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에 파묻힌 '화해' 보따리들
  • 박성준 기자 (snype00@e-sisa.co.kr)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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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후 최초 합동 미사·학술 교류 합의 등 큰 성과


통일대축전에 참석한 기간에 일부 인사들이 부적절한 언행으로 보수·우익 진영에 좋은 불쏘시개감을 제공한 사건. 과연 이 사건은 남한 국민의 안보관과 정부의 햇볕 정책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확인시킨 외에 소득이 전혀 없이 끝난 실패작인가. 북한 체류 6박7일 간은 물론, 지난 8월21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환한 이후에도 보수 언론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고 있는 방북단은 과연 전체가 북한에서 죽을죄만 짓다가 온 '배신자'들인가.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만경대 방명록 사건' 파문, 방북단 귀환 이후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햇볕 정책 논란 등 비록 일련의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해 빛이 바랜 것은 사실이나, 방북 결과를 냉정하게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번 방북이 오점을 남기기는 했지만, 남북한 민간 교류 차원에서 일구어낸 성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방북단이 현지에서 일군 성과 한 가지. 지난 8월19일 아침, 북한을 방문한 남측 천주교 신자들은 북한 신자들과 함께 평양 시내 장충성당에서 분단 사상 최초로 남북한 합동 미사를 올렸다. 미사에는 북한을 방문한 남측 성직자·수도자·신자와 북측 신자들이 참여했다.


북한 체류 기간 8월19∼21일에 남한의 문인·청년학생·여성·노동자·농민·종교인 들은 모두 이처럼 '부문' 또는 '단체' 별로 북측 상대와 집중적으로 만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남북한 농민이 만난 자리에서 북한 농민은 남측에게 못자리용 비닐을 보내준 데 대해 감사하고, 남측에 종자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남북한 역사학자들은 학술 분야 모임에서 일제 강점기 만행과 독도 영유권 문제에 양측이 공동 대응하고 학술 교류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앞으로 교류가 1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대목이다. 또 '7대 종단'에 소속해 북한을 방문한 불교계 대표들은 북한에 남아 있는 사찰 60여 곳의 단청을 복원하는 데 필요한 원료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남북한이 공동으로 문화 유산을 복원·관리하는 최초 사례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다. 내년 이맘때 서울에서 열릴 8·15 행사에는 이산 가족 상봉 때를 빼고서는 역사상 처음 북한 주민이 남한을 찾을 예정이다. 오는 10월 비무장지대의 한 지점(경의선 도라역 부근이 유력하다)에서는 역시 분단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북한 주민이 함께 어울려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대규모 문화 잔치를 벌인다. 이 자리에는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도 참석할 예정이다(38쪽 딸린 기사 참조).


대종교 등 남북한 민족 종교 단체들은 오는 10월 있을 개천절 행사를 평양 교외 단군릉에서 공동으로 열기로 합의했고, 여성단체들도 오는 10월께, 남북한 공동으로 여성대회를 연다.


이 모두는 지난 8월21일, 6박7일 간의 북한 방문을 마치고 귀환한 방북단 대표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청문회' 식으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통일 축전 물의'에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풀어놓은 방북 선물 보따리이다.




갈등 : 방북한 일부 인사들의 돌출 행동을 둘러싸고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 사이에 대립이 도드라졌다. 왼쪽은 방북단 귀환 때 출영 나온 진보 세력 단체들. 오른쪽은 김포공항에서 통일축전 방북단을 규탄하는 우익 단체들.


사실 방북단은 이같은 성과를 얻기 위해 때로는 밤잠을 설치며, 때로는 북측과 실랑이를 하며 무진 애를 썼다. 8월21일 방북단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남북한 민간 대표가 함께 작성해 발표하기로 한 '공동 보도문'에 △내년 8·15 행사 때 북측 대표 서울 방문 △민족 안전과 평화 정착 노력 등을 명문화하자는 남측의 요구를 북측이 '권한이 없다'며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서울 귀환 당일인 8월21일 오전에서야 겨우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실 이번 방북은 애초부터 책임 있는 당국자간 만남이 아니라 민간과 민간의 만남이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했다. 애초 방북 목적도 '친선과 교류'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연이어 터진 돌발 사태 이후, 남측의 비판 여론에 내몰린 방북단은 자기네 역할을 '한바탕 잘 놀다 오는 일'에서 '실질적인 방북 성과를 내기 위한 협상'으로 수정해야만 했다. 바로 이 때 방북단이 가장 먼저 맞닥뜨린 장벽은 북한 사회 특유의 경직성이었다.


돈 없어 책 반입 못하는 국립도서관 실상에 충격


당연히 북측과 마찰도 잦았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대표로 10여 년 만에 북한을 다시 찾은 황석영씨도 북측 인사와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실랑이를 벌였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김창수 정책실장은 이산 가족의 추석맞이 선물 교환을 제안했다가 민간 차원의 합의한 전례가 있었는지 여부를 놓고 북측과 입씨름을 벌였다. 방북단이 발표한 '부문별 합의 성과'는 이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어렵사리 이루어낸 것이다.


남한 민간인이 방북 기간에 비록 제한된 영역에서나마 북한의 실상을 피부로 실감하고 돌아온 것도 이번 방북의 또 다른 성과이다. 민화협 정책위원 자격으로 방북단에 참가한 서동만 교수(상지대·교양학)도 이번 방문에서 북한의 비참한 실상을 비교적 자세하게 관찰하고 돌아온 사람 중의 하나다.


서교수는 8월17일 오후 일행과 함께 평양 시내 인민대학습당을 방문했다. 그곳은 남한으로 치자면 국립중앙도서관에 해당한다. 약 40분간 머무르며 시설을 돌아보던 서교수는 그곳에 설치되어 있던 개인용 컴퓨터로 소장 도서를 시험 삼아 검색했다가, 1980년대 중반 이후로 서적과 잡지 반입이 뚝 끊겼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북한 최고의 국립 도서관이 돈이 없어서 책을 반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명색이 북한 전문가인 서교수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교수가 놀란 것은 그것뿐만 아니었다. "밤에는 암흑 천지가 되는 열악한 전력 사정,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헐벗은 산, 영양 실조로 여겨지는 누렇게 뜬 주민 얼굴 등 어느 것 하나 가슴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방북단이 본 북한은 성장이 완전히 멈춘 곳, 그러면서도 김일성 부자의 혁명 구호를 떼어놓고서는 결코 한 걸음도 옮길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라고 서교수는 말했다.


민간 차원의 교류 기반 넓힌 계기


무엇보다 이번 방북은 남북한 당국자들 사이에 대화·접촉이 중단된 상태에서 교류를 지속할 사슬을 마련하고, 민간 차원의 교류 기반을 확대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또 남측 대표단이 극히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는 북한에 처음 가보았거나, 북한 주민과의 대화에 문외한인 아마추어들로 구성되었다는 점도 방북 성과를 평가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번 방북을 포함해 수 차례 북한을 다녀온 민화협 김창수 실장은 "북측은 민간인이라도 모두 닳고 닳은 대남 전문가들이다. 그들과 접촉하면 직업적인 협상가들도 실수하기 마련인데, 문외한인 경우에는 오죽하겠는가. 더욱이 이번 방북에는 보수에서 진보까지 2백 개가 넘는 사회단체 대표가 참가했다"라며, 방북 과정에서 불미스런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보수 언론은 방북 성과를 폄하하고 문제점을 부각하는 등 연일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북한 전문가 이종석 박사(세종연구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방북 과정에서 물의를 일으킨 통일운동 진영 내부의 일부 좌편향 세력도 문제이지만, 이를 빌미로 사회가 완전히 두 동강 난 것처럼 선전하는 우익의 책동은 더욱 경계해야 한다"라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서동만 교수 역시 일부 좌편향 세력에게는 '자기 검열'을, 국민 정서를 볼모로 '보수 역풍'을 조장하는 우편향 세력에게는 '냉정함과 자제'를 주문한다. 극단은 어느 쪽이든, 국민의 방향 감각을 상실케 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냉전 의식이 판쳤던 암울한 과거로 되돌리는 데 기여할 뿐이라고 이들은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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