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금·악바리에게 불황은 없다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8.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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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절약·투지로 “I am Fine” 외치는 불황 파괴 6인
경제 성적이 낙제점에 가깝다고 해서 ‘아이 엠 에프(I am F)’, 회사에서 해고되거나 기업이 문을 닫아서 ‘아이 엠 피니시드(I am finished)’, 위기가 코앞에 닥치도록 제때 대응하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해서 ‘잇츠 마이 폴트(It’s my fault)’….

최근 시중에서 유행하고 있는 영어 표현들이다. 국제통화기금의 영어 머리 글자 아이(I) 엠(M) 에프(F)에 빗대어 최근의 경제 상황을 신랄하게 풍자한 이 말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후회·자조·낙담·반성의 의미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근검·절약을 밑거름 삼아 사치·낭비·과소비는커녕 20여 년간 월급의 95% 이상을 저축해온 구두쇠 월급쟁이, 남들은 모두 ‘늘리고 보자’는 생각에 은행 돈 꾸러 다니는 일에 정신이 없을 때 당장 쓸 돈마저 은행에 입금해 주위에서 ‘바보’ 소리까지 들었던 중소 기업인, 역시 부지런함을 최대 밑천으로 삼아 1년 열두 달 몸이 부서져라 가게 일만 해온 덕에 최근 점포 하나를 더 늘리게 된 리어카 장수 출신 음식점 주인, 호황일 때가 더 위험하다며 몸조심하면서도 임금은 남들보다 더 많이 올리고 반대로 제품 값은 내리는 데 매진해 온 스프링 제조업체….

세상이 온통 자르고, 줄이고, 움츠러드는 데 바쁘지만 이들은 정반대로 늘리고 덧붙이며 도약을 꿈꾸고 있다. 남들은 모두 ‘끝났다’ ‘죽었다’고 말할 때 이들은 한결같이 ‘아이 엠 파인(I am Fine)’을 외치며 자조를 거부하고 있다. 남들에게는 시련과 고난의 상징어인 IMF 시대가 이들에게는 도약과 발전의 기회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시대를 거꾸로 살고 있는 셈이다.

울산 현대중공업 해양시스템개발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동주씨(47)는‘아이 엠 파인’ 대열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다. 출·퇴근은 반드시 통근 버스로 하고, 점심 시간에 구내 식당행을 거른 적이 없는 이씨는, 2만8천여 명이 일하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도 알아주는 ‘자린고비’다. 이씨의 한달 용돈은 만원 안팎. 96년 울산시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을 정도로 소문 난 절약 생활은 이미 20년이 더 된 이씨의 ‘고질’이다.
“결혼 후 20년 동안 외식 한번 안했다”

78년 이씨를 만나 결혼한 전병임씨는 “돈 관리는 전적으로 바깥 양반 몫이다. 결혼 직후부터 지금까지 바깥 양반의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다. 수입이 생기면 그때그때 쓸 생활비 일부만 떼어주고 나머지는 모두 은행에 집어넣을 정도로 지독하게 생활했다. 부부 생활 20년 동안 외식 한 번 한 적이 없고, 결혼 기념일이라고 해서 여행 한 번 간 적 없다”라고 말한다.

이씨의 ‘왕소금 생활’은 요즘 들어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다. 보험·장기 저축 등 50개가 넘는 통장에 돈이라는 돈은 모조리 긁어다 집어넣은 덕에 현재 이씨는 현금만 7억원 넘게 가지고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과거에는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던 그의 절약 생활이 최근에 와서 후한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물려 받은 재산 없이 동생들 뒷바라지까지 해가며 살려다 보니 이 길밖에 없었다”라고 말하는 이씨에게는 그 나름의 ‘원대한 계획’이 있다. 10억원을 모은 다음 양로원을 운영하는 일이다.

서울 종로 전 화신백화점 뒤편 먹자골목에 가면 이씨와 비슷한 유형의 ‘IMF 전사’를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6년째 ‘육미’라는 선술집을 운영해 오고 있는 김진태씨(42) 부부가 그 주인공이다.

술값이 비교적 헐한 덕분에 최근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김씨네 성공 비결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 4시면 어김 없이 일어나, 노량진 수산시장과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을 누비며 음식 재료를 직접 떼러 다니는 부지런함이다. 재료를 주문하지 않고 발로 뛰어 조달하면, 그만큼 술안주를 싼값에 공급할 수 있다.

모듬꼬치와 청주가 주메뉴인 이 집의 또 다른 명물은, 저녁 시간에 무료로 내놓는 어묵 국물. “최근에 손님이 늘어 무료로 나가는 어묵 국물만 하루 10만원어치가 될 정도다”라며 김씨네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지난해 육미 근처에 철판구이집까지 열어 이제는 진짜 어엿한 사장이 되었지만, 김씨는 여전히 과거 배고팠던 시절을 잊지 못한다. IMF 시대를 헤쳐갈 든든한 무기가 된 근면성은 바로 이때 체질화한 것이다.

74년 고향인 충남 당진에서 무작정 상경해 웨이터 보조·리어커 장수 등을 전전하며 온갖 풍상을 다 겪은 김씨는, 90년대 초반에 들어서야 겨우 선술집 하나를 인수해, 사장 겸 종업원으로 일하며 오늘날의 육미를 일구었다.
호황 때 오히려 허리띠 졸라매

차입 경영이다, 부실 경영이다 말들이 많지만, 절약에 절약을 거듭하면서 대기업들의 이같은 경영 방식을 그저 딴 세상 이야기로 흘려들으며 외길을 걸어온 중소 기업인도 적지 않다. ‘호황 때가 가장 큰 위기’라고 여기며 오늘도 ‘사력 0.01 운동’을 벌이고 있는 스프링 제조업체 삼원정공(대표 문학무)은 이 중에서도 가장 돋보인다. 74년 중고 스프링 제조기 단 2대로 시작하여 20여 년 만에 총자산 1백60억원, 종업원 1백70명인 중견 기업으로 성장한 삼원정공의 성공 비결은, 경기가 호황일수록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며 ‘5S 운동’ ‘초 관리 운동’ ‘사력 0.01 운동’ 등 무수한 경영 혁신 운동을 펼쳐온 데 있다.

5S 운동이란 이 회사 양용식 상무(57)가 20여년 전 일본의 한 회사를 방문했다가 마침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영 혁신 운동을 목격하고 그대로 도입한 것으로, 정리·정돈·청소·청결·마음가짐을 뜻하는 일본말 5개를 영어로 옮긴 것이다. 초 관리 운동이란 삼원정공이 한창 경이적인 성장을 기록할 때인 90년 초 작업 현장에 도입한 것으로, 1분 1초를 아끼자는 운동. 지난해부터 시작한 사력 0.01 운동은, 예컨대 생산비 1%·원가 1%·불량률 1% 등, 생산에 관련된 모든 부문에서 말 그대로 ‘죽을 힘을 다해’ 1%씩을 더 줄이자는 운동이다.

삼원정공은 이들 경영 혁신 운동 덕분에 남들이 임금을 줄일 때 오히려 늘렸으며, 다른 회사가 제품 단가를 인상할 때 반대로 낮출 수 있었다. 마침내는 IMF 한파가 매섭게 몰아치는 최근에도 감원이나 기구 축소 없이 직원들에게 더 많은 상여금과 자유 시간을 주며 왕성한 기업 활동을 계속해 가고 있다.

“IMF? 외국 사람들이 이미 6∼7년 전부터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다’며 경고했는데도 대비하지 않은 자업자득 아니겠는가. 기업이 위기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많이 벌기 위해 적게 쓰고, 적게 쓰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 외에 무슨 다른 길이 있겠는가”라고 양용식 상무는 잘라 말했다.
사업 다각화·참신한 아이디어로 승부

형식과 내용은 다르지만 취지와 발상이 삼원정공과 닮은 사례로는 손님 접대용, 특히 국빈 접대용 술로 유명해진 민속주 생산업체 문배술양조원이 꼽힌다.

문배술양조원은 최근 수입 양주 값이 폭등하면서 술 소비 추세가 국산 술을 선호하는 쪽으로 바뀌는 바람에 물건이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로 IMF 특수(特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하지만 이 회사 이기춘 사장(56)은 업계에서도 소문난 자린고비 정신의 소유자이다.

사장실이 따로 없는 경기도 김포의 본사 공장 한구석에서 이사장은 공장 이전에 얽힌 일화를 들려준다. “2년 전 이곳으로 공장을 옮겼는데, 주변에서 우리 회사의 전망이 밝다며 공장 부지 6천 평을 외상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의한 사람도 있었다. 사세가 더 뻗어 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이같은 유혹을 물리치고 5백평만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당장 6천 평을 사들일 돈이 수중에 없는데 욕심을 냈다가는 그것이 모두 빚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년 반이 흐른 요즘, 이사장의 판단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일체의 빚 부담 없이 공장을 이전한 덕분에, 이사장은 아예 공장에 살다시피 하며 최근 한꺼번에 10배 이상 늘어난 백화점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직원들을 독려하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사장은 지난해부터 원래 평양산인 문배술의 북한 진출을 꾀하는 한편, 25도짜리 새 문배술(현재는 45도로 제한)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최근 당국으로부터 시험 제조 허가까지 얻는 등 사업 다각화 면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위기를 기회를 만들려는 진취적인 태도와 굽힐 줄 모르는 소신도 이들 IMF 전사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창업 컨설팅 회사 비즈니스네트워크의 노주형 사장(39)과, 고전 국역 시리즈라는 한우물을 파온 솔출판사 임우기 사장(43)이 대표적이다.

청년 기업가들을 위해 창업 컨설팅을 해주는 외에 인터넷 사업에도 주력하고 있는 비즈니스네트워크의 노사장은, 지난해 ‘코리안 홈스테이’라는 인터넷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이용해 외국인 관광객을 국내 민박집에 직접 연결해 주는 이 프로그램은, 외화벌이와 민간 외교 양면에서 일거양득을 이룰 것으로 기대되며 벌써부터 성공을 예감하고 있다.

솔출판사의 임사장은 출판계가 극심한 불황을 겪을 것이 분명한데도, 얼마전 집까지 저당잡혀 가며‘전문 잡지’ 두 종을 간행하려 준비하고 있다. 출판계에서는 거의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는 임사장의 계획은, 세계의 자연·문화 유산에 관련된 전문지 1종(격월간)과, 한·중·일의 정체성을 다루는 전문 교양지 1종(계간)을 적어도 올해 안에 간행한다는 것이다. “기름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지만, 비행을 중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해야 할 일은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추진하겠다”라고 임우기 사장은 다부진 각오를 펼쳐 보였다.

자기 분야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 이들 앞에 IMF 한파는 더 이상‘한파’가 아니다. 이들이 세상을 거꾸로 살 수 있는 비결, 그것은 다름 아니라 호황을 불황으로 여기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절제와 용기를 잃지 않았던 생활 태도인 것이다. 지금 이들은 다시 한번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IMF 경제 위기와의 한판 승부를 벼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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