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다리 국적’ 카멜레온 인생 2만5천명
  • 정희상·고제규 기자 (hsshung@sisapress.com)
  • 승인 2002.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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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게 미국 국적을 쥐어주기 위한 ‘원정 출산’과 함께 국적 포기자도 해마다 늘고 있다.
회사원 강성진씨(32·서울 이촌동)는 7월21일 임신한 아내 김지영씨(29)와 함께 괌행 비행기에 올랐다. 겉으로는 여행사로부터 4박5일짜리 괌 PIC 골드 여행권을 사서 떠난 여름 휴가지만 실제로는 원정 출산 여행이다. 아내 김씨의 출산 예정일이 아직 달포 가량 남았지만 괌 현지 M병원에서 유도 분만을 통해 일찍 낳으려는 계획을 이미 세워두었다. 미국령인 괌에서 출산할 경우 신생아는 미국 시민권자가 된다. 괌은 비자가 있어야 입국이 가능한 미국 본토와 달리 관광객을 위해 15일간 무비자로 입국을 허가하고 있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원정 출산을 하려고 여행사와 현지 병원 브로커에게 2천3백만원을 썼다는 강씨는 “처음에는 강남의 원정 출산 전문 알선 여행사를 통해 로스앤젤레스 병원에서 출산하려다가 미국 정부가 테러 예방 대책으로 지난 4월부터 본토 관광 비자 기간을 6개월에서 1개월로 단축하는 바람에 괌으로 행선지를 바꿨다”라고 말했다. 막대한 돈을 들여 원정 출산을 하는 이유에 대해 강씨 부부는 자녀가 한국의 입시 지옥에서 시달리지 않도록 하려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말한다.


장 상 총리서리 아들의 미국 국적 문제가 논란이 된 상황에서도 태어날 자녀에게 미국 국적을 얻어주기 위해 해외로 빠져나가는 젊은 부부의 행렬은 끊이지 않는다. 강씨의 말처럼 지난 봄 미국 정부가 관광 비자 기간을 6개월에서 1개월로 단축한 이후 미국 이민국의 감시를 피한 원정 출산 행선지는 괌과 사이판 등지의 미국 속령으로 바뀌었다. 괌 현지 여행사의 한 관계자는 “관광을 왔다가 갑자기 출산을 하고 가겠다며 여행 일정을 변경하는 한국 여성이 한 해에 30여명에 달한다”라고 전했다. 그는 아시아에서 유독 한국 여성만 애를 낳으러 괌까지 온다며 씁쓸해 했다.


법무부 법무과에 따르면, 현재 한국과 미국 국적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이중국적자는 2만5천여명. 주로 22세 미만 학생이 대부분이다. 국내법은 원칙적으로 이중 국적을 불허하지만 1998년 개정된 국적법에 따라 만 22세까지는 이중 국적이 허용된다. 결과적으로 태어날 때 미국 시민권을 얻은 사람은 만 22세까지는 이중 국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원정 출산이 봇물을 이루는 것이다. 한국 여성의 원정 출산은 미국에서도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5월 말 미국의 일간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원정 출산을 위해 미국을 찾는 한국 임신부가 한 해 평균 5천여 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왜 외국 국적에 몸 달아 하는가


1960~1980년대만 해도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이던 이중 국적을 중산층까지 차지하겠다고 법석인 이유는 주로 교육 문제 때문이다. 이중국적자가 되면 미국의 어느 학교에나 자유롭게 입학할 수 있다. 공립 학교 중에는 등록금 50% 이상을 면제해주는 곳이 많다. 이중국적자는 국내 외국인학교에도 자유로이 입학할 수 있다. 현재 60여 개 외국인학교의 한국인 재학생 상당수는 미국 ‘원정 베이비’들이다.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만 22세까지는 이중 국적을 보유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미국 시민 자격으로 당당하게 국내에서 초중고 외국인학교를 다니는 것이다. 가수 ㄱ·ㅈ 씨와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 자녀 가운데 그런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세계화 조류 속에서 너나없이 자녀 조기 교육 열병에 걸린 한국에서 신생아 때부터 미국시민권을 얻는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미국 시민권자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특별 대접도 부모가 자녀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다. 우선 미국 시민권자는 전쟁이 날 경우 미국 정부의 최우선 보호 대상이다. 1976년 이른바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미루나무를 베던 미군 장교들을 북한군이 달려들어 도끼로 살해해 전쟁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자,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 방송(AFKN)을 통해 한국에 체류 중인 미국 시민은 용산 미8군 기지로 속히 모이라고 공지했다. 그러자 삽시간에 몰려든 미국 시민권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한국인 이중국적자들이었다.


그 후로 한반도에서 전면 전쟁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미국 시민권자는 유사시 미국 정부의 보호 대상 1순위이다. 20여 년간 이중 국적을 유지하다가 지난해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서울에 살고 있는 김현성씨(25)는 “주한 미국대사관으로부터 전시 보호정책과 피신 안내 요령을 담은 우편물을 주기적으로 받아보고 있다”라고 밝혔다.


미국에서 향유할 수 있는 각종 제도들도 이중 국적을 가지고 싶게 만든다. 출입국 자유라든지 각종 사회보장 제도, 그리고 미국 내 각급학교 교육 지원과 미국 내 경제 활동의 자유 등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이중국적자 중 많은 수가 한·미 양국에서 유리한 권리만 누리려 할 뿐 당연히 져야 할 의무는 외면한다는 점이다. 병역 기피가 대표적이다. 정부가 사실상 이중 국적을 불허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동안 고위 공직자들의 이중 국적과 그로 인한 병역 기피 시비가 그칠 날이 없었다.


현정권에서는 장 상 총리서리와 송 자 전 교육부장관이 시비에 휘말렸다. 결국 송장관은 이 문제로 24일 만에 장관 직에서 물러났다.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도 손녀딸 원정 출산 의혹에 시달렸다. 이후보의 친형인 회정씨는 이중 국적을 유지하다가 비난을 받자 아예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말았다.


주로 공직자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망신을 당하는 까닭은 이들 가운데 이중국적자가 많기도 하거니와 국민이 이들에게 들이대는 도덕적 잣대가 그만큼 매서워졌기 때문이다.


정계·관계·학계에 이중 국적 자녀 수두룩




장 상 총리서리의 아들처럼 미국 국적으로 병역 의무를 모면한 자녀를 둔 현역 국회의원도 적지 않다. <시사저널> 조사에 따르면 유재건·김경재·허운나(민주당)·임진출·박원홍·조웅규(한나라당) 의원의 자녀들이 그런 사례에 속한다.


유재건 의원은 1968년 미국으로 건너가 변호사로 활동하다 두 아들을 두었다. 모두 미국에서 태어나 출생지주의에 따라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김경재 의원과 박원홍 의원도 현지에서 낳은 아들이 시민권을 받았다. 김경재 의원은 1972년 8월 유학차 도미했으나 여권이 취소되어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망명 동안 김의원은 장녀 김지아(28) 장남 김필립 (25) 차녀 김조희(23) 씨를 모두 미국에서 얻었다.

이들은 모두 미국 국적만 취득해 현재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노사모를 룸펜이라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른 박원홍 의원의 두 자녀도 미국 시민권을 받아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장남 박희종씨(33)와 딸 박희원씨(31)는 미국에서 태어나 역시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유재건 의원의 두 아들도 마찬가지다. 조웅규 의원의 아들 조수황씨(33)도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임진출 의원은 남편이 재일 동포여서 아들이 병역 의무가 없다. 허운나 의원 역시 유학 때 장남 전성호씨(26)를 낳아 전씨는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현재 전씨는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다.


최근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한 삼미그룹 부회장 출신 웨이터 서상록씨는 본인이 이중 국적을 유지하다 1997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자녀들은 현재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정치권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이중 국적은 뜨거운 감자다. 교수 대부분이 유학파인 데다, 유학파 대부분은 또한 미국파다. 미국 유학 시절 미국에서 태어난 교수 자녀들은 출생지주의 원칙에 따라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된다. 미국 유학파가 학계를 주름잡는 현실에서 교수 자녀 가운데 이중국적자는 일일이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대학 총장만 놓고 보더라도 ㅇ대·ㅅ대·ㅎ대·ㄱ대 총장의 자녀 가운데 1명 이상은 미국 국적을 가졌거나 또는 이중국적자다. 이기준 서울대 전 총장은 총장 선거 과정에서 아들 동주씨의 이중 국적 문제가 불거져 곤혹스러워했다. 그러자 아들 동주씨는 서른두 살 나이로 뒤늦게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다. 병역 기피 의혹을 씻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한국 국적 포기자 6백40여명




교수 자녀 가운데 이중국적자가 많은 것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부적절할 수도 있다. 학위를 따기 위해 오랫동안 유학 생활을 하다 보면 자녀 현지 출산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교수 가운데는 이중 국적을 이용해 자녀를 편법으로 국내 대학에 특례 입학시켜 말썽을 빚는다. 연세대 ㅊ 교수·고려대 ㅇ 교수·서울대 ㅇ 교수의 사례가 그렇다.


물론 공직에 오르기 전에 이중 국적을 정리한 경우도 있다. 한 지방 국립대 총장의 부인은 “어쩔수 없이 유학 기간에 미국에서 아이들을 낳았는데, 18세 때 모두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라고 말했다. “그때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던 아이가 지금 미국 유학 중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누구는 특혜를 이용할 줄 몰라서 그랬겠느냐”라며 최근 장 상 총리서리 자제의 국적 문제를 간접 비난했다.


장총리서리가 아들의 국적 문제로 곤경에 처했을 때 ‘그때는 내가 총리가 될 줄 몰랐다’고 변명한 것이 비슷한 처지인 대다수 부모의 심경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이 이처럼 해이하기 때문에 일반인들도 앞다투어 원정 출산에 나서는 것이다.


이중 국적 문제가 시비의 대상이 되자 최근에는 이중 국적을 유지하다가 병역 의무 연령이 되는 만 22세 이후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자로 남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1995년에 31명이던 국적 이탈자는 지난해 6백40여명으로 늘었다. 올해 들어서는 지난 6월까지 이중국적자 3백50여명이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


“한국군 입대해도 피해 없도록 제도 보완해야”


국내 이중국적자 2만5천여명 가운데 만 22세 이후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는 단연 병역 때문이다. 미국 이민법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법무법인 충정의 노영호 변호사(미국 변호사)는 상담 창구에 비친 실태를 이렇게 전했다. “이중 국적 자녀를 둔 부모 가운데 만 20세가 넘어 입대가 임박해서야 상담해오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 부모가 먼저 자녀에게 한국 국적을 포기하라고 권한다. 아들이 군대도 가고 한국에서 활동하기를 원하지만 한국군에 입대할 경우 미국 정부가 시민권을 박탈할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가수 유승준씨가 한국 국적을 포기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는 미국 이민법에 타국에서 정치 활동을 하거나 군에 입대하면 시민권을 박탈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는 설명을 들으면 대부분의 부모가 한국 국적을 포기시킨다고 말했다. 또 정부의 재외 동포 포용 정책으로 미국 시민권만 가져도 한국 내에서 활동하는 데 별 문제가 없어진 것도 쉽게 한국 국적을 포기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중국적자라고 해서 모두가 병역을 기피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 때문에 외국 국적을 가졌더라도, 병역 또는 대학 입시 등 보장된 특혜를 포기하고 의무를 다한 경우도 있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세계화 추세에 따라 신규 이중국적자가 매년 급증하고 있는 실정에서 모든 문제를 개개인의 양식에만 맡겨두기에는 국민적 위화감이 너무 크다. 이상국 변호사는 “세계화 조류로 보면 궁극적으로 이중 국적을 허용해야 하지만 현상황에서는 이중국적자가 한국에서 공익근무 등 공적 봉사활동을 한 뒤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제도적인 보완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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