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상하이-신의주 ‘자본 실크로드’ 열린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2.10.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빈이 신의주 특구 장관으로 임명된 후 미국 당국자들 사이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의 배경과 자금 동원력이 만만치 않다고 밝혀졌기 때문이다.
신의주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신의주는 부산에서 시작한 경의선이 한반도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대륙으로 나가기 직전의 관문에 위치한 도시이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동북 3성의 물동량이 교차하는 물류의 거점이다. 신의주를 통과한 화물은 중국횡단철도(TC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타고 각각 유럽으로 향할 수 있다.


신의주는 또한 중국 경제 성장의 불꽃이 남부 연해의 홍콩·심천·상하이·주해 등을 타고 북상하다가 동북 3성과 두만강 연안의 북한 지역에서 점차 사그라지는데 그 불꽃을 재점화시킬 수 있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그 불꽃이 이어지면 동북아시아의 성장 벨트가 완성되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전격 방문하고 돌아올 때만 해도 미국은 느긋했다. 앞으로 북·일 수교회담을 뒤에서 통제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압력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미국이 태도를 바꾸었다. 9월26일 백악관이 북한에 특사를 파견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제임스 켈리 동아태차관보를 수석 대표로 약 20여 명의 대표단을 10월3일부터 5일까지 평양에 파견한다는 것이다. 미국 행정부의 갑작스런 특사 파견에 대해 9월26일자 <뉴욕 타임스>는 ‘대북 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무엇이 이처럼 ‘중대한 변화’를 일어나게 했을까. 고이즈미 방북 이후 북한이 또 한번 ‘사고’를 치기는 했다. 바로 신의주시를 특별행정구로 지정한 사실을 언론에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미국이 긴장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여태까지 공수표만 날리더니 이제 하는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북한측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신의주를 홍콩같이 개발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에 덧붙여,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인물로 네덜란드 국적의 화교 자본가 양빈(楊斌·39)이라는 인물을 임명한 것이다. 북한의 파격적인 조처에 대해 CNN·BBC 등 영미계 언론이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미국 “양빈, 50억 달러 끌어들일 능력 있다” 결론


처음에는 덤덤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미국 정보기관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양빈이 신의주 특별행정구 장관에 내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난 9월23일 워싱턴의 한반도 소식통은 “미국 정보기관들이 양빈에 대한 정보 수집을 서두르기 시작했다”라고 밝혔다. 미국 정보기관들의 관심은 양빈이라는 인물이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양빈의 능력을 점검하기 시작하면서 미국 당국자들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생각했던 것보다 그의 배경이 탄탄하다고 밝혀졌기 때문이다.





양빈은 국내에서도 단연 뉴스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중국 장쑤성 난징 출신으로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가 젊은 나이에 네덜란드로 유학해 거기서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1994년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서는 몇 년 안에 중국 제2의 갑부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언론들은 초기에는 양빈의 긍정적인 면을 많이 부각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주로 타이완이나 홍콩·중국 언론의 부정적인 기사들을 소개하는 쪽에 치중하는 느낌이다. 주가 조작, 토지 불법 개발, 탈세 혐의 등 그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집중 부각함으로써 신의주 특구의 앞날도 불투명한 것처럼 몰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미국 정보기관들이 오히려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양빈의 개인 재산 규모를 약 9억 달러로 평가했다. 지난해 7월 그가 소유한 어우야(歐亞) 농업공사가 홍콩 주식 시장에 상장될 당시의 재산 규모를 대체로 인정했다.
미국측의 관심은 개인 재산보다는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자본력에 쏠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 돈을 대기 힘든 상황이므로 앞으로 신의주 개발의 성패 여부는 결국 그의 자본 동원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한 평가에서 예상보다도 매우 후한 점수가 나왔다. 50억 달러 정도는 그가 동원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미국측이 긴장한 것이 바로 이 대목이라고 워싱턴의 정보 소식통은 지적했다. 그가 50억 달러 정도의 자본을 유치해 신의주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면 북한에 대한 미국의 입지가 앞으로 대폭 줄어들리라고 우려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에서 몇 가지 분야에서 절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 중 하나가 군사력이었는데, 북·러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그 의미를 상실했다. 그 다음이 경제적 압력인데 주로 한국과 일본의 북한 진출을 통제함으로써 그 힘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제3의 자본이 등장해 북한 경제 회생에 나선다면 미국이 난처해진다. “결국 시간을 늦출수록 미국의 입지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미국 대북 정책이 ‘중대한 변화’를 맞은 배경을 워싱턴의 한반도 소식통은 이같이 지적했다.





지멘스·레슬레 등 유럽계 기업 진출 점쳐


그렇다면 양빈이 동원하고자 하는 제3의 자본의 실체는 무엇인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최근 양빈과 신의주 특구에 대해 주변국들이 미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 정보기관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양빈은 주로 홍콩과 상하이에 진출한 유럽 자본을 끌어들일 계획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신의주를 홍콩-상하이의 연장선에서 개발할 것이며, 그 추진력은 이곳에 진출한 유럽 자본이라는 것이다. 미국측은 양빈이 이미 이들 자본과 구체적으로 접촉하고 협의해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워싱턴 주변에는 신의주에 진출하려고 몸을 풀기 시작한 유럽계 자본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거명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알스톰(군수회사), 스위스의 레슬레(식품회사), 독일의 지멘스·알리앙스(생명보험)·바이엘(제약회사) 등 단편적으로 거론되는 기업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특히 지멘스는 신의주 특구의 기본 설계를 담당할 것으로 알려졌고, 미국 기업 중 AT&T 역시 유럽과 공동으로 진출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한다.


과거 중국 개발의 진앙지는 홍콩이었다. 홍콩을 배경으로 해서 맨 처음 개발된 것이 심천이다. 상하이 푸동 지구 역시 그 출발은 홍콩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홍콩-상하이가 몇시간대면 왕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홍콩에 진출했던 유럽 기업들과 화교 자본이 상하이에 진출해 푸동 지구를 만들어 냈다. 유럽 기업들 중에 주로 독일계 기업들이 상하이로 많이 진출했고, 최근에는 프랑스 기업들도 경쟁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반면에 홍콩에는 아직도 영국계 기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결국 양빈의 계획은 홍콩에서 상하이로 옮겨간 유럽 자본을 다시 신의주로 끌어당김으로써 일종의 성장 벨트를 만들겠다는 구상인 것이다.





중국, 화교 자본 소외되자 불쾌감 표출


그런데 여기에서 중국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 중국은 당연히 중국 자본이 신의주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양빈과 북한 간의 협의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얘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신의주는 화교 자본이 개발을 주도한 중국과 달리 유럽 자본이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최근 중국측이 양빈에게 냉랭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의 단둥과 지척인 신의주가 유럽 자본의 안마당이 될지도 모르는 형국이 되자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중국 공산당 선전부가 중국 언론들에게 양빈 장관에 대해 긍정적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는 최근 국내 신문들의 보도이다. 중국 소식통을 인용한 9월26일자 보도에서 국내 언론들은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양빈에 대해 아직 긍정적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으며 그가 신의주 특구 장관을 맡은 데 대해 당혹감과 우려를 느끼고 있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축재 과정에서의 불법 토지 개발, 주가 조작, 탈세’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그런데 양빈이 그렇게 형편없는 인물이라면 왜 장쩌민 주석까지 나서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그를 추천했으며, 김위원장이 왜 그를 신의주 특구 장관으로까지 중용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힘들다.
물론 양빈과 그가 담당한 신의주 특별행정구 앞에는 험난한 숙제들이 남아 있다. 유럽 자본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견제를 헤쳐나가는 것이 가장 큰 숙제다. 우선 북·중 간에는 조만간 중국의 소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고위급 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신의주 특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중국을 배제한 것은 북한 특유의 등거리 협상 전술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중국의 몸을 달게 해서 더욱 많은 지원을 얻어내겠다는 포석이다. 중국 또한 앞으로 구성되는 신의주 특구 입법위원 등 힘있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중국쪽 사람들을 많이 심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 다음 문제가 바로 미국이다. 현재 미국 정보기관들이 양빈 특별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고 한다. 양빈이 관련된 미국계 기업이나 국제 자금망을 조사해 미국이 입김을 넣을 수 있는 여지를 찾아내느라 부심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북한에 대해 북·미 관계가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경우 유럽의 대북 협력도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