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허걱, 정부는 느긋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2.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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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설 놓고 진단 제각각…“사태 심각” “지나친 호들갑”
주식 시장이 연일 급등락하고 기업들이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하는 등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지만, 정부는 한국 경제가 위기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연간 6%대 성장세가 유지되는 등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거시 경제 지표들을 희망의 근거로 든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언론이나 학자들이 호들갑 떨며 위기설을 증폭시킨다고 비난한다. 전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은 지난 10월11일 열린 금융경영인 모임에서 “언론·학계의 잘못된 경제 상황 인식에 억장이 무너졌다”라고 말했다. 우리 경제의 기초가 튼튼하고 ‘거품’ 우려도 적은데 일부 비관론자들이 제2의 경제 위기나 디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을 말해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경제학자나 언론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국 경제가 위기에 빠진 것일까, 아니면 정부가 큰소리치는 것처럼 걱정할 단계가 아닌 것일까. 한국 경제에 대해 비관론과 낙관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까닭은 몇 가지 경제 지표나 외환 위기 이후 진행된 구조 조정 성과를 해석하는 시각 차에서 기인한다.






위기론자들 “내우외환 겹쳤다”



양쪽의 견해가 가장 첨예하게 마주치는 지점은 내수 경기와 수출 증가량 같은 경제 지표에 대한 해석이다. 한국 경제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 경제에 ‘내우외환’이 겹쳐 있다고 주장한다.
신영증권 리서치센터 장득수 부장은 최근 주가가 600선 아래로 급락했던 데에는 미국 증시 영향도 크지만(외환), 한국 경제의 두 축을 이루었던 내수 소비나 수출 모두 최근 들어 떨어지고 있기 때문(내우)이라고 분석한다.


올 1/4분기에 8.0 포인트까지 증가했던 최종소비지출증가율은 2/4분기부터 계속 떨어지고 있다(한국은행 통계). 또 산업자원부가 지난 10월10일 발표한 대형유통업체 매출 동향에 따르면, 올 1/4분기까지 두자릿수 증가율을 보이던 백화점 매출이 15개월 만에 처음으로 떨어졌다. 당초 20%대를 기대했던 수출 증가율 역시 9월 들어 12%대로 떨어졌다(오른쪽 표 참조).



하지만 낙관론을 펴는 정부는 다르게 해석한다. 정부 당국자들은 9월 수출 증가율이 떨어진 것은 추석이 끼어 조업일수가 적었기 때문이고, 1일 수출액은 오히려 늘고 있다고 주장한다. 소비가 둔해진 현상도 상반기에 과열되었던 것을 정부가 애써 떨어뜨린 결과일 뿐 위기 징표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양측의 시각은 인플레와 디플레 위험이 공존하는 현 경제 상황을 평가하는 데서도 엇갈린다. 지금 한국 경제는 부동산 시장 불안과 가계대출 급증세로 인플레가 우려되는 동시에 세계 경제 침체에 동반한 경기 침체(디플레) 위험을 함께 가지고 있다. 위기 상황을 염려하는 이들은 이런 극심한 ‘냉온탕 경기’에서는 정부가 꺼낼 수 있는 카드가 마땅치 않다고 본다.


서울대 국제금융연구센터 정덕구 소장은 한국 경제가 삼각 딜레마에 빠져 어떤 정책도 먹히지 않는 일본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부동산 과열 때문에 금리를 올리고 싶지만, 경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을까 봐 올리지 못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정소장은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정부 당국자도 ‘송장 만지고 살인 누명 쓸까 봐’ 새 정책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정경제부 박병원 국장은 “다른 나라들은 디플레를 걱정하지만 우리는 인플레를 걱정할 정도로 경제가 살아 있다”라고 주장했다. 불안감을 부추기는 비관적인 발언을 해서는 안된다는 공무원 규정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고, 세계 경제가 더 나빠지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정부가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은 편이라고 덧붙였다. 예컨대, 부동산 경기가 과열 양상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아파트값만 오르기 때문에 금리가 아닌 다른 미시적인 정책으로도 진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구조 조정의 성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도 한국 경제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이 나뉜다. 위기론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이들은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이 미완성에 그쳤다고 평가한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10월 초 열린 서울대 국제금융연구센터 주최 국제학술대회에서 “거시 경제 지표가 좋아졌다고 해서 경제 체질이 더 강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거시 경제 지표는 단기 경기부양책 때문에 일시적으로 개선된 것이어서 지금이라도 구조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위기가 재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에 대해 정부는 긍정적인 거시 경제 지표를 근거로 들며 좋아졌다는 원론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가 솔직해져야 불안감 사라질 것”



최근 들어 주춤하고 있는 기업의 실적을 해석하는 데서도 양측의 의견은 엇갈린다. 대한투자신탁증권 기업분석팀 황명수 팀장은 “최근 기업 실적을 보면 매출액은 안 늘고 이익만 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장사를 잘해서 돈을 벌고 있다기보다는 환차익이나 비용 절감으로 이익률을 높이고 있다는 말이다. 반면 정부는 최근 기업들의 실적이 크게 늘지 않은 까닭은 세계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탓이지 한국 경제나 기업의 결함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라며 희망적으로 해석한다.



물론 낙관론을 펴는 정부도 한국 경제가 안전하지만은 않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해외 의존도가 워낙 높은 데다 세계 경제 흐름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라크 전쟁이 발발할 경우 국제 유가가 급등하면 국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30,32쪽 딸린 기사 참조).



하지만 정부는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도 장기전으로 이어진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보다는 단기전으로 끝날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는 듯하다. 정부 당국자들은 전쟁이 일어나도 1년 이상 장기화하지 않는 한 잠재성장률(5.5%) 정도의 성장은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주장을 편다.



이런 태도 때문에 위기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정부의 낙관적인 태도가 오히려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다고 비판한다. 한 애널리스트는 “갱이 무너지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쥐처럼 경기가 흐르는 방향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주가이다. 지금 주가가 저렇게 빠지는 것은 우리 경제에 대한 위험 신호인데, 정부는 너무 안이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라고 꼬집었다.



박원암 교수(홍익대·무역학)는 “정부는 괜찮다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지표를 놓고 무엇이 좋고 나쁜가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국민의 불안감을 더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경제는 아직 적색등이 켜진 상태가 아니다. 정부 당국자들 말대로 지나친 호들갑이 빨간불을 앞당길 수 있고, 위기론자들의 주장처럼 안이한 대책이 더 큰 화를 자초할 수도 있다. ‘위기론’을 오판이라고 몰아붙일 것인가, 아니면 예민한 쥐들의 경고로 활용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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