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헛다리 짚어 헛심만 뺐네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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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범행 동기 잘못 파악하고 주먹구구 수사…연쇄 살인 길 터준 꼴
이번 사건은 영화 <공공의 적>과 닮은 점이 많다. 영화 속 조규환(이성재 역)은 지능범으로 ‘묻지마 살해’를 일삼는다. 이번에 검거된 유영철씨(34)의 오피스텔에서도 이 영화 DVD가 발견되었다.

한때 경찰도 이 영화에 주목했다. 서울 삼성동과 신사동 살인 사건을 맡았던 서울 강남경찰서는 종로·강남·동대문 일대 비디오 대여점을 전부 뒤졌다. <공공의 적>을 빌려간 사람을 일일이 조사한 것이다(<시사저널> 제756호 참조).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경찰은 영화 하면 비디오 테이프만 생각했다. 경찰의 구닥다리 사고를 비웃듯, 유영철은 비디오 테이프가 아니라 최신 DVD를 구입한 것이다. 영화 속 조규환이 깡다구 하나로 그를 쫓는 강형사(설경구 역)를 조롱하듯, 유영철씨는 경찰을 지난 1년 동안 따돌렸다.

2003년 9월24일 강남구 신사동에서 ㅅ대 약학과 교수 부부가 숨졌다. 10월9일에는 종로구 구기동에서 강 아무개씨(85)를 비롯한 3명이 살해당했다. 10월16일에는 강남구 삼성동에서 유 아무개씨(69)가, 11월18일에는 종로구 혜화동에서 배 아무개씨(53)·김 아무개씨(86)가 숨졌다. 유씨는 두 달 동안 ‘묻지마 출장 살인’을 저질렀다.

피해자가 모두 노인이고, 단독 주택에서 발생했으며, 둔기로 머리를 맞아 사망했고, 금품은 사라지지 않아 연쇄 살인 가능성이 높았다. 합동수사반을 꾸려야 했지만 경찰은 늘 하던 대로 나와바리(구역)를 나누었다. 강남서·서대문서·동대문서가 각기 수사에 나섰다. 구역을 넘나들며 ‘출장 살인’ 행각을 벌인 유씨의 함정에 경찰이 그대로 빠진 것이다.
경찰은 낡은 교과서대로 범행 동기를 찾으려 했다. 대표적 미제 사건인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수사 방식 그대로다. 가장 먼저 원한 관계에 주목했다. 그나마 나이가 든 노인들이어서 치정은 배제했다. 가족부터 친구까지 ‘탐문 수사’를 벌였다. 한 사건의 경우, 경찰은 장남의 빚에 주목해 그를 용의자로 집중 수사하는 등 헛다리를 짚었다.

원한을 가진 면식범에 대한 탐문 수사가 끝나자, 경찰은 다시 정도를 걸었다. 퍽치기나 노인 상대 전과자 등 동일 범죄 출소자를 쫓았다. 2002년부터 출소한 전과자 2천3백37명을 확인했다. 그러나 유씨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는 강간이나 절도만 일삼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여덟 번째 희생자가 날 때까지, 초지일관 단독 수사를 했다. 공조 수사는 11월이 지나서야 시작되었다. 1주일에 한번씩 모여 회의한 것이 공조 수사의 전부였다. 말이 공조 수사지, 정보 교환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계급 특진이 걸려 있어 경쟁 심리까지 발동했다.

유일한 공유 정보가 서울 혜화동 현장에서 잡힌 CCTV 사진과 버팔로 구두 발자국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경찰은 제대로 읽지 못했다. 신사동 사건 현장에서 버팔로 발자국이 발견되지 않자, 경찰은 신사동 사건을 별도 사건으로 취급했다. 치밀하게 증거를 없앤 유씨에게 경찰이 또 당한 것이다.

특진이 아니라 징계가 거론되자, 다급해진 경찰은 관할서 별로 무차별 수사에 들어갔다. 지난해 전국에서 버팔로 신발(260mm)을 구입한 6백61명을 조사했다. 현금만 썼던 유씨는 이번에도 빠져나갔다.

경찰은 야심적으로 휴대전화 통화 내역을 추적했지만 헛수고였다. 경찰은 희생자 전화뿐 아니라, 사건 현장 인근 기지국의 휴대전화까지 모조리 뒤졌다. 주변 공중전화까지 통화 내역을 발췌했다. 삼성동과 신사동 주변 휴대전화 기지국에서만 무려 45만6천여 건이었다. 이마저도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유씨는 자신 명의의 휴대전화를 쓰지 않았다.

범행 시간대 별로 사건 현장 부근을 지나간 버스(810,049건)나 전철(380,100건)을 이용할 때 사용한 카드 소유자까지 확인했다. 심지어 CCTV에 찍힌 용의자(170cm)와 같은 키의 병무청 신체검사 자료까지 다 뒤졌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유씨는 군 면제자였다. 무조건 관련 자료를 뒤지고 추적하는, 무늬뿐인 과학 수사였다. 무차별 싹쓸이 수사가 계속될수록 경찰은 오히려 힘만 빠져갔다.

지난 7월16일, 유씨는 네 군데 살해 현장을 돌며 현장 검증을 했다. 그동안 얼굴 없는 용의자를 쫓았던 각 관할서 수사 책임자들이 직접 현장 검증을 지켜보았다. 한 간부급 경찰은 “범행 동기 자체가 바뀌었는데, 수사 방식은 그대로였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수사 책임자는 “수사 방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경찰이 지난해 발생한 노인 연쇄 살인 사건만 제대로 추적했어도 이후 연쇄 살인은 막을 수 있었다. 늦게나마 경찰은 묻지마 범죄를 일삼는 ‘공공의 적’을 막기 위한 범죄분석팀을 발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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