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파, 민주당 '인동초' 되는가
  • 김종민 기자 (jm@e-sisa.co.kr)
  • 승인 2001.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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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치고 나가면 모반" 역풍 기세 꺾여…
경선에서 '최후 승부' 노릴 듯
"DJP 공조가 깨졌지만 우리 당은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치로 전환할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이번 인사로 그 기회를 놓친 것 같다. 그렇다고 되돌릴 수도 없다. 되돌리면 대통령이 죽는다." 한광옥 민주당 대표 내정설이 알려진 직후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복잡한 심사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민주당 개혁파 의원들은 이번 민주당 인사 파동으로 적지 않은 내상(內傷)을 입었다. 지난해 12월 권노갑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을 사퇴시키고 올해 5월 당정 쇄신을 요구하던 기세는 눈에 띄게 꺾였다. 정풍운동의 주역이었던 한 의원은 "청와대가 정권 재창출을 포기하고 레임 덕이나 막으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라며 허탈해 했다. 불신과 자조뿐 아니라 어렴풋한 절망감마저 어른거린다.


지난 9월6일 한광옥 당대표 내정설이 알려지자 민주당 소장 개혁파 의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9월7일 아침 '새벽21' 소속 초선 의원들은 긴급 모임을 갖고 '더 이상 대통령 대리인인 대표를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개혁파 재선 의원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9월6일 밤 천정배·신기남·정동영·정동채 등 바른정치모임 의원들은 정동채 의원 집에서 긴급히 모였다. 오전 2시까지 대책을 논의했으나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이튿날 오전부터 하루 내내 확대 모임을 가졌다.


결국 이들이 내린 결론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기세는 이내 꺾였다. 김성호·이호웅·정범구 의원은 탈당도 불사하겠다며 배수진을 쳤지만 당 지도부의 설득으로 3일 만에 탈당 선언을 철회했다. 김근태·정대철 최고위원이 한광옥 대표 지명자에게 자진 사퇴를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대세를 돌이키지는 못했다.


"목소리 내면 DJ가 죽고, 안내면 개혁파가 죽는다"


이번 한광옥 체제 등장은 지난해 9월 이른바 '13인의 반란' 이후 1년 동안 당·정 쇄신을 요구해온 민주당 개혁파의 좌절을 의미한다. 이들이 일관되게 겨냥했던 것은 동교동 구파. 지난해 9월에는 당시 김옥두 사무총장과 정균환 원내총무 퇴진을 요구했다. 석 달 뒤인 12월에는 정동영 최고위원이 권노갑 당시 최고위원 퇴진을 요구해 성사시켰다. 올해 5월 다시 당·정 쇄신을 요구하며 이른바 마포사무실과 비선 조직을 문제 삼았을 때도 표적은 동교동 구파였다. 그러나 개혁파의 공세로 한때 뒤로 물러섰던 동교동 구파는 이번에 한광옥 대표 체제 등장과 중도개혁포럼(중개포) 출범으로 민주당의 대주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개혁파가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요인은 현재 민주당이 처해 있는 상황. 정동채 의원은 "지난 5월의 정풍운동은 친위 쿠데타였다. 그러나 지금 치고 나가면 모반이다"라며 불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DJP공조도 깨지고 여당에 대한 여론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당내 반발은 곧 대통령과 당에 대한 치명적 타격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천정배 의원도 "목소리를 내면 대통령이 죽고 목소리를 안 내면 개혁파가 죽는다"라며 개혁파가 처한 딜레마를 털어놓았다.


리더 없고, 세력 약해 한계 드러내




그러나 정치 상황보다 더 근본적인 요인은 개혁파의 역부족. 초·재선 별로 개혁파 의원 모임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합쳐 보아야 30명 정도이고 그나마 결속력도 취약하다. 특히 리더가 없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번 인사 파동을 겪으면서 개혁파 의원들은 한화갑·김근태 최고위원에게 불만이 많았다. 대선 주자 포기를 전제로 당 대표를 맡을 수 없다고 선언한 한최고위원에 대해 개혁파 의원들은 이번에 무조건 대표를 맡았어야 한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그가 대표를 맡아 당·정 쇄신 요구를 수렴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파 의원들의 기대였는데 대권 도전에 집착해 일을 그르쳐 버렸다는 것이다.


김최고위원에 대해서는 한대표 지명 사실이 알려진 다음날인 9월7일 바로 치고 나갔어야 한다는 주문이 많았다. 김최고위원이 9월8, 9일 양일간 동교동계 해체를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한 발짝 늦었다. 이미 개혁파 의원들의 기세가 꺾인 뒤였다.


중개포 출범 역시 보이지 않게 개혁파 의원들의 기를 꺾는 역할을 했다. 개혁파 의원들이 삼삼오오 반발한다 해도 그것은 소총 공격에 지나지 않았다. 현역 의원을 50여 명 거느리고 있는 중개포가 포탄을 장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웬만한 명분이 없이는 전투를 벌여야 승산이 없는 상황이었다.


개혁파의 의기 소침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태를 두고 민주당의 한 인사는 "개혁파의 비장한 몰락이 시작되었다"라고 표현했다. 한 초선 의원 역시 "앞으로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한다"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10·25 보선 결과가 거취 가를 듯


그러나 갈등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특히 10·25 보궐 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해 민심 이반이 다시 확인되면 개혁파의 쇄신 요구가 다시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DJ와 당 지도부에 대한 기대는 크게 줄어 든 상태다. DJ와 가까운 한 초선 의원은 "DJ의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라며 DJ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DJ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다면 유사시 개혁파의 행동 수위가 예전보다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경우도 상상해볼 수 있다. 민주당내 갈등이 탈당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이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탈당이나 분당이라는 배수진을 치지 않으면 동교동계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라며 초강수를 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식으로 동교동계에 끌려 가면 돌아선 민심을 되돌릴 수 없고 결국 정권 재창출은 실패한다는 상황 인식 때문이다. 비록 철회하기는 했지만 이번에 초선 의원 3명이 탈당 불사를 선언한 것도 예삿일은 아니다. 탈당이라는 선택이 더 이상 금기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이번에 보여준 것이다.


이제 개혁파들의 목표는 문제의 핵심을 향하고 있다. 메아리 없는 당·정 쇄신 요구보다는 내년에 있을 경선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개혁파의 한 재선의원은 "어차피 한광옥 체제는 차기 경선 때까지 갈 것이다. 대선 후보 경선 때 개혁 후보를 당선시키는 수밖에 없다"라며 호흡을 길게 가졌다. 한 초선 의원은 "앞으로 당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민심을 모으지 못하면 차기 후보 조기 가시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라며 방향을 분명히 했다. 비록 이번에 민주당 개혁파가 분루를 삼켜야 했지만 대회전에서의 진짜 승부는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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