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의 역습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4.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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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하기로 소문난 이헌재 부총리가 성난 얼굴로 일어섰다. 참여정부의 ‘신정부’라고 불리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들을 겨냥해 쓴소리를 연거푸 쏟아낸 그의 파격 행보는 시장 경제 원리를 사수하겠다는 결연한 의지
최근 신중하기로 소문 난 이헌재 경제 부총리가 나흘 동안 벌인 ‘시장 경제 사수 소동’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하다. 이부총리는 스스로 명쾌하게 규정하지 않은 적과 싸움을 벌여 돈 키호테로 비치고 있지만 이부총리측은 전례 없는 전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한다. 이부총리측은 “(이헌재) 부총리의 완벽한 판정승으로 끝났다”라고 말했다.

이부총리는 지난 7월20일 밤 곽결호 환경부장관과 함께 한 술자리를 마치고 귀가하다가 자택 앞에서 기다리는 재정경제부 출입기자 3명과 마주쳤다. 이부총리는 인터뷰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낮부터 집앞에서 기다린 젊은 기자들을 안쓰럽게 여긴 이부총리 부인 진진숙씨가 현관 문을 열었다. 이부총리는 집 안까지 들어온 출입기자들을 내쫓을 수 없어 캔맥주를 함께 마시면서 취중 인터뷰를 했다.

전작에다 맥주까지 더 마신 탓인지 이부총리는 파격에 가까운 발언을 쏟아냈다. “요즘 시장 경제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간다.” “386세대가 정치 암흑기에 저항하느라 경제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경제 정책이 한계에 부딪혔다.” “2백30개 골프장 신청 건을 4개월 내에 모두 처리하겠다.” 아슬아슬한 발언이 마구 튀어나왔다.

이부총리 발언은 정부·여당뿐만 아니라 야당, 재계에까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더욱이 7월22일 출입기자를 대상으로 하는 정례 브리핑이 명확한 사유 없이 연기되자 ‘사퇴설’까지 강하게 제기되었다. 정부·여당 내 386 실세들은 이부총리의 ‘기습 공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정부·여당의 자중지란으로 비칠 것을 우려해 화해를 모색했다. 열린우리당 386 출신 국회의원이 주축이 된 의정활동연구센터가 8월11일 열리는 창립대회에 이부총리를 강연 연사로 초청했다. 이 모임 대표 격인 이광재 의원이 제안한 것이다. 이부총리는 7월23일 미루었던 정례 브리핑을 갖고 “30~40대라고 했지 386세대를 비롯해 특정집단을 지칭한 적 없다”라고 꼬리를 내렸다. 이부총리는 또 자기 견해가 잘못 전달되었다며 사태의 원인을 언론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부총리의 최측근은 “이부총리는 즉흥적으로 일을 벌일 분이 아니다. 철저하게 계산을 마친 끝에 할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부총리는 경기고등학교 수석 졸업,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 제6회 행정고시 수석 합격을 연거푸 기록한 전형적인 수재다. 수학에 뛰어나고 바둑도 아마추어 1급이어서 수읽기와 계산에 능하다. 이번 사태는 이부총리가 철저한 수읽기를 마친 후 감행한 승부수인 셈이다. 이부총리는 승부수를 띄우지 않으면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최근 이부총리가 부총리 취임 직전까지 국민은행으로부터 자문료를 받은 것이 알려지면서 도덕성에 타격을 입자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소동을 벌였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부총리는 2002년 7월 최범수 국민은행 기획담당 부행장으로부터 자문역을 맡아 달라고 요청받았다. 이부총리는 평소 돈독한 친분을 쌓은 최부행장이 간곡하게 부탁해 자문역을 수락했다고 한다. 청와대 존안자료(인사 파일)에는 이부총리의 국민은행 자문료 수수 사실이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청와대 고위 관료는 “(해당 사실은) 이헌재 부총리에 대한 인물 검증 작업에서는 밝혀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국민은행 자문료 수수 사실은 지난 6월 금융감독원이 국민은행을 상대로 특별 감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우연하게 밝혀진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에 발표되기 1주일 전인 7월7일 이 사실을 인지한 이부총리는 국민은행 담당자에게 자문료를 어떻게 회계 처리했는지를 확인하고 주위 법률자문역에게 위법 여부를 물었다. 이부총리 최측근은 “이부총리는 당시 법률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답변을 듣고 논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이부총리측은 이부총리가 2000년 8월 재경부장관을 그만두었으므로 공직 퇴임 후 2년 동안 민간 업체로부터 금전을 받을 수 없다는 공직자윤리법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항변한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인물은 당시 이부총리와 함께 국민은행으로부터 자문료를 받은 전윤철 감사원장이다. 전감사원장은 당시 경제 부총리를 그만둔 직후였다. 따라서 정·관계 일각에서는 감사원이 금감원을 상대로 카드대란 책임자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 감사를 벌인 것에 반발해 금감원이 흘린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부총리는 “(국민은행 자문료 수수 사실을 유출한 세력은) 여의도 쪽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해당 자료의 출처가 감사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이부총리 측근 인사는 “어디에서 그 사실이 유출됐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라고 말했다.
이부총리가 공격 대상이 자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고, 또 유출 주도 세력이 누구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국민은행 자문료 수수 논란 때문에 파격 발언을 했으리라는 관측은 설득력이 없어진다.

재경부의 한 고위관료는 “이부총리는 외부의 개입 때문에 경제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다. 시장 경제 원리를 무시하는 정책들이 경제팀 수장인 이부총리와 협의 없이 발표되는가 하면, 재경부·산자부·건교부가 추진하는 정책들이 외부 간섭으로 변질되는 것을 참지 못하던 차에 국민은행 자문료 수수 파문이 터져 나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부총리의 이번 파격 행보는 경제정책에 일일이 간섭하는 외부 세력에 대한 ‘공개 경고’라는 것이다.

과천 종합청사에 밀집한 주요 경제 부처는 외부 간섭 세력으로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동북아시대위원회·행정수도이전추진위원회 등 대통령 직속 위원회들을 지목했다. 이들 외부 간섭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이정우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이다. 그는 지난 7월1일 출범한 대통령 직속 위원회들을 총괄하는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이위원장은 미국 하버드 대학 노동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경북대 교수를 지냈다. 그는 과거 성장 위주 경제 정책이 불평등을 심하게 해 사회통합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판단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소득 재분배와 시장 개혁 위주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믿는다.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가 출범한 날 이위원장은 ‘빈곤 대물림 차단을 위한 희망 투자-빈곤아동 및 청소년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7월21일에는 우리사주제도 관련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참여정부 경제 로드맵을 완성에 이르기까지 깊이 관여한 이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

이부총리는 1969년 재무부 사무관으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1974년 1차 오일 파동 이후 재무부 재정금융심의관으로 외환 위기를 극복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1979년 율산그룹 사건으로 공무원 생활을 마감했으나 역대 재무부장관들이 이부총리의 재능을 아껴 한국신용평가 사장, 증권관리위원회 상임위원, 조세연구원 자문위원에 앉혀 늘 지근거리에 두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전에서는 이회창 캠프에서 활동했다. 김용환 당시 자유민주연합 부총재가 외환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를 구하자고 제의해 김대중 정부에 들어갔다.

이부총리와 이위원장은 모두 시장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시장 경제 원리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경제 정책의 우선 순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재경부의 한 고위 관료는 “참여정부는 부처를 아우르는 구(舊)정부와 갖가지 위원회로 구성된 신(新)정부로 나뉘어 있다”라고 말했다. 신정부를 대표하는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의 업무 영역이 워낙 광범위해 경제 현안마다 구정부의 대표인 재경부와 충돌이 일어난다. 관료 조직과 위원회 사이에 수시로 협의하는 창구가 마련되어 있으나 경제 철학이 다른 양자가 벌이는 대화는 자주 갈등을 빚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부총리는 관계와 재계에 모두 몸을 담았던 경험에 기초해 재계 입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성장과 개방을 추구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한국 경제가 살 길이라고 믿는다. 성장 위주 경제 정책이 초래한 빈부 격차를 해소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이위원장과 경제 철학 자체가 다른 셈이다. 결국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다. 시간이 갈수록 관료 조직과 위원회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천 종합청사에 있는 기존 관료 조직들은 대통령 직속 위원회들이 중·장기 추진 방안을 만드는 것으로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위원회 조직 처지에서는 추진 방안이 제대로 실행되는지 감독하다 보니 사안마다 정책 협의라는 형식으로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재경부는 시장 경제 원리에 어긋나는 정책이라고 판단하면 끝까지 버텨 ‘독소 조항’을 없애려 든다. 반면 이정우 위원장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가 겪는 어려움으로 예산과 함께 부처 협의를 꼽았다. 이위원장은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부처와 이견을 해소하고 회의를 자주 갖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라고 말했다. 또 금융감독위원회의 한 고위 간부는 “재경부와 협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시장 개혁에 필요한 정책의 본질이 많이 훼손되고 있어 답답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양자 사이에 대한 불만만 쌓여가고 있다.

청와대, 갈등 상황조차 파악 못해

결과적으로 이 구도가 가진 가장 큰 폐해는 경제 정책의 일관성 상실이다. 조동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거시경제팀장은 “관료 조직과 교수 출신 위원회가 사사건건 대립한다면 경제 정책에서 일관성을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정책의 일관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만큼 경제 주체들을 당황케 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일관성이 없는 경제 정책은 경제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킨다. 정부가 일반적으로 인플레이션을 가장 경계하는 까닭은 물가 상승이 경제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투자가 위축된다. 투자 위축은 수출 증가가 내수 활성화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파괴하고 성장잠재력까지 잠식한다. 정부가 시장에 보내는 시그널은 언제나 단순하면서도 일관되어야 한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같은 지적에 대해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청와대 고위 관료는 “이헌재 부총리는 단기 경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이정우 위원장은 중·장기 경제 정책에만 몰두하고 있어 양자가 충돌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청와대가 경제정책 집행과 관련해 일선 조직에서 벌어지는 갈등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 내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은 리더십의 몫이다. 특히 경제 정책에 관한 한 지금 청와대에는 리더십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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