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남 휩쓰는 ‘노무현 대세론’
  • 부산 · 박병출(자유기고가) ()
  • 승인 2002.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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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기초의원들까지 지지 대열 가세…‘노풍’ 진원지 호남에도 서서히 ‘호감’


일요일인 지난 3월24일 오후 5시30분 부산. 여느 때 같으면 시민들이 붐벼야 할 시간인데도 도심 거리는 한산했다. 대신 다방의 텔레비전 앞에는 사람이 몰렸다. 민주당 대선 후보 강원 지역 경선 결과 생중계가 시작된 시각이었다. 노무현 후보가 이인제 후보에게 7표 차라는 박빙의 승리를 따내자,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더러는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날 밤, 곳곳의 술자리에서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이 화제였다. 동구 범일동의 한 호프집에서 만난 회사원 정 아무개씨(37·부산 남구 문현동)는 “장난이 아니다”라는 말로 노후보의 약진을 평가했다. 동료 3명과 술을 마시고 있던 정씨는 “따지고 보면 현재 출마를 선언한 여야 대선 예비 후보 중 그만한 사람도 없다. 다만 노씨는 본선보다 오히려 예선 경쟁력이 약하다고 여겼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정씨는 이 날 술자리를 ‘부동층’이던 자신이 노씨 지지 쪽으로 마음을 정한 기념으로 동료들에게 한잔 내는 것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바람’이 한나라당 텃밭으로 여겨져 온 부산에도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부산·경남·울산 지역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앞지르기 시작했고,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지지율 격차가 10%대로 좁아졌다.


사실 광주 경선 이전까지만 해도 노무현은 부산에서 ‘비인기 정치인’이었다. 그가 화두로 삼아 온 ‘동서 화합’에 공감하는 시민들까지도, 정치적으로는 지지자 대열에 서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밀어 주어도 안될 사람이니까’라거나 ‘사람은 아깝지만 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 노무현은 여론조사에서만 아니라 실전에서도 통하는 정치인으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노풍’의 실체가 맨 먼저 감지되는 곳은 지역 정가이다. 우선 김기재 전 지부장이 일방적으로 이인제 후보 진영에 가담한 이후 분위기가 가라앉았던 민주당 부산시지부가 달라졌다. 지방 선거가 다가오는데도 시장 후보를 물색하지 못하고 있던 처지였으나, 이제는 후보 홍수 사태를 겪고 있다. 윤원호 시지부장(여·58)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ㅈ·ㅁ 변호사, 대학 총장 출신인 ㅇ씨, 시민단체 대표 1명, 지구당위원장 1명 등이 부산시장 공천을 희망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단, 이들은 모두 ‘노고문이 대선 후보로 확정될 경우’라는 전제 조건을 달았다. ‘노풍’이 돛을 올리면 부산시장 당선도 가능하다는 이들의 분석에서, 노무현을 둘러싼 부산 민심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3월30일의 경선을 앞둔 경남 지역에서는 선거인단의 표가 눈에 띄게 노후보 쪽으로 쏠리고 있다. 자신이 당초 ‘한화갑 후보 조직표’였다고 밝힌 ㄱ씨(42·대의원 당원 선거인단)는 “지지 후보가 사퇴한 데다 대선에서 이회창 총재에게 대적해 영남표를 빼앗을 후보가 노고문밖에 없다고 생각해 그를 찍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3월23일 한 언론사가 경남 선거인단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62.9%가 노고문을 지지해 15.4%를 기록한 이인제 고문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한 여론조사 관계자는 “아직 지지 후보를 정하지 못한 선거인단(여론조사 결과 16.5%) 중 상당수도 노고문 쪽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분석했다. 특히 이인제 고문이 대전 경선에서 몰표를 얻은 데 이어 충남 경선에서도 73.7%라는 득표율을 기록한 것이 경남 지역에서의 노고문 지지를 더 자극할 것이라는 분석도 덧붙였다.


변화는 ‘적진’에서도 일고 있다. 경남 지역 한 기초의회의 ㅍ의원은 “노무현씨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면 우리 의원들도 의회 차원에서 밀어주기로 결의했다”라고 밝혔다. 이 의회는 의원 10여 명 전원이 한나라당 소속이다. ㅍ의원은 “단지 노씨가 경남 출신이라서가 아니다. 의원들 대부분이 ‘한나라당 당원이라는 점과 누가 대통령 적임자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별개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제는 PK가 화답할 차례”




노풍은 한나라당 경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선 출마 여부로 한나라당에서 미운털이 박혔던 김혁규 경남도지사 재공천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분위기이다. 이회창 총재는 3월2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경남 창원에서 열린 김지사의 <나는 주식회사 경상남도 CEO>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김지사 끌어안기에 나섰다. 노고문이 민주당 대선 후보에 선출될 경우 경남도 내 한나라표 수비수로 김지사를 따를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도지사 재공천을 확정했다는 것이다.


P·K지역에 불고 있는 노풍이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것은, 이 바람이 ‘외풍’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다른 곳 아닌 광주가 바람의 진원지가 되었다는 점이 부산·경남 주민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부산·경남 주민들이 3월16일 광주 경선 결과를 접했을 때의 첫 반응은 경악에 가까웠다. “아니, 광주가?”였다가 “역시 광주가…”로 바뀌는 데에는 며칠이 걸렸다. 광주로부터 한 수 배웠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남 순천 출신으로 경남 김해시에서 도자기를 빚는 양계승씨(44·금산요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영호남 갈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남 사람들은 호남을 ‘싫다’고 하지만, 호남 사람들은 영남을 ‘밉다’고 한다. 호남을 배척한, 가해자로서의 영남을 머리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광주는 노무현씨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택했다. 그를 통해서 진정한 동서 화합을 이루자는 희망의 표시일 것이다.”


광주 시민들은 ‘대승적 결단’으로 공을 영남에 넘겼다. P·K 주민들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호남에서조차’ 밀어 준 노무현을 고향이 외면하면 속 좁은 무리라는 욕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좋아하고 노고문을 지지할 경우 ‘제 지역 사람이라고 챙긴다’는 비난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한 네티즌은 노무현 홈페이지에 <부산과 경남에서의 몰표는 지역 감정 아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망국병인 지역 감정을 깨뜨리기 위해 노무현은 처절하지만 당당하게 정도를 걸었다. 거기에 처음으로 광주가 화답했고, 이제 부산·경남이 화답할 차례다. 그리고 전남북이 화답하고, 경북·대구가 화답할 것이다.’(아이디 mminni, 3월25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광주 경선 이후 부산·경남 주민들이 호남을 바라보는 눈길에 호감이 담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선은 다음으로 치더라도, 지역 감정을 녹이는 봄바람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노풍은 이미 부산·경남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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