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살해 배후는 누구인가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2.06.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실 추적/명문 여대생 하양 피살 사건
명문 여대 법대생 하 아무개양(22) 피살 사건은 청부 살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유력한 배후 인물의 윤곽도 드러난 상태다. 사건의 배경에는 돈 많은 한 지방 상류층 집안과 서울 강남의 중산층 가정이 지난해 겪었던 격렬한 분쟁이 도사리고 있다. 한 집안이 ‘딸자식 단속 잘 하라’고 다그치자 다른 집안이 ‘판사 사위를 돈으로 샀다’고 비난했다. 사돈간이기도 한 두 집안은 법정 공방까지 벌였다.


지방의 갑부 부인과 명문 법대 출신 판사 사위가 주요 배역을 맡은 이 사건에서는 돈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혈연 관계도 서슴없이 파괴하는 비정한 인심을 엿볼 수 있다.






하아무개양(22·서울 강남구 삼성동)을 납치해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과 살인을 교사한 인물은 누구일까?
하양은 지난 3월6일 새벽 5시30분께 수영장에 가려고 운동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가 실종되었다. 그리고 열흘 뒤인 3월16일,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검단산 자락에서 머리에 공기총 실탄 6발을 맞고 두 팔과 발이 결박당하고 눈과 입이 테이프로 가려진 채 쌀부대에 담긴 엽기적인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피해자 가족은 사건 초기부터 지난해 ‘고소 분쟁’을 근거로 사돈 관계인 부산의 한 기업가 집안을 배후로 거론해 관심을 끌었다. 하양의 이종사촌 오빠이자 하양의 고교 시절 과외 지도를 맡기도 했던 김 아무개 판사(31), 하양과 맞선을 보았던 김판사의 대학 친구 김 아무개 변호사(31), 그리고 하양이 결혼을 전제로 사귀던 남자친구 홍 아무개씨(27) 등 하양과 가까웠던 남성들이 모두 ㅅ대 법대 출신이라는 점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법정 공방으로 앙숙이 된 사돈지간


이종사촌 남매의 ‘부적절한 관계’가 비극을 불렀다는 근거 없는 소문까지 덧붙으면서 사건은 추리 소설처럼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더구나 지난 5월20일에는 현직 경찰 5명이 하양 청부 살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인의 부탁을 받고 2000년 11월부터 2001년 3월까지 ‘사설 탐정 노릇’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구로경찰서 소속 이 아무개 경사(54) 등 5명이 윤 아무개씨(57·서울 강남구 청담동·이하 윤여인) 부탁을 받고 하양과 하양의 이종사촌인 현직 판사 김씨를 여러 차례 미행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들 5명은 윤여인측으로부터 60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경찰 품위 손상 및 지시 명령 위반’ 혐의로 5월3일 전원이 파면 또는 해임되었고, 보안계 상급자인 경정과 경감급 간부 2명도 징계를 받았다. 법조계 안팎에서조차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이기에 경찰을 시켜 현직 판사까지 미행하느냐’며 논란이 일었다.




경찰 수사는 4월 들어 급류를 탔다. 수사를 전담하고 있는 경기도 광주경찰서(서장 이훈필)는 김○기씨(40)와 윤○신씨(41) 등 살인 용의자 2명의 신원을 확보해 수배했다. 그러나 이들은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각각 태국과 베트남으로 달아나버렸다. 경찰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인터폴에 공조 수사를 요청했지만 체포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경찰은 이에 앞서 지난 2월 용의자 김씨의 부탁을 받고 공기총을 구입해준 뒤 범행에 사용한 총을 되돌려받아 보관하고 있던 최 아무개(40·건축업)·곽 아무개(42·농수산물유통업) 씨도 구속했다. 달아난 주범 2명과 함께 승합차로 하양을 납치하려다 실패한 김 아무개씨(25·인천시 계양구)도 붙잡아 4월26일 함께 구속했다.


경찰이 발 빠르게 범인을 밝혀낸 것은 피해자 가족의 끈질긴 주장을 받아들여 ‘치정에 얽힌 살인’에서 ‘하양 집안에 대한 원한 관계’ 쪽으로 수사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광주경찰서는 이번 사건을 하양과 원한이 있는 제3자가 개입해 치밀하게 준비해 저질렀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양은 지름 5mm짜리 공기총 단탄(單彈)을 왼쪽 눈썹과 눈 사이, 왼쪽 귀 뒤, 그리고 뒤통수에 각각 2발씩 맞고 사망했다. 단탄은 산탄(散彈)과 달리 명중하면 즉사할 확률이 높다. 범인은 하양의 눈을 가린 채 근접 사격해 처음 발사한 2발로 절명시켜 놓고도 신중히 2발씩 같은 곳에 발사해 '확인 사살'하는 여유를 보였다. 청부 살인자가 아니면 하기 힘든 노련한 수법이었다.


경찰이 이번 사건을 사전에 모의한 치밀한 범죄라고 파악하는 이유는 또 있다. 주범인 김씨와 윤씨가 범죄를 저지른 뒤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지기도 전인 지난 4월 초 동남아시아로 도피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는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치안의 그물이 촘촘하지 못하다. 경찰들이 용의자를 발견하더라도 뇌물을 받고 모른 체하는 일도 적지 않다. 경찰은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국내 폭력조직이 이 사건에 관여했으며, 거액 도피 자금을 지원할 만한 확실한 인물이 뒤에 있다고 본다.


현재 경찰이 유력한 배후로 꼽고 있는 인물은 일부 언론에 ‘중년 부인 윤씨’로 알려진 윤여인이다. 윤여인은 베트남으로 달아난 주범 윤○신씨의 고모이다. 도피한 윤씨의 아버지(윤여인의 오빠)는 현재 베트남에서 봉제 가공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경찰은 윤씨가 일정한 직업 없이 베트남과 서울에 사는 윤여인 집을 오가며 생활해 왔다는 윤씨 친동생의 진술을 이미 확보했다.




윤씨의 친구이자 태국으로 도피한 김O기씨 역시 한때 윤씨 집안이 운영하던 부산의 ‘ㅁ나이트클럽’ 직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다. 운동선수 부럽지 않게 체격이 건장한 김씨는 지난해 10월 하양 아버지에게 ‘김기준’이라는 가명을 대며 사업을 핑계로 접근했었다. 김씨는 또 윤여인의 출생·성장지인 전라북도 정읍·군산과도 연고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변변한 직업이 없던 김씨가 사건 발생 5개월 전인 지난해 10월12일, 인천 지역 한 농협에 자기 이름으로 계좌를 개설해 현금 5천만원을 입금한 뒤 수시로 돈을 입출금한 사실을 확인했다. 김씨의 계좌에서 공기총을 대신 구입해준 곽 아무개씨에게 수백만원이 흘러간 사실도 밝혀냈다. 윤여인 계좌에서는 지난해 6월30일과 9월22일 각각 1억원씩이 어디론가로 빠져나갔다.


경찰은 또 달아난 윤씨의 핸드폰 통화 내역을 조사해 범행 현장인 하양의 집 주변과 시체가 발견된 검단산 인근에서 윤씨가 통화했던 흔적을 포착했다. 결국 사건 발생 2달여 만에 용의자는 윤씨와 김씨, 배후 인물은 윤여인 주변으로 좁혀진 셈이다.


경찰이 윤여인을 지목하기 전부터 숨진 하양 가족은 시종일관 윤여인을 배후 인물로 지목해 왔다. 하양의 아버지(56)는 “나는 윤씨가 범인이라고 확신한다”라고 주장했다(26쪽 인터뷰 기사 참조).


윤여인, 하양 미행하고 괴전화도 걸어


윤여인, 곧 윤씨는 하양의 이종사촌 오빠인 김판사의 장모이다. 윤여인은 김판사가 자신의 딸(26)과 결혼하기 전부터 하양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다고 의심했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지난해 두 집안의 송사(訟事) 자료는 하양 사건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난해 6월 하양 아버지는 사돈인 윤여인을 ‘명예훼손과 모욕죄’로 고소했다. 하양이 피살되기 1년 전이었던 지난해 3월29일의 다툼이 발단이었다.


김판사와 하양의 관계를 의심하던 윤씨가 “당신 딸이 3월26일 사위가 퇴근할 무렵에 사위 사무실 복도에서 나와 마주쳤다가 달아났다. 딸 단속을 잘하라”고 주장하면서 사태가 꼬이기 시작했다.


윤씨가 그동안 사람을 시켜 하양을 미행했을 뿐만 아니라 수십 차례 집으로 괴전화를 건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하씨 가족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3월29일 밤에 같은 서울 청담동 ‘ㅅ빌라’에 이웃해 살고 있는 윤씨와 김판사 집에 들이닥쳤다. 두 가정은 이날 윤여인의 집에서 크게 다툼을 벌여 끝내 화해할 수 없는 앙숙이 되고 말았다.


윤씨는 지난해 7월 검찰 조사에서 ‘하양을 5∼6회 정도 미행하고 4∼5회 전화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하양을 김판사의 사무실 복도에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는 주장도 끝내 굽히지 않았다.
김판사 역시 참고인 진술을 통해 “사촌동생이 (내 사무실에) 찾아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주장해 장모인 윤씨를 옹호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하양 아버지는 “윤씨가 딸을 김판사 사무실에서 목격했다는 그 시각에 딸과 아내, 나 모두가 집에 함께 있었다. 윤씨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하씨의 고소장에는 ‘피고소인의 행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고소인의 딸의 신변에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과 위협감을 감당할 수 없어…. 위험 요소를 사전에 예방해야겠다는 절실한 심정에서 고소하게 되었다’는 부분이 있다. 마치 하양의 비극적인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섬뜩한 대목이다.


지난해 법조계 주변에서만 은밀하게 알려진 고소 사건에 대해 법원은 윤여인의 명예훼손과 모욕 혐의가 인정되지만 두 집안이 ‘사돈 관계’임을 고려해 윤씨를 ‘기소유예’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하씨 가족은 대신 그해 8월 윤여인이 하양 주변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접근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서울지법 민사부는 10월23일 하씨의 신청을 받아들여 ‘윤씨가 하양에게 접근하거나 전화를 해서는 안되고 미행해서도 안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양 가족은 하씨의 조카이자 현직 판사인 김씨가 ‘돈만 아는’ 부산의 재력가 집안과 결혼한 것이 결과적으로 하양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든 비극의 씨앗이었다고 주장한다.
김판사의 처가는 현재 부산의 한 향토 기업을 운영하는 수백억원대 재력가 집안이다. 그러나 윤여인의 남편인 ‘ㅇ제분’ 류 아무개 대표(55)는 지난해 10월25일, 주가 조작으로 2백억원대 부당 이득을 취한 혐의로 법정 구속되었다. 지역의 내로라 하는 인물들도 ‘ㅇ제분’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류씨 집안은 현재 고향이나 다름없는 부산에서 인심을 크게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윤씨는 살인 사건 연루 사실을 강력히 부인한 채 외부와 연락을 끊고 있다. 윤여인의 사위인 김판사는 “장모는 (살인을 사주할 만한)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럴 만한 담력도 없는 분이다”라고 주장했다. 김판사에 따르면, 장모 윤씨는 약간의 결벽증만 있을 뿐 지극히 평범한 성격이어서 오히려 하양 가족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주장이다. 김판사는 또 “사촌의 죽음에 대해 나도 충격이 크다. 하지만 지난해 소송과 사촌동생 피살 사건은 무관하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경찰은 윤여인이 지난해 하씨 가족과의 송사에 패하자 헌법소원을 낼 정도로 집착했던 데 주목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하씨와 민사 소송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윤여인 남편이 구속되어 집안이 풍비박산 났기 때문에 하양에게 더욱 큰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범죄심리학을 연구하는 한 교수는 “윤여인이 문제를 해결해 왔던 방식, 곧 과거 행적이나 행동 패턴을 추적해 보면 사건의 단서를 포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경찰 “청부 살해 증거 나오는 대로 윤여인 소환”


그러나 윤여인이 ‘청부 살인’까지 감행했다고 보기에는 동기가 약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윤여인이 하양 집안과 원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납치범들이 윤여인과 흥정(협상)을 벌이다 여의치 않자 화가 나서 잔인하게 살해한 뒤 도피했을 개연성도 있다. 또 지금까지의 수사와 달리 전혀 엉뚱한 곳에서 사건의 단서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


그만큼 하양 피살 사건은 현재 경찰에게도 난감한 과제이다. 사건을 전담하고 있는 광주경찰서 형사계장 황영풍 경위는 “윤씨가 청부 살해를 지시했다는 직접 증거를 확보하는 대로 소환해 조사하겠다”라고 밝혔다.
지난 4월4일, 하양 가족은 숨진 하양의 스물 두 번째 생일을 맞아 하양의 유골을 묻은 성남 모란공원과 서울의 비구니 사찰 봉은사를 찾아 하양을 추모하며 눈물을 뿌렸다.


같은 날, 부산지법 형사2부(부장판사 김진수)는 윤여인의 남편인 류피고인에 대한 항소심 재판에서 ‘주가 조작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며 류씨에게 징역 2년에 벌금 20억원을 선고했다.
장안의 화제를 몰고 온 하양 피살 사건 수사는 이제 반환점을 돌아 사건의 실체를 향해 근접해 가는 중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