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석영씨가 말하는 '내가 겪은 방북 6박7일'
  • 이문재 편집위원 (moon@e-sisa.co.kr)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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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자에게 촌장 맡긴다"/

"평화촌 공동 개최 합의…북한은 예전보다 퇴락"


평양에서 돌아온 지 이틀째 되던 지난 8월23일, 충남 예산 자택에서 만난 소설가 황석영씨는 "아무 것도 아닌 돌출 행동으로 인해 엄청난 성과들이 묻혀버렸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그 엄청난 성과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것이 오는 10월 남북이 함께 비무장지대에서 열기로 한 '평화 캠프'다. 황석영씨는 남북 민간 교류뿐 아니라 전지구적인 평화 정착을 앞당기는 새로운 시발점이 될 이 기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평양 땅을 밟았다. 민족예술인총연합 부이사장 자격으로 방북한 그는 전세계를 연결하는 '평화의 경의선'을 개통시키기 위한 '자발적 밀사'였다.




12년 만에 북한 땅을 다시 밟았는데,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1989년에는 불법으로 갔다가, 이번에는 합법으로 방북한 것이니까,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마무리를 한 셈이다. 예전보다 많이 퇴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랬다. 얼굴 표정이며 옷차림, 거리 풍경 모두 어두웠다. 전후 복구 시절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데다가, 봉쇄 속에서 견디고 있는 것 아닌가.


북쪽 사람들이 경직되어 있다고 했는데.


12년 만에 다시 만난 북한 문인이 지난 6월부터 9월까지가 내부 결속 기간이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미국에 대한 어떤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 이슈를 한곳에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김정일 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하고 있어서 간부들이 더욱 유연성이 없었다. 교과서적인 얘기만 했다. 남쪽은 언론 개혁 문제 때문에 시끄럽고. 남북이 다 때를 잘못 만났다.


지난 6월에 발표한 소설 〈손님〉에 대한 북쪽의 반응이 궁금하다(〈손님〉은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난 양민 학살 사건을 조명한 장편 소설인데, 북한측은 미군이 양민을 학살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황씨는 소설에서 한국 기독교 세력이 저지른 비극이라고 밝혔다).


예상대로 북쪽 사람들이 불쾌해 했다. 남북 기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북한 문학 평론가 조정호씨와 논쟁이 벌어질 뻔했다. 내가 이렇게 설득했다. 나는 남쪽 우익의 뿌리를 찾기 위해 쓴 것이다, 당신들은 미국에 대해 할 얘기가 있으면 하라고 말했다. 신천 양민 학살 사건에 미국의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방북단이 전혀 통솔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많다.


그 문제는 갈 때부터 안고 간 것이다. 2백여 단체에서 3백여 명이 갔는데, 다 자기 단체의 집행부이다. 누구 말을 듣겠는가. 소풍을 가도 꼭 늦거나 말 안 듣는 애들이 있는 것과 같다. 극좌, 좌, 중도, 극우까지 다 있었다. 무지개 색깔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남한 사회의 강점이다. 한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다. 돌출 행동 나오게 되어 있다. 왜 그걸 가지고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방북단이 귀국하자 언론이 '남남갈등'이라고 대서 특필하고 있는데.


누군가 조장하는 것이다. 그건 남한 사회의 다양성이다. 빨주노초파남보 다 있지 않은가. DJ 정권과 갈등 관계에 있는 일부 언론사가 이번 돌출 행동을 희생양으로 삼아 증폭시킨 것이다.


돌출 행동이 가린 성과는 무엇인가?


이번 평양 통일대축전의 최대 성과는 평화촌 공동 개최다. 내가 오는 9월1일 노르웨이 외무장관 초청으로 노벨상 100주년 기념 문학제에 참가한다. 노르웨이 북쪽에 있는 대학 도시 트럼쉐에서 열리는데, 문학제 주제가 바로 전쟁과 평화다. 팔레스타인·보스니아·헝가리·유고·북아일랜드 등 전세계 분쟁 지역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이 작가들을 그대로 평화촌에 초청할 계획이다.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경의선 도라역 주변에 천막을 세우고, 1주일간 평화를 주제로 한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3∼4명을 초청해, 이들로 하여금 1일 촌장을 맡게 하고, 전세계 분쟁 지역 작가들과 평화·환경 NGO들, 그리고 국내외 예술가들이 모여 1주일간 강연회·낭송회·음악회·영화제·연극 등을 펼치고, 마지막 날 평화 선언을 채택해 유엔에 전달한다. 평화촌은 통일이 될 때까지 매년 열 계획이다.


평화촌 프로젝트는 언제 구상했는가?




1990년대 초반 해외에 있을 때였다.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면 범민련 운동의 성격과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엔 동시 가입은 곧 분단이 세계적으로 기정사실화하는 것인데,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여도 전쟁 위협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994년에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지 않았는가. 그때 평화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당시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지난 7월 말, 노르웨이 외무장관의 초청장을 받고 부랴부랴 평화촌 추진 계획을 실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내사랑 경의선'이라는 민간단체가 있어서 평화촌을 함께 추진하기로 했고, 북에 가서 공동 주최를 관철하기로 한 것이다.


평화촌 계획에 대한 북쪽의 반응은?


처음엔 북쪽에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출발 전날 만찬장에서 북쪽 예술가들이 서울 목동에 건립되는 예총회관 개관식에 북한 예술가들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버럭 화를 냈다. 예총이 어떤 단체인가, 우리들이 감옥에 가 있을 때, 우리보고 빨갱이라고 한 사람들 아닌가, 그런 단체의 행사에 참가하겠다니, 이렇게 정치적 원칙이 없는 집단이 어디 있느냐며 대판 싸우고 만찬장을 나와버렸다. 그랬더니 북쪽 집행부 간부가 찾아와서 예총회관 건립식 참가는 합의 사항이 아니라고 해명하기에, 그 간부에게 다시 한번 평화촌 계획을 설명했다. 그 간부는 그 자리에서 답변하지 못하고, 다음 날, 서울로 출발하던 날 아침 8시에 북한 문학예술총동맹 명의로 평화촌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알려왔다.


남쪽 통일운동 세력들이 미숙해 보였다.


지금 좌경이 제일 위험하다. 우익들이 말하는 좌경이 아니고, 운동 선상에서의 좌경 말이다. 6·15 선언 이후 국민의 80% 이상이 남북 교류에 합의하고 있는데, 좌경하면 안된다. 선명성 경쟁을 하는 것을 보면 통탄스럽다. 대중이 따라오지 않는 통일운동은 통일운동이 아니다.


남북 양쪽에서 비판을 받았다고 들었다.


이번에 깨달은 것이 바로 그거다. 남북 양쪽에서 욕을 먹으면 그것이 바로 세계적 보편성이고, 또 그것이 분단을 극복하는 방향성이었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북에서는 자기네 도덕성·선명성에 박자를 맞춰 주지 않는다고 나를 욕하고, 남쪽은 남쪽대로 조그만 빌미도 주면 안되었다. 예컨대 첫날 3대헌장탑 가주고, 마지막날 폐막식에는 가지 않았다. 첫날은 남측에 욕먹고 마지막 날에는 북측에서 욕먹은 것이다. 통일운동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돌출 행동이 문제가 되었지만, 21세기 첫 8·15에 남북 민간 교류가 처음으로 성사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임수경씨나 나 같은 사람을 남쪽이 보내주고 북쪽이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을 보고, 남북 정권이 남북관계를 대하는 태도가 성숙했다는 것을 느꼈다. 옛날 같았으면 북에서 나에게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요구가 많았을 것이다. 돌출 행동이 아니라 이런 변화에 주목해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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