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발 대공황, 지구 공습하는가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1.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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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 '상처' 깊어지면 전세계 '장기 불황' 불 보듯…
"미국인 소비 놀랄 만큼 늘 것" 낙관론도
지난 9월11일 오전 8시48분(현지 시각), 세계무역센터에 있는 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전미경영학협회(NABE) 연례 모임. 미국 투자 은행 모건 스탠리 딘위터의 로버트 스콧 사장은 7천8백만명에 달하는 '베이비 붐' 세대의 저축으로 조만간 새로운 투자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연설하다가 커다란 충격음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테러범들에게 납치된 아메리칸 에어라인 소속 보잉 767기가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을 들이받고 폭발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15분이 지난 9시13분. 이번에는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소속 보잉 767기가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을 들이받았다. 비행기 두 대가 폭발하며 발생한 엄청난 고열을 견디지 못한 세계무역센터는 이윽고 완전히 무너졌다.


미국 금융의 중심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세계에 전해지면서 영국·독일 등 각국 증시는 일제히 폭락했다.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월 스트리트가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모건 스탠리 딘위터 등 초일류 금융사에 속한 고급 금융 인력들의 생사마저 불투명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인 9월10일 5033.7이던 영국 FTSE 100 주가지수는 11일 증시가 폐장하면서 5.7%가 급락한 4746으로 주저앉았다. 독일의 DAX 30 지수와 프랑스의 CAC 40 지수도 폭락을 면치 못했다.


한국·일본, 미국·아프간 전쟁 최대 피해자


유럽 국가들보다 대미 수출 의존도가 훨씬 높은 아시아 국가들은 상황이 더욱 나빴다. 타이완은 증시가 큰 충격을 받는 것을 막고자 12일 하루 증시를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외 국가들의 증시는 개장하자마자 폭락했다. 일본 닛케이 지수는 고이즈미 정권이 '마지노선'으로 삼았던 10000선을 뚫고 9610으로 급락했다.


아랍계 테러리스트가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국제 유가도 폭등했다. 미국이 아랍 국가들에 보복하리라고 점치는 이가 많은 탓이었다. MSNBC 등 미국 언론은 미국의 일부 주유소에서 차에 기름을 넣으려면 줄을 서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고 전했다. 캔자스의 한 주유소에서는 전날 1갤런에 1.538 달러로 팔던 무연 가솔린 석유를 4배 가량 높은 5.62 달러에 팔기도 했다.


미국발 세계 경제 공황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 닥치자 선진 7개국(G7) 정부는 신속하게 대응했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유럽 중앙 은행(ECB)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긴급히 유동성 방출 대책을 발표했다. 미국·유럽·일본 중앙 은행은 12일 하루 동안 1천2백억 달러를 금융 시장에 쏟아부었다. 유럽과 미국 정부는 필요할 경우 '공격적'으로 금리를 낮추어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러한 조처로 세계 경제는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러나 9월14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선전 포고'를 한 뒤부터 상황은 다시 악화하고 있다. 런던 상품 시장에서 영국 북해산 브랜트유는 전날보다 배럴당 1.06 달러 오른 29.43 달러를 기록했다. 불황기에 '안전 자산'으로 선호되는 금값도 전날보다 온스당 4.25 달러 오른 285.50 달러로 시장을 마감했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긴장이 계속되는 한 유가와 금값이 계속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다.


미국·아프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세계 경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1990년대 초반 미국 경제 불황은 1990년 8월에 걸프전이 벌어지면서 소비 심리가 위축된 탓이라는 것이 정설. 유럽과 아시아 경제가 침체에 빠진 상황에서 미국 경제마저 '경착륙'한다면 세계는 장기 불황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구조 조정을 자꾸 미루고 있는 일본과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가장 심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 증시 향방이 세계 경제 미래 결정


전쟁이 터지기 전에도 이미 미국 경제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지난 8월 미국의 소비자 신뢰 지수는 1993년 이래 최하치인 83.6으로, 미국인들의 소비 심리가 침체할 대로 침체한 상태였다. 이번 테러 사건으로 인해 PC업체와 가전업체 들은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라는 '대목'이 낀 4/4분기에 대한 기대를 접는 분위기다. 9월14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은 기업의 생산 물량이 11개월째 감소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이 성장은 둔화하는데 물가는 오르는 '이중고'를 겪을 조짐이 보인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일단 세계 경제의 미래는 미국 증시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 증시가 내려앉는다면 다른 국가들의 증시 역시 잇달아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을 피하기 어렵다. 금융 전문가들은 '폭격'을 당한 월 스트리트가 언제쯤 기능을 회복할지 주목하고 있다. 미국 금융 회사들은 이미 1990년대 말 'Y2K' 문제에 대비하면서 전산 시스템을 재정비해 놓았기 때문에 고객 자료와 거래 기록은 무사하다고 한다. 지난 9월13일 재개장한 채권 시장이 정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뉴욕 본사 직원 천 명 중 6백명 이상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는 채권 중개 업체 캔터 피츠제럴드는 적은 인원으로도 별 무리 없이 거래를 소화했다.


그러나 월 스트리트의 사무실과 통신시설을 모두 재구축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세계무역센터에 뉴욕 지점을 두었던 후지 은행 등 16개 금융사와 현대증권 등 국내 증권사들은 이번 사건으로 국제 영업 거점을 거의 잃어버렸다. 버라이존 텔레콤 그룹 부회장 래리 바비오는 "이번에 공격당한 지역은 세계에서 전화선이 가장 집중적으로 매설된 곳일 것이다"라면서, 통신 시설을 복구하는 작업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게다가 '사람 장사'라고 불리는 금융산업에서 우수한 인재를 잃은 금융사가 많다는 것도 걸림돌이다. 세계무역센터 건물에서 3천5백명이 근무하고 있던 모건 스탠리처럼 빌딩이 무너지기 전에 직원 대부분이 탈출한 곳이 있는 반면, 소규모 회사들의 경우 직원이 거의 몰살한 곳도 있다. 세계무역센터 북쪽 빌딩 93층에 입주했던 정보기술(IT) 투자 업체 '프레드 알저 매니지먼트'처럼 최고경영자를 잃은 회사도 있다. 〈비즈니스 위크〉는 한 금융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월 스트리트는 스위치를 다시 켜면 계속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월 스트리트 복구 작업이 순조롭게 끝나도 미국인의 소비 심리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미국 경제는 장기간 침체할 수밖에 없다. 진주만 폭격·걸프전과 달리 이번 사건은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대형 참사라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미국 경제 '기초 체력' 여전히 튼튼하다"


걸프전이 벌어졌던 1990년대 초반 미국인들이 비행기 여행을 꺼렸던 것은 단지 테러리스트를 두려워한 탓이지만, 이제 비행기 테러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다. 미국의 항공·호텔·여행 산업이 직접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투자 협상의 경우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 최종 담판을 짓는 일이 많은 만큼 여행을 두려워하는 이가 늘어날수록 기업 투자가 정체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플로리다 주립 대학 심리학 교수인 찰스 핑글리는 "우리는 이제 두려움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배우고 있다"라고 말했다.


물론 미국인들의 소비 심리가 호전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는 낙관론자들도 있다. 미국의 국내 총생산(GDP)에서 뉴욕이 차지하는 비중이 6%에 달하지만, 그렇다고 미국 경제의 '기초 체력'이 훼손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지난 9월14일자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만약 사람들이 생수와 통조림을 사려고 뛰쳐나간다면 이것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일이다. 몇 주 동안 미국인들은 생필품만 사려고 하겠지만, 일단 충격이 지나가면 소비 지출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이번 테러 사건은 세계화한 시장 경제의 취약성을 드러낸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ING 베어링 증권의 신흥 시장 담당 이코노미스트 필립 풀은 "세계화란 세계 경제가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하다는 전제에서부터 출발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테러리스트에게 무방비 상태로 직격탄을 맞자 이러한 전제는 '환상'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그래서 〈비즈니스 위크〉는 '이 사건이 미국 경제에 어느 정도 충격을 줄지는, 이번 공격의 성격이 1회성으로 그치는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불확실성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냐에 달려 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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