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생폰사'…첨단 디지털의 빛과 그림자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9.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핸드폰, 구조 요청·생사 확인에 큰 위력…
오사마 빈 라덴은 'e-지하드' 펼쳐
세계무역센터 101층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던 멜리사 씨는 건물이 흔들리는 충격을 느꼈다. 벽이 무너져 내렸고 먼지와 연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탈출하기가 쉽지 않음을 직감한 순간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비행기가 충돌한 것 같아요. 사랑해요 당신. 안녕!" 그녀는 남편에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세계무역센터에서 발굴된 수많은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멜리사처럼 유언을 남기기 위해, 또는 매몰 위치를 밖으로 알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처럼 이번 9·11 테러 때는 핸드폰과 인터넷 등 디지털 매체가 힘을 발휘했다. 무역센터가 무너진 뒤 가장 먼저 구출된 9명 가운데 3명은 핸드폰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매몰된 경찰관이 누이에게 다급한 상황을 알렸다. 여동생이 911에 신고해 그 경찰관은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인터넷 역시 생사 확인을 하는 데 한몫을 했다.


수사당국, 통화 기록으로
'테러 몸통' 추적


그런데 이번 테러 사건에서 누구보다 핸드폰 덕을 톡톡히 본 것은 연방수사국(FBI) 등 수사당국이었다. 테러에 이용된 항공기 탑승자가 모두 사망하는 바람에 누가 어떻게 항공기를 납치했는지 아주 기본적인 사실조차 알아내기 힘들 뻔했다. 하지만 탑승객이 휴대 전화로 기내 상황을 가족에게 알린 것이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펜타곤 건물에 추락한 아메리칸에어라인 77기에 탑승한 테어도어 올슨 법무차관의 부인 바버라는 남편에게 두 차례 전화를 걸어 피랍된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승객과 조종사·승무원이 모두 비행기 뒷부분으로 밀려났고, 납치범들은 칼로 무장했다고 전했다. 테러에 이용된 다른 항공기의 탑승객 역시 비슷한 정황을 핸드폰으로 가족이나 911에 알렸다.




수사 당국은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 테러범들이 모두 칼만을 소지한 채 항공기를 납치했고, 아랍어 식 영어 발음을 구사했으며, 직접 비행기를 조종해서 충돌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탑승객의 핸드폰뿐 아니라 용의자의 핸드폰도 수사당국은 주목했다. 수사당국은 테러 사건 직전 휴대 전화를 사거나 빌린 아랍계 테러 용의자로 수사 대상을 좁혔다. 또한 용의자의 휴대 전화 도청도 증거 채집 방법으로 쓰이고 있다. 핸드폰 통화 기록을 통해 테러의 몸통을 쫓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 사용되는 CDMA 방식 핸드폰도 도·감청 논란이 있지만, 미국과 유럽 쪽에서 일반화한 TDMA 방식 핸드폰은 도·감청하기가 아주 쉽다.


테러 사건이 일어난 뒤 백악관 경호요원들 역시 휴대 전화에 바짝 긴장했다. 연설 도중에 휴대 전화 벨소리가 터지면 유난히 짜증을 내는 부시 대통령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안전 때문이었다. 9월11일 오전 9시5분 플로리다 사라소타에 있던 부시 대통령이 두 번째 테러 사실을 전해 듣고 대통령 전용기에 오르자 경호원들은 동행한 백악관 기자단에 핸드폰 전원을 모두 꺼 달라고 요구했다. 혹시나 핸드폰을 통해 이동 경로가 테러리스트에게 포착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백악관 경호실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이번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이 첨단 통신 장비를 갖춘 디지털 테러리스트이기 때문이다. 빈 라덴은 표적이 되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 스포츠 사이트나 포르노 사이트 게시판을 통해 조직원에게 전달하는 'e-지하드'를 개척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