기반으로 변신하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라는 생산 양식을 채택한 나라에서는 군이라는 무력을 가진 집단보다 재벌이라는 돈을 가진 집단의 자율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정치가 재벌의 물적 지원에 종속되어 이른바 정경 유착 관계에 있었던 만큼, 김대중 정부의 재벌 개혁은 근본적으로 고비용 정치 구조가 개선될 경우에만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김대중 정부가 최근 30대 재벌에게 요구하고 있는 사업 구조 조정이나 상호지급보증 금지, 결합 재무제표 작성 의무화가 재벌 개혁의 모든 것은 아니다. 재벌이 자금 지원을 미끼로 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난 권위주의 정권에서 재벌 개혁이 불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국민의 소득을 올려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같은 약속의 이행 여부는 전적으로 재벌이 투자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마키아벨리적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개혁 대상이 관료라는 데 이견을 다는 정치학자는 별로 없다. 함자 알라비는 ‘과대 성장 국가론’을 통해 한국처럼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에서는 국가 기구가 과대 성장해 관료의 힘이 막강하다고 지적한다. 과대 성장한 관료 세력은 국가 성립 초기에는 경제 성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국가 발전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 많은 정치학자들의 견해다.

국가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관료 세력의 이기주의는 이미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기 전 대통령직 인수 과정과 정부 조직 개편 과정에서 어느 정도 확인되었다. 대다수 정부 부처가 자기네 부처만은 감축해서는 안된다거나 오히려 규모를 늘려야 한다는 논리를 갖추고 온갖 경로를 통해 로비를 치열하게 전개한 것이다. 이같은 로비는 일부 성공했다. 정치인들이 관료보다 전문성이 부족해서 관료의 로비가 먹혀든 것이다.
중산층은 DJ의 통치 기반이 될 수 있을까

따라서 김대중 대통령은 관료 세력의 이기주의가 기능하지 못하게끔 적극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통제가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관료 세력으로 하여금 개혁의 선봉을 맡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진정한 의미의 마키아벨리적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이같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 개혁을 추진하든 관료들의 조직적인 방해와 복지 부동 같은 안일한 자세에 부닥쳐 좌초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현실이다.

군·관료·재벌의 변화만큼 주목되는 것은 중산층의 향배이다. 특히 이번 대선까지 늘 여권을 지지했던 보수적인 중산층이 김대중 대통령의 통치 기반이 될지 여부가 개혁의 성공 여부를 좌우할 또 다른 변수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선거 전문가들은, 보수적인 중산층의 선택 기준이 오로지 ‘여권을 지지해야 생활이 편하다’는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이들은 이제 여권이 된 김대중 정부의 지지 기반이 되지 않겠느냐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정작 김대중 정부의 성공적인 국정 운영 여부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변수는 IMF 사태로 인해 경제 개혁의 본질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소 주창했던 저소득층 복지 강화와 중소기업 활성화 등이 IMF 사태로 시장경제주의를 강조하면서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다. 빈곤층 복지 강화 등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전제로 하는데, 국제통화기금은 재정 긴축 등 정부에 시장 개입을 자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대중 대통령은 이같은 경제 개혁의 결과가 서민과 중소기업에 불리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김호진 교수(고려대·정치학)는 지적한다. 이것 역시 김대통령이 작은 정부와 자유 시장 경제주의를 강조하는 국제통화기금을 상대로 케인스주의적 복지주의를 관철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적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대목이다. 김대통령은 이처럼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이다. 김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고독을 느낀다면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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