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근 일병을 또 사살하려는가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2.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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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은 살해 은폐·조작을 입증하는 헌병대의 자살 조작서, 특조단조사 보고서, 대대장 진술서를 입수해 공개한다. 이 자료는 일부 언론의 오보와 군 당국의 ‘반발성 재조사’가 허일병을 또 죽이는 것임을 보여준다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의문사위)가 8월20일 허원근 일병 타살과 은폐·조작 경위를 중간 발표하자 국방부는 즉각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를 결성해 재조사하겠다고 밝혔다. 8월28일에는 1군 부사령관 정○○ 중장을 단장으로 하는 특조위 조직을 결성하고 민간 자문기구까지 포함한 합동 조사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이 사건 조사는 무려 다섯 번째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방부가 또다시 재조사를 천명하게 된 속을 들여다보면 그 기류는 후속 작업이라기보다는 반발에 가깝다. 사건이 발생한 1984년 4월부터 1999년까지 군 수사당국은 세 차례나 이 사건을 재수사했다. 매번 결론은 자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문사위가 그간의 군 수사 결과를 정면으로 뒤엎는 내용을 발표하자 국방부는 충격과 당혹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의문사위 결과를 수용하면 줄초상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의문사위의 발표 이후 국방부 주변에서는 `‘일부 부대원이 의문사위 조사 결과와 다른 말을 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이같은 반발 기류는 특조위 결성 발표로 수그러드는 듯 보였다.



의문사위 발표에 흠집 내려는 엉터리 보도들



그러나 공교롭게도 특조위 결성과 때맞추어 8월28일께부터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일부 부대원들의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의문사위 중간 조사 결과 발표에 흠집을 내는 각종 보도가 뒤따랐다. 의문사위가 국내 법의학자들의 `‘자살’ 소견을 감추었다든지, 황적준 교수를 중심으로 한 법의학회 회원 8명이 의문사위에 허일병 사건을 자살로 판정한 일치된 감정서를 보냈지만 외면했다는 따위 기사들이다. 그러나 <시사저널>이 추적한 결과 <조선일보>의 취재 과정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었고, 특히 ‘법의학 관련 `자살’ 감정 보도는 사실과 전혀 다른 오보였음이 밝혀졌다.



우선 의문사위에서 진술한 일부 부대원들이 딴소리를 한다는 <조선일보> 보도 내용은 부대원들에게 18년 동안 고통을 안겨준 이 사건의 특수성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의문사위에서 타살 현장 목격담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던 한 부대원은 “신변을 보호받고 있다고 믿었는데 기자가 갑자기 전화해 ‘다른 사람은 모른다는데 왜 당신만 그런 진술을 했느냐’ ‘혹시 당신이 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질문을 던져 불쾌하고 당황해서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둘러댔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부대원들도 은폐 공모자, 또는 제2·제3의 실탄을 발사한 공범 관계라는 혐의를 받을 수 있는 특수한 처지이다.



사실 부대원 대부분은 지난 18년간 두려움 속에서 지내왔다. 막강한 군 권력이었던 보안대·헌병대, 부대 상급자들의 지시와 특별 교육, 모진 고문으로 인해 이들에게 허일병 사건은 악몽이었던 셈이다. 의문사위도 이들을 조사한 중간 결과 발표를 통해 “군 수사당국의 재조사는 사실상 의문사를 더욱 굳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성의 없는 수사와 형식적인 수사로 일관된 군의 재조사 과정은 관련자들이 오히려 진실을 말하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다”라고 밝혔다.



의문사위측은 일부 부대원들이 의문사위 중간 결과 발표에 대해 딴소리를 한다는 보도가 잇따르자 9월2일 제2차 진상조사 중간 발표를 통해 허원근 일병이 살해되던 생생한 현장 순간과 은폐·조작 전모를 공개했다(48~49쪽 기사 참조)



고려대 황적준 교수의 입을 빌려 국내 법의학자들이 허일병 사건을 자살로 결론지었다는 보도 내용도 사실 무근인 것으로 밝혀졌다. 의문사위는 허일병 사건에 대해 대한법의학회에 감정을 의뢰한 일이 없었다. 황적준 교수는 이에 대해 “오래된 일이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조선일보> 보도 뒤에 의문사위 조사관에게서 연락이 와서 확인해보고 허원근 일병 사건에 감정서를 보낸 일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라고 말했다. 다만 법의학회가 처음에 군의문사 관련자 부검 자료 40여 건을 대략 검토한 결과 부검 소견만으로 수사 결론을 뒤집을 만한 사건은 없다는 논의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아울러 황교수는 허일병 사건에 대해서는 의문사위 감정소위원회에 자기가 직접 참여해 “이 사건은 법의학 감정으로는 해결할 사건이 아니다”라고 결론지은 바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조선일보>가 황교수를 인용해 ‘대한법의학회 회원 8명이 허원근 일병 사건에 대해 자살이라는 일치된 결론을 얻어 감정서를 의문사위에 보냈기 때문에 그 자료가 있을 것이다’라는 요지로 보도한 데 대해 황교수는 “사실이 와전된 것이다. 기자들이 함부로 각색하는 바람에 무슨 말을 못하겠다”라고 말했다.



헌병대, 수사하기도 전에 자살로 보고



18년이 지난 허일병 사망 사건의 진상을 법의학만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헌병대가 만약 초동 수사 당시 부검 검시관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입하고 거기에 맞추어 달라고 요구했다면 그런 수사는 법의학자를 바보로 만드는 행위나 다름없다. 허일병 사건은 발생 초기부터 그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1984년 4월2일 사망한 허일병에 대한 부검은 4월4일 이루어졌다. 당시 헌병대는 수사를 시작하기 전인 4월5일 주요 사건 보고서를 상부에 올렸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이 문건의 제목은 ‘자살 중간보고’였다. 주요 내용은 시종 허일병을 ‘자살자’로 묘사하고, 종합 판단을 자살로 내렸으며, 부검 군의관의 감정이 나오는 대로 자살로 종결하겠다는 보고였다. 사실상 초동부터 자살로 단정하고, 부검 군의관을 통해 끝내버리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취재진이 당시 부검 군의관을 수소문해 연락한 결과 이런 정황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허일병의 시신을 최초로 부검한 사람은 박 아무개 군의관(현재 건국대 법의학실 교수)이다. 공교롭게도 허일병 시체를 부검한 1984년 박군의관은 육군헌병감실로부터 헌병감 표창을 받았다. 변사체 검시로 공로를 세웠다는 것이 수상 사유였다. 이에 대해 박교수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당시 군 기관에서 상을 나눠먹기 비슷하게 군의관에게도 하나씩 주다가 내 차례가 온 것이지 허일병 부검 건으로 받지는 않았다”라고 해명했다. 이어서 그는 당시 부검의로서 허일병 사건을 처리한 데 대해 어떤 특별한 느낌이 없었느냐고 묻자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군의관의 활동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허일병 사건 수사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정보는 헌병대가 갖고 있는 상태에서 부검도 헌병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부검의도 그렇지만 수사관은 직업에서 나오는 감이 있다. 이 사건도 바로 냄새가 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헌병대가 어떤 특수한 사정에 의해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 헌병대는 엉뚱한 데 책임을 떠넘기는 등 다른 소리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 검시 제도의 한계 때문에 수사에서 의사는 권한도 없고, 수사관의 들러리를 서는 격이어서 대부분의 법의학자들이 포기하며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당시 박군의관이 작성한 허일병 관련 부검 소견서에는 ‘자살’이나 ‘타살’을 언급한 대목은 없었다. 그러나 헌병대는 세 번째 총알이 관통한 머리 부위에도 생활반응이 있다는 소견서를 근거로 자살 결론을 내렸다. 양 가슴에 허일병이 스스로 M16 소총을 한발씩 쏘아보고 그래도 즉사하지 않으니까 다시 머리에 대고 스스로 세 번째 총알을 쏘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검 결과는 사실 타살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자살할 의지가 있었다면 심장이나 폐 등 치명적인 부위를 일부러 피해 총을 쏘았겠느냐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3자가 가슴을 향해 첫 발을 쏘았으나 빗나가 피해자가 의식만 잃은 채 숨이 붙어 있자 확인 사살 겸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다른 가슴과 머리에 밀착해 두 발을 더 쏘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는 얘기이다.



이와 관련해 의문사위는 총기 사고를 많이 다룬 해외 법의학자에게 지난해 이 사건 부검 기록 감정을 의뢰했다. 허일병 부검 기록 감정을 의뢰받은 저명한 한 재미 법의학자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감정 소견을 보내왔다. ‘자살·타살 여부를 시체 사진이나 부검 기록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것을 시도한다면 매우 경솔한 처사다. 시체 사진만 보고 하는 수사는 몹시 위험하다. 그렇게 하여 맺은 결론도 무의미한 것이다. 허일병 사건은 밀접 총창이다. 머리를 먼저 맞았다면 양 가슴은 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하기 위해 가슴에 쏘는 사람은 심장 부위를 쏜다. 허일병의 경우 탄환이 심장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가슴에 두 발을 먼저 쏜 후 머리에 그런 총창을 만들기는 힘들다는 것이 종합 소견이다.’



특조단, 타살 정황 알면서도 외면했나



결국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가 특조위를 꾸려 이 사건을 국내 민간 법의학자들에게 의지해 다시 ‘자살’ 결론을 유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국민 사기극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의문사위 조사로 타살이 확정되고, 비록 공소 시효는 지났지만 범행에 가담한 인물이 특정되어 나오는 시점에서 국방부로서는 은폐·조작 조사 결과를 넘겨받아 엄정하게 뒤처리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초동 수사 때 부대에서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은폐·조작했다는 증거는 헌병대 1차 수사 때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문제는 부대 지휘 계통의 은폐·조작 지시 전모를 밝혀내고 범인을 잡아내야 할 수사기관이 초동에 엉뚱한 화풀이를 했다는 사실이다. ‘자살 현장을 은폐해 수사를 방해했다’는 말도 안되는 혐의로 당시 중대장을 구속하는 선에서 사건을 무마하려 했던 것이다. 사건 직후 수사 방해 혐의로 처벌받은 중대장 김 아무개 대위는 구속 당시 진술서와 조서를 통해 시종일관 ‘부대원들에게 사건 발생 시간대와 허일병 시신에 대한 은폐·조작을 지시한 것은 대대장과 보안부대 관계자의 명령에 따른 행위였다’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당시 대대장 등 허일병 소속 부대 상급 지휘자는 헌병대로부터 별다른 조사도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세 차례나 이 사건을 수사한 군 당국은 정말 허일병 타살 정황을 몰랐던 것일까. 적어도 1999년 특조단은 허일병 사건의 진상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일 개연성이 높다는 점을 감지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중대장이 현장 은폐 지시자로 지목한 전 아무개 대대장(현역 육군 대령)은 1999년 국방부 특조단 조사에서 ‘사건 발생 초기부터 허일병이 중대장에게 사살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중대장 월북 사태를 막기 위해 그를 후방으로 전출시켰다’라고 진술했다. 취재진은 전대대장의 진술서와 국방부 특조단의 사건 조사 보고서를 입수했다(왼쪽 위 사진 참조).



허일병 아버지 “특조위 재조사 거부한다”



이런 특조단 수사 흐름대로라면 중대장이 범인으로 특정되는 것은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허일병 사건이 1999년 말 의문사위 손으로 넘어가면서 사건의 진상은 `‘타살’이되, 최초로 총을 발사한 범인과 사건을 은폐한 이들은 새로운 인물들임이 드러났다. 3년 전 허일병 소속 부대 대대장과 국방부 특조단이 타살 용의자로 암시했던 중대장은 1999년에 사망했다. 결국 의문사위가 새로운 용의자의 존재와 은폐·조작 실상을 중간 발표함으로써 1999년 특조단조차 용의자들에게 농락당했거나 진상을 왜곡하려 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기 위해 18년간 불철주야 뛰어온 허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는 최근 국방부가 다섯 번째 조사를 하겠다고 한 데 대해 “특조위 수사는 유족이 거부한다”라고 밝혔다. 허씨는 이어 “의문사위가 최종 진상을 발표한 뒤에도 군내 은폐 세력과 내통해 계속 진실을 호도하는 부대원이 있으면 유가협 부모들이 집으로 찾아가 농성을 벌이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 용서하겠지만 계속 은폐하려 든다면 국제법에 호소해서라도 반드시 법정에 세우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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