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미·일로 넘어갔다
  • 이창주 (세계한민족포럼 상임의장·국제정치학 박사) ()
  • 승인 2002.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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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격변 둘러싼 ‘북·러-미·일 파워 게임’ 향방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에서 최근 미국 특사의 평양 방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격변의 배경에는 러시아·중국·유럽연합을 아우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른바 3대 외교 정책이 있다.


미·일, 북·일 정상회담 전 현안 조율


특히 지난 8월20일부터 24일까지 이루어진 김정일 위원장의 러시아 극동지역 방문 및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 외교는 미국과 일본을 자극했다. 러시아의 한 고위 외교관은 8월 블라디보스토크 북·러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대미·대일 외교 정책이 조율되었고, 또한 이를 통해 북한을 국제적으로 확고히 지지하는 세력의 하나가 러시아임을 과시하는 효과가 연출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바로 이 점이 러시아의 북한 개혁 참여와 경협이라는 대외적 성과이자 김정일 위원장의 중요한 외교 전략이었다고 설명했다.

블라디미르 루킨 러시아 두마(하원) 부의장은 NTV(러시아의 대표적 민영 방송)와의 회견에서 북·일 평양선언은 북·러 간에 다져진 정상 외교가 영향을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외교의 핵심은 용외접미(用外接美), 다시 말해서 미국의 패권주의를 못마땅해 하는 국가들과 외교적 밀착 내지는 관계 변화를 이루어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무력화하고 명분을 상실케 한다는 것이다.


하워드 베이커 주일 미국 대사는 북·일 정상회담 합의 발표 직전(8월30일)까지 미국은 양국이 협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실제와는 전혀 다르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북한 관련 사항에 대해 미국과 긴밀한 공조 체제를 유지했다. 지난 2년간 공식·비공식 채널을 통해 대북 협상 진행 및 결과를 미국에 통보해 왔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8월28일 리처드 아미티지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도쿄에서 북·일 정상회담에 대해 자세한 브리핑을 받고 최종 준비 상황과 의제 및 쟁점을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보다 앞선 8월24일 비밀협상 대표 다나카 히토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방북한 사실도 미국에 사전 통보되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두 나라가 대북 카드 가이드라인을 사전에 조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일 정상회담은 양국 현안과 북·미 현안이 혼재한, 사실상의 3국 회담 모양새가 되었다.


실제로 회담의 중심 의제로 양국의 대미 관계를 염두에 둔 안보 군사 분야 이슈들이 다루어졌다. 다나카 히토시 국장의 비밀협상 가방에는 양보할 수 없는 두 가지 요구 사항이 있었다. 첫째는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사과와 규명이고, 둘째는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과 핵사찰 요구 수용이었다. 재론할 여지 없이 전자는 일본의 최대 대북 쟁점이고 후자는 미국의 초미 관심사이다. 다나카 히토시 국장은 상기 두 가지 요구를 북한이 받아들인다면 일본 정부가 100억 달러 상당의 대북 보상 경협 지원을 하고 북·미 관계 발전의 중재 역할을 하겠다는 기브 앤드 테이크 안을 제시했다. 그만큼 철저한 미·일 공조가 북·일 정상회담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국내 언론들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 결정을 도박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미·일 정부 및 전문가 집단 사이에 주요 쟁점과 현안에 대한 충분한 사전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것도 모자라 부시 미국 대통령은 10월 하순 개최되는 에이펙 정상회담 때 만나기로 되어 있는 고이즈미 총리를 평양 방문 불과 1주일 전에 초청해 북·일 정상회담에 대해 사전 협의를 했다. 워싱턴은 9월17일 평양에서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성급한 약속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미국 CNN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와 영국 BBC방송이 북·일 정상회담 직후 그 성과의 초점을 ‘북·미 대화 재개’로 부각한 것을 보면 미국이 얼마나 평양회담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미국 매파, ‘평양 결단’에 허 찔려


정작 회담이 진행되면서 미국도 놀라고 일본도 놀랐다. 김정일 위원장이 너무도 솔직하게 일본인 납치 전후 사정을 털어놓고 사과했기 때문이다. 유엔 대표부의 한 고위 외교관은 워싱턴의 매파는 평양회담이 삐걱거리기를 기대했고 평양은 이러한 분위기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평양 소식통에 의하면, 북한은 이번 북·일 정상회담 때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에 더 비중을 두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받는 규모는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여기에 연연하지 않고 미·일 관계의 오래된 숙제를 대담하게 해결해 양국의 적대 인식을 무력화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지속과 핵사찰 수용 의사가 공동선언 내용에 포함되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미·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그동안 북한 외교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던 벼랑끝 전술을 일단 접었다고 볼 수 있다.


국내외 언론 및 보수 세력은 북한이 과연 북·일 정상회담의 합의와 공동선언을 이행할 것인가에 의구심을 표시한다. 그러나 거꾸로 일본이 약속을 어길 수도 있다. 일본은 사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일본인 납치 진실 규명과 사과라는 일본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고이즈미 총리에게 실질적인 외교 성과를 안겨주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당연한 대북 보상과 경협에 조건을 달아 향후 진행이 순조롭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했다. 공식대로 일본의 보수 단체와 납치 가족들이 반발하고 이를 빌미로 보상 및 경협 협상을 유리하게 가져가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역시 대북 지원 규모·시기·방법 등에 개입하려고 한다.


미국 특사 방북이 중요 전환점 될 듯


이런 점에서 10월3일부터 이루어질 미국 특사의 평양 방문이 매우 중요하다. 특사 파견을 통해 미국은 일본 수교자금을 지렛대로 삼아 그동안 북·미 간에 쟁점이 되어온 핵·미사일·재래식 무기 등 3대 쟁점을 타결하려 할 것이다. 북·일 회담에서 비롯한 한반도 격변을 북·미 회담으로 마무리하려는 순서를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미국은 핵사찰이 이루어지기 전 일본의 대북 지원을 반대하고 있다).


문제는 10월로 예정된 수교 교섭이 예정대로 진행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성의와 구체적인 실행 프로그램을 일본측이 제시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미 미국 언론과 일본 언론을 통해 연불형태(spread the payments over years)를 제시한 일본은 실행 기점을 국내법을 근거로 수교 시점과 연계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자세를 누그러뜨리는 역할도 일본이 맡게 되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한·일 기본협정을 과거사 청산의 모델로 삼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자랑하던 철저한 식민지 잔재 청산 정신이 북·일 수교 과정에서 변질된다면 실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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