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보수 엘리트와 함께 춤을!"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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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맨파워' 전략 세워 전문가 끌어들이기 온힘…
"경부선 벨트·KS 인맥 넘어서야"


이회창 대세론 바람을 타고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주변에 보수 엘리트가 결집하고 있다. 이들은 왜 이회창에게 모이는가. 이회창의 보수 엘리트 조직 전략은 무엇인가.


이회창 총재 때문에 사람들이 이민을 간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말이다. 지난 3월 이총재는 몇몇 교수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 젊은 교수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야당이 잘못하고 있다. 요즈음 이민 가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DJ 잘못 때문만은 아니다. 만일 다음 대선에서 이총재가 집권해서 잘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면 왜 이민을 가려고 하겠는가? 정권이 바뀌어도 똑 같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민을 가려는 것 아닌가?"




이총재는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후 이총재는 국가혁신위원회(혁신위)를 만들기 위해 외부 인사와 접촉할 때 이 얘기를 자주 꺼냈다. '이회창과 한나라당의 비전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민심을 얻을 수 없다, 새로운 비전 창출을 위해 혁신위를 구성하려고 하니 도와 달라'고 설득했다.


차기 집권의 7부 능선을 넘어가고 있다는 이회창 총재. 그는 반DJ 정서를 딛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남은 가파른 암벽을 오르려면 이회창의 비전이라는 밧줄이 절실하다. 평생 민주화 투쟁을 해 온 YS와 DJ는 그 개인사에서 자연스레 민주화와 개혁이라는 비전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총재는 다르다. 인생의 대부분을 법관으로 살아온 이총재는 스스로 뿜어내는 비전이 강력하지 않다. 법치주의가 있지만 국민들의 희망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약하다.


이총재의 옆에 누가 있느냐가 그래서 중요하다. 이총재가 비전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 맨파워의 면면을 보고 이총재의 미래를 평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가 역대 어느 야당 총재보다 정치권 밖의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총재의 인맥 지도가 처음 그려진 것은 1997년 대선 무렵. 법조계와 KS(경기고·서울 법대) 등 개인적 인연이 중심이었다. 지난 대선 때 아침 미팅 멤버였던 서상목 신한국당 기조실장(당시 직책)·남상우 경제특보를 비롯해서 윤여준 청와대 대변인·진 영 변호사·황우려 변호사 등 핵심 측근들은 모두 경기고 출신이었다. 김만제·이한구·사공일 등 비경기고 출신의 쟁쟁한 경제통들이 그를 돕기는 했지만 주변을 맴도는 수준에 그쳤다.


대선 패배는 이총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남겼다. 그 중의 하나가 밑바닥 민심에 어둡고 정치 감각도 약한 KS 중심의 인맥만으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1998년 8월 한나라당 총재에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재개하면서 이총재의 인맥 지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DJ 집권을 못마땅해 했던 보수 성향·영남 출신 엘리트들이 모여들었다. 영남 출신인 이한구 의원과 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이 이때부터 이총재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한 이후에는 이회창 대세론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맨파워가 더욱 두터워졌다. 이총재와 외부 인사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은 "지난해 말부터는 빨려온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외부 인사들의 호응이 좋아졌다"라면서 현직 언론인과 국책 연구소 소속 인사들도 적극적이라고 전했다. YS 정권 때 장관을 했던 ㅎ교수는 1997년 대선에서 이총재를 도왔으나 DJ 정권 초기에 DJ에게 몇 번 불려간 뒤로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러다가 지난해부터 다시 이총재를 적극 돕고 있다. 일부 인사는 단순한 조언만이 아니라 이총재를 위해 특정 주제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내년 대선까지 연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혁신위이다. 이총재는 지난 1월 초 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에게 국가개조위원회(후에 혁신위로 바꿈)를 만들어야겠다며 구체적인 기획을 지시했다. 그동안 여권의 눈을 피해 물밑에서 개인적으로 만나던 관계를 체계적으로 조직화해 내년 대선에 대비해야 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현재 혁신위에는 2백명이 넘는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국가혁신위가 주축…비판자들도 적극 포섭




이총재는 혁신위와 별도로 가까운 인사들에게 개인적으로 조언을 듣기도 하고 매달 6∼7 차례 외부 전문가들과 비공개 모임을 갖는다. 주로 듣는 편인데, 최근에는 역사관·리더십·교육 문제 등을 주제로 얘기를 들었다. 이총재는 정치 현안에서는 나름의 판단을 고집하는 편이지만 정책 분야에서는 여러 의견에 귀를 열어 두고 있다. 얼마 전 한 정치학자로부터 단순히 보수 노선으로만 가면 안된다, 개혁적 보수로 가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개혁적 보수, 열린 보수를 자신의 정치 노선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어떤 교수는 JP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구체적인 조언을 하기도 했다. 경제 문제에서는 복지 제도에 비중을 두라는 조언을 많이 받는 편이다. 남북 문제에 대한 주문은 전문가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YS처럼 김정일 답방을 적극 저지해야 한다는 주문에서부터 이총재가 집권하면 김정일을 상대해야 할 텐데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비판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답답한 구석도 있다. 만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얘기를 들을 기회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다 아는 문제를 지적하거나, 현실 분석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이렇게 하라는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아쉬운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학자보다는 기업이나 정부기관에서 실물을 다룬 인사들에게 더 기대하는 편이다.


이총재는 지식인 단체들과의 관계도 확대해 가고 있다. 외교 안보 전문가들의 모임인 서울포럼은 이총재와 가까운 대표적인 단체이다. 미국 외교협회의 한국쪽 파트너로 이홍구 전 총리가 주도하고 있는 서울포럼에는 이상우 서강대 교수·한승주 전 외무부장관·김경원 사회과학원장·현홍주 전 주미대사 등 이총재의 외교 안보 조언자가 즐비하게 포진해 있다. 이총재가 남북 문제와 관련해 가장 자주 찾는 인사로 알려진 서울대 백진현 교수도 서울포럼 멤버이다.


경제학 교수들이 주축이 된 안민포럼도 이총재가 공을 들이는 단체. 이총재는 지난해 12월 안민포럼 창립 토론회에 참석해 강연하기도 했다. 안민포럼 회장인 장오현 교수(동국대·경제학)와 이성섭 교수(숭실대·경제학) 등은 혁신위 자문위원 후보 명단에 올라 있다. 언론인과 변호사 들이 주축이 된 나라발전연구회도 이총재가 주목하고 있는 단체다. 모임 간사를 맡고 있는 〈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 박 무씨 역시 혁신위 자문위원 후보 명단에 들어 있다. 그밖에 30∼40대 전문가 모임인 미래경제연구모임, 최근 주목되고 있는 비전한국@포럼 역시 이총재가 각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모임이다(25쪽 상자 기사 참조).


자신감을 얻은 것일까. 이총재는 요즘 들어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인사들과도 자주 접촉한다. 올해 들어 한나라당 대외협력위원회가 시민단체와 재야 출신인 서경석 목사·박원순 변호사·박형규 목사 등을 초청했을 때 이총재는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그들의 비판을 들었다. 몇 달 전에는 한 교수가 텔레비전에서 이총재가 경기고 가신 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 일이 있었다. 이총재는 그 교수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고 여러 교수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어 대화를 나누었다.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인사라면 호불호를 떠나 적극 접촉해 거리를 좁히겠다는 생각이다.


이총재의 맨파워 전략은 보수 엘리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선 이총재 본인의 인선 기준이 그렇다. 이총재는 똑똑한 사람을 선호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평생을 공조직에서 지낸 탓에 검증된 전문가, 안정감이 있는 인물을 찾는 경향도 강하다. 정치적 성향으로는 보수 쪽에 기울어 있으면서도 극단은 싫어하는 편이다. 엘리트·검증된 경력·보수주의 등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보수 엘리트층과 연결된다.


또 이총재의 맨파워 전략은 YS·DJ 정권의 교훈을 반면교사로 하고 있다. 정치 기반이 약했던 과거 군사 정권은 대한민국의 일류 엘리트를 널리 발탁했는데 양김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러한 기조가 흐트러졌다는 것이 이총재측 인식이다. 가신과 측근 들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면서 대한민국 일류라는 인선 기준은 없어지고 권력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인재를 발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같은 분야에서는 대체로 순위가 정해져 있다. 양김 시대에는 이러한 객관적 평가가 무시되고 무자격자가 득세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라고 평가했다. 이총재의 맨파워 전략은 다시 대한민국 일류를 중심으로 시스템을 구성함으로써 전통적인 주류 엘리트층의 지지를 얻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이총재의 이런 전략이 빠질 수 있는 함정도 있다. 먼저 엘리트 중심주의. 이총재가 경기고에 편향되었다는 항간의 평판은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다. 민주당은 벌써부터 이총재와 한나라당을 겨냥해 특권층 동맹이니 귀족당이니 하는 비판을 퍼붓고 있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이총재가 학력과 경력을 너무 따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총재를 둘러싼 인사들의 면면이 보수 회귀적이라는 비판도 널리 퍼져 있다. 이부영 한나라당 부총재는 "만일 이총재가 이런 식으로 보수 인사들에 둘러싸여 집권한다면 집권 후에 학원가나 노동계의 조직적 저항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우려했다.


장인형 전문가·40대로 차츰 눈 돌려




이총재 역시 이런 비판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세대·지연·학연·이념에서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중층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선 '경부선과 KS를 벗어나라'는 것이 새로운 슬로건. 비영남·비경기고·비서울대 인맥을 확대한다는 것이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요즘 우리는 경기고 출신이라면 한 발짝 물러서서 보게 된다"라며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엘리트 편향을 극복하는 또 다른 포석은 장인(匠人)형 전문가를 중용하는 것. 교수나 박사가 아니더라도 오랜 경험을 통해 자기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적극 발탁해 이총재 주변에 포진시킨다는 구상이다. 이를 통해 이총재가 부족한 현장성을 보완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정년을 앞둔 현직 교사 ㅈ씨가 거론된다. 이총재는 교육 문제와 관련해서 대학 교수보다 ㅈ씨의 조언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앞으로 대선 국면에서 교육특보로 임명하는 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또한 환경·노동·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장인형 인물을 끌어들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40대 인맥을 확대하는 것도 변화 포인트. 내년 대선에서 불거질 세대교체론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이다. 수행 담당을 주진우 전 비서실장에서 30대인 남경필 의원으로 바꾼 것도 그 일환이다. 외부 인맥의 경우에도 경력이 화려한 원로보다는 참신한 40대 인사들을 조직해 이총재 주변에 포진시키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보수 편향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전문가형 인물만이 아니라 지사형 인물을 끌어들이는 데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개혁 이미지가 강하면서도 안정감을 주는 인물이 타깃이다. 이영희 인하대 교수·박인제 변호사를 비롯해서 박원순 변호사 같은 인사에게도 관심을 쏟고 있다. 이총재는 혁신위 자문단과 관련해서 "실용적·개혁적 마인드를 갖춘 외부 전문가들의 도움을 얼마나 많이 받느냐가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 7월26일 한나라당 국가혁신위 비전분과 회의. 발제를 맡은 이병석 한나라당 의원은 "한나라당은 기득권·수구·영남 정당 이미지에서 탈피해 민주적 국민 정당으로 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참석자들 모두 공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 날 회의에 외부 토론자로 참석한 한 교수는 "그럴듯한 노선과 전략보다도 구체적인 정치 행태를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 지적은 이총재의 맨파워 전략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총재가 참신하고 능력 있는 외부 인재를 많이 모을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여야가 색깔론과 극언을 주고받는 저질 정쟁을 계속하는 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이제 더 이상 이총재가 정치 현실이라는 이유로 낡은 정쟁에 가담해서는 안된다. 국가혁신위 1차 성과가 나오는 8월 말 안으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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