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영남을 내 품 안에”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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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후보의 대선 최대 화두는 정계 개편이다. 1차 타깃은 부산·경남의 교두보 마련. 노후보는 배수진을 치고 YS를 만났다. 그의 영남 공략은 성공할까.
역시 관심은 정계 개편에 쏠렸다. 4월27일 오후, 공식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던져진 첫 질문도 이것이었다. 그의 답변은 이랬다.


“지역 분열로 흩어진 개혁 세력을 민주당 중심으로 모으겠다. 정치적 조건과 환경은 갖춰져 있다. 여러 정치집단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서로의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노후보는 ‘민주 세력의 단절된 역사를 복원하겠다’고 경선 기간 내내 일관되게 주장했다. 대통령 선거까지는 앞으로 8개월. 정치권의 질서를 새로 짜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경선 후유증 극복→당 결속’이 첫 번째 관문


그러나 노후보가 민주당의 실질적인 리더로 거듭나고 정계 개편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경선 후유증을 극복하고 민주당의 단결을 이끌어내는 것은 그 첫 번째 관문이 될 듯하다.


서울 경선이 있기 전날인 4월26일 오후, 민주당 이훈평 의원은 김효석 의원과 장시간 전화 통화를 했다. 둘 다 동교동계로 이인제 후보 지지를 선언했던 의원들이다. 이들은 이인제 의원이 27일 후보 확정 대회에 참석하도록 다시 한번 설득하기로 했다. 이날 밤 김의원은 이의원을 찾아 ‘재기를 위해서도 대회에 참석하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이의원은 27일 오전 싱가포르로 떠나버렸다.


다음날인 4월28일 오전 민주당사에서는 노후보와 전날 선출된 최고위원들의 상견례가 있었다. 그러나 박상천·한광옥 최고위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둘은 한화갑 대표와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한 사이였다. 이들은 경선 기간 중 노무현-한화갑의 이른바 ‘노한 연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노무현 후보-한화갑 대표의 민주당호는 이들의 불참으로 첫출발부터 절룩거려야 했다.


상전벽해처럼 변한 민주당의 세력 판도를 원만하게 착근시키는 것도 노후보의 과제다. 최고위원 경선 결과, 한화갑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해 정대철·신기남·추미애 등 4명의 개혁파 인사들이 선출되었다. 반면 동교동계 영향권에 들어있는 인물은 박상천·한광옥·김태랑 최고위원 정도다. 동교동계 ‘넘버 3’인 김옥두 의원의 낙선도 이변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까지 권노갑 전 고문의 구파와 한화갑 대표의 신파로 나뉘어 갈등하던 동교동계는 한화갑 대표를 중심으로 급속히 단일화할 것으로 보인다. 동교동계는 사실상 소멸의 길에 들어선 셈이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 신주류의 당권 장악이 밑으로까지 뿌리 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대의원의 60%는 여전히 동교동계의 영향권에 있다. 대표에 버금가는 실세 최고위원으로 떠오른 정균환 총무 역시 동교동계와 가깝다. 한대표 역시 DJ 직계이기는 마찬가지다. 전당대회에 참석한 한 대의원은 “노후보가 당의 얼굴로 등장했지만, 당원들은 여전히 DJ나 동교동계에 대한 심리적 부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4월27일 전당대회 현장의 모습도 이 점을 보여주었다. 노후보는 오후 3시30분부터 20분간 후보 수락 연설을 했다. 연설 중 ‘노무현’ 연호가 터진 것은 막바지에 딱 한 번뿐이었다. 노무현에게 열광하던 한두 시간 전 서울 경선 국민 선거인단의 모습이나, 1997년 김대중 후보의 수락 연설에 환호하던 대의원들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기자단 쪽에서 “당심과 민심이 역시 다르군”이라는 수근거림이 들릴 정도였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도 “정계 개편이 되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당의 환골탈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노풍을 담아내기에는 민주당이라는 그릇이 너무 낡고 정체해 있다는 뜻이다.


한달 보름 앞으로 다가온 지방 선거도 노후보가 통과해야 할 난코스다. 노후보는 일찍이 영남에서 단체장 한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면 후보 재신임을 묻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상황은 낙관적이지 못하다. 대구·경북은 여전히 민주당 후보를 낼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상태. 노후보는 내심 대구 시장 후보로 이재용 전 대구 남구청장을 염두에 두었다. 이씨는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구청장 재선에 성공한 인물. 그러나 그는 민주당보다는 무소속 출마를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노후보측은 후보를 내지 않은 채 이재용씨의 선거 운동을 지원하는 방안까지 생각 중이다.





부산·울산·경남 쪽은 상대적으로 낫다. 노풍이 불기 시작했고, 노후보가 이회창씨와의 가상 대결에서 오차 범위 가까이까지 접근한 상태다. 그러나 선거는 51 대 49 싸움. 장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승산이 있다는 울산은 염두에 두었던 송철호 변호사가 민주노동당 후보로 나서기로 함에 따라 난관에 부닥쳤다. 경남도 현 도지사인 김혁규 한나라당 후보가 철옹성의 지지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평. 노후보가 개척할 수 있는 곳은 부산이 유일하다.


노후보 또한 부산 공략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 그가 염두에 둔 인물은 재야 명망가인 문재인 변호사. 4월27일 후보로 확정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노후보는 “문변호사를 공천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당선까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교감도 필요하다. 한이헌·강경식·김광일·박종웅 씨가 거론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후보는 4월30일 오전 상도동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3당 합당으로 헤어진 지 12년 만이다. 노후보는 이에 앞서 27일 기자회견에서 “솔직히 말해 손익이 함께 있겠지만, YS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후보의 참모는, 신민주대연합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지방 선거 공천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노후보는 내가 픽업한 사람’이라며 호의를 표시한 바 있다.


YS-노무현 회동, ‘새 판 짜기’ 신호탄인가


민주당 내에는 이 만남을 정계 개편의 신호탄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노후보의 한 참모는 “두 사람의 만남 이후 물밑 실무 접촉을 거친다면, 5월10일 전후로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대했다. 지방 선거 공천 마감 시한을 염두에 둔 말이다. 김혁규 경남도지사의 움직임이 YS 복심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노후보와 YS의 공천 연대가 성사된다면 정계 개편은 순탄하게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그럴 경우 PK 지역 한두 곳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민주당은 보고 있다.


그러나 둘의 이번 만남은 상징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조금 우세한 편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노후보가 명실 상부하게 당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지방 선거는 지나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 YS는 노후보를 협상 파트너로 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전망했다. YS가 노후보에게 DJ와의 완전한 절연을 요구할 경우에도 일이 복잡해진다. 문희상 의원은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견제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라면서, 서두를 필요도 없고 확대 해석할 의미도 없다고 말했다.


노후보나 YS 모두 아직 상대에게 제시할 카드가 준비되지 않았고, 따라서 6월의 영남 선거는 노후보 홀로 치러야 한다는 말이다. 노후보도 이런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 문재인 변호사의 이름을 여러 차례 흘린 까닭도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배수진을 치고 선거운동을 벌인다면 민주당 단독 공천으로도 승산이 있다고 노후보측은 말하고 있다. 이럴 경우 정계 개편은 상당 기간 유예되거나, 지난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사실 노후보에게 정계 개편은 낯선 메뉴가 아니다. 그는 지금껏 세 번의 정계 개편을 직접 경험했다. 첫 번째는 1990년 1월의 3당 합당이다. 이 밀실 거래에 의해 여소야대가 여대야소로 일순에 바뀌었다. 김대중의 평민당은 고립되었다. 3당 합당에 반대했던 노후보도 ‘마이너 정치인’으로 유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지금 당시 합류하지 않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노후보는 이어 1991년 9월에 성사된 평민당과 ‘꼬마 민주당’ 간의 야당 통합으로 두 번째 정계 개편을 경험했다. 1997년 11월 국민통합추진위원회(통추) 멤버로서 김대중의 국민회의에 합류한 것이 세 번째다. 3당 합당으로 YS와 결별했던 노후보는 이후 두 번의 정계 개편에서는 DJ와 결합했다.
이 두 번의 정계 개편은 대중적인 명분을 바탕으로 하여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그가 추진하려고 하는 정계 개편도 이런 방식이다. 그러나 두 번 모두 과정이 지난했고,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1년9개월까지 수많은 밀고 당김을 필요로 했다.


“정계 개편은 양쪽 정치 세력이 절실히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그로기 상태에 빠져 서로 합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느낄 때에야 가능했다.” 1991년 평민-민주 통합과 1997년 통추 일부의 DJ 지지 선언 과정에 모두 참여했던 민주당 한 인사의 말이다.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 사이의 DJP 연대도 뜸을 들인 것은 1995년부터였지만, 대선이 임박한 1997년 11월3일에야 조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정계 개편이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거론되는 까닭은, 가능성은 낮지만 성공하면 폭발적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 이 점이 ‘정치공학의 꽃’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YS나 DJ 모두 정계 개편을 통해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런 승부수를 ‘두 사람의 공과를 모두 짊어지겠다’고 밝힌 바 있는 노후보가 던지고 있는 셈. 그 또한 도박에 성공할 수 있을까.
DJP 연대 등 1997년 사례에서 드러났듯, 정계 개편의 본격적인 모습은 대선에 임박해서야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성급히 나서기보다, 기초 체력을 기르는 것이 노후보에게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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