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성문화를 이해하는 키워드④/팬픽 & 야오이
  • 김은남·고재열 기자 ()
  • 승인 2001.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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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딸을 키우는 부모치고 '팬픽'과 '야오이'를 모른다면 한번쯤 반성할 일이다. 팬픽은 '팬'과 '픽션'의 합성어. 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쓴 소설을 말한다. 야오이란 일본어 '야마나시'(내용 없음) '오치나시'(반전 없음) '이미나시'(의미 없음)의 합성어로, 미소년이 등장하는 동성애 만화 또는 소설을 가리킨다.

팬픽이나 야오이가 성적인 기호로서 관심을 끄는 것은, 이들 작품의 상당수가 동성애나 농도 짙은 성애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남성 5인조 댄스그룹 god의 팬픽 사이트에 들어가면 먼저 '동성애 전용'이라는 팻말이 눈길을 끈다. 게시판 상단에는 그룹 멤버를 2명씩 짝지워 놓고 어떤 '커플'이 가장 어울리는지를 묻는 투표함도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최우수 커플로 지목된 계상-호영이 주인공이라는 팬픽 소설의 한토막. '그때 가만히 서 있던 계상이 호영의 허리에 팔을 둘러 자신에게로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호영이 미처 피하기 전에 부드럽게 고개를 한손으로 감싸며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중략) 처음 느껴보는 황홀감에 호영이 눈을 감았다.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만화가 대부분인 야오이의 성애 묘사는 훨씬 더 노골적이다. 야오이는 일반적으로 공격적인 터프가이형 남성과 수동적인 꽃미남형 남성을 애절한 연애담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데, 유명한 만화나 소설·드라마를 패러디한 작품도 많다. 만화 <슬램덩크>의 윤대협과 서태웅을 연인 사이로 만드는 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작품의 창작자·수용자가 거의 전적으로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온라인 매체인 <딴지일보 designtimesp=21447>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성 동성애자를 다룬 작품을 창조하고 즐기는 대상이 남성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성애자, 그것도 여성이라는 데 야오이(팬픽)의 홀랑 깨는 엽기성이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이들 작품이 안전한 거리를 두고 성적 욕구를 충족하고 싶어하는 여성의 심리를 대변했다는 분석이 있다.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성들이 자기와는 관계 없는 남자 대 남자의 성행위를 훔쳐보며 관음증적 욕구를 해소한다는 것이다. 그간의 성적 지배 구조에 대한 반동으로 여성들이 이들 작품을 즐긴다는 분석도 있다. 이를테면 '남자만 포르노 보란 법 있느냐'는 식인데, 이 때문에 팬픽이나 야오이를 '여성을 위한 포르노'라고 명명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 만화 평론가 이명석씨는 팬픽이나 야오이의 기본 정서가 포르노라기보다 로맨스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이들 작품은 일종의 '인형놀이'와 비슷하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어린 계집아이가 인형에 이 옷 저 옷을 갈아입히듯 소녀들이 자기의 우상을 이 모습 저 모습으로 변형시키면서 스타에 대한 동경과 성적 판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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