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경제 비상계엄’ 돌입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2.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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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앞길에 ‘노란 불’이 커졌다. 잇단 악재를 만나 경기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올 상반기에만 8조원 순익을 올린 삼성그룹 등 대기업들은 다투어 ‘긴축 경영’을 선언하고 나섰다
대기업들이 잇달아 비상 경계령을 발동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이 내년 한국 경제가 안팎의 위협 요인들로 말미암아 스태그플레이션(물가 상승 속 경기침체)에 빠지리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2의 외환 위기가 엄습하리라는 주장도 나온다. 경기에 민감한 기업들이 비상하게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




첫 포문을 연 것은 삼성그룹. 9월 말 삼성 구조조정본부(구조본)는 계열사들이 2003년 경영 계획을 짜는 데 기본 토대가 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비상한 관심을 모은 것은 삼성이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경영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재벌인 삼성의 ‘비상 경영’ 선언은 다른 그룹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삼성은 왜 이처럼 허리띠를 졸라매는 선택을 한 것일까? 그 배경을 두고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삼성이 올해 거둔 눈부신 실적을 보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의 올 상반기 경영 실적은 매출이 68조원, 세전 순익이 8조2천억원에 달했다. 이같은 순익은 지난해 상반기의 3조6천억원보다 무려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 연간 이익(7조2천억원)에 비해 1조원을 웃도는 실적을 반년 장사로 달성한 셈이다. 삼성 구조본은 이미 7월 중순 올해 그룹 전체의 연간 이익을 당초 9조원에서 15조원으로, 매출은 1백25조원에서 1백30조원대로 상향 조정한 바 있다.



한계 사업 정리하고 경비 절감 독려



삼성이 내년 한국 경제에 엄청난 해일이 들이쳐도 가장 안정적인 그룹이라는 사실은 삼성의 최대 현금 창출원인 삼성전자만 들여다보아도 알 수 있다. 삼성전자는 6월 말 현재 이미 현금 유동성이 6조원 규모를 넘어서면서 보유 현금이 차입금보다 많아졌다. 이토록 많은 현금을 투자 등에 쓰지 않고 그룹 재무팀이 움겨쥐고 있어 삼성은 그룹 안팎에서 비난에 직면할 정도였다. 삼성은 올해 한국 기업 사상 처음으로 연매출 천억 달러, 수익 100억 달러 시대를 열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처럼 초대형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때 삼성은 도리어 안으로 조이는 역선택을 한 것이다.



삼성이 위기 의식을 본격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한 때는 이건희 회장이 한 달여 일본 구상을 마치고 8월 중순 귀국한 후. 이회장은 9월18일 전자 부문 사장단회의를, 10월7일 금융 계열사 사장단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이회장이 강조한 것은 ‘준비하지 않는 기업에는 기회가 와도 소용없다’는 준비경영론이었다.



이미 이 때는 구조본이 삼성경제연구소가 8월 말께 제출한 내년도 경제 전망을 토대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전제로 한 지침을 만든 후였다. 구조본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사상 최고의 수익을 올릴 것이 확실하지만, 내년도 상황은 매우 불투명하다는 것이 최고 경영진의 인식이다. 두 차례의 사장단 회의는 이런 위기감에 따른 대책회의였다”라고 설명했다. 삼성의 또 다른 관계자는 “잘 나갈 때일수록 해이해지기 쉽다. 직원들이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다잡기 위한 성격도 짙었다”라고 말했다.





삼성은 내년도 주요 경제 지표 전망치를 삼성경제연구소가 내놓은 것보다 훨씬 보수적으로 설정했다. 내년도 세계 경제 성장률을 2.5%에서 1.8%로, 국내 성장률을 5.8%에서 4%로 끌어내리는 식이다(위 표 참조). 이같은 수치는 다른 연구소들의 전망치와 비교해도 가장 비관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다른 대기업들은 삼성이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위기 경영을 외치면 다른 기업들은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고 걱정한다. 이에 따라 경기를 더욱 냉각시킬 것이라며 삼성에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다. 하지만 이들도 내년 경제 상황이 불투명하다는 데는 공감한다. 종합주가지수 600선이 무너진 전조에서 보듯 나라 안팎의 위협 요인이 적지 않은 것이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개인 파산이 급증하면서 그에 따른 후폭풍에 직면할 공산이 커지고 있다. 올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권력 공백에 따른 정책 혼선을 야기할 가능성도 크다. 이런 ‘내우’ 못지 않게 ‘외환’도 경제를 강타할 조짐이다. 미국 경제가 더블 딥(이중 침체)에 빠질 공산이 커지고 있으며,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다면 당장 유가 폭등이라는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불투명한 내년 경기 상황은 기업들을 긴축으로 내몰고 있다. 삼성은 이미 모든 계열사에 경비를 10% 이상 줄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LG·SK·현대자동차 그룹도 경비를 얼마쯤 줄이라는 명시적인 지침을 내리지 않았을 뿐 허리띠를 졸라맬 것이 분명해 보인다. 대다수 기업들이 자연 감소분 내에서 내년도 인력을 채용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동 시장에 몰아칠 파장을 우려해 총원 동결로 표현하고 있지만, 총원 자체가 줄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구조 조정에 대한 압력도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삼성은 아예 상시 구조 조정 체제를 선언해 소리 없이 구조 조정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삼성전기 등은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 부문을 해외로 이전하거나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재무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사옥을 팔아치웠다. 삼성증권과 에스원은 인력을 줄이고 있다. 이미 구조본 재무팀은 계열사 별로 사업 부문마다 투자 대비 분기별 실적과 미래 성장 가능성을 점검하는 경영 진단에 들어갔다. 강도에 차이는 있지만, 주요 대기업들이 한계 사업이나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을 정리하는 사업 구조 재편 작업에 착수했다.



“차세대 성장 엔진 찾아 위기 벗어나자”



주요 대기업들은 설비 투자만큼은 다소 늘리거나 올해 수준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업 부문에 따라 명암이 크게 엇갈릴 전망이다. 대부분 기업들이 이른바 투자에 ‘선택과 집중’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9월10일 서울 여의도 트윈타워에서 열린 LG그룹 임원 세미나에서 구본무 회장이 미래를 위한 투자는 철저히 하되, 경기 상황을 고려해 투자를 세번 네번 재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좋은 예다.






LG는 내실과 현금 흐름 중시라는 경영 기조를 유지하면서 정보전자·소재·생명과학 분야 같은 미래 핵심 사업에 대한 투자는 늘릴 방침이다. SK도 내년 설비 투자 규모를 올해 수준(3조8천억원)에서 동결하거나 경영에 무리가 없는 선에서 소폭 늘릴 방침이다. SK 구조조정본부 이노종 전무는 “안정 속의 성장을 추구한다. 정보통신·에너지·화학·생명공학 분야의 연구 개발 투자는 최대한 늘리겠지만, 사업 확장은 최대한 자제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삼성뿐 아니라 지난 상반기에 사상 최대 흑자를 기록한 재벌들이 내년도 경영 계획을 보수적으로 짜고 있는 것에는 경영 실적의 ‘질’에 대한 불안감도 한몫 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기업들의 경쟁력이 높아졌다기보다 금리와 환율 덕분에 실적이 크게 좋아진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금리는 사상 최저 수준이며 환율 역시 외환 위기 전보다 달러당 5백원 이상 높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올 상반기 5백17개 상장 업체의 순이익은 17조7천억원에 달했지만, 1996년의 환율(달러당 7백83원)과 금리 수준(연 11.2%)을 적용해 순익을 계산해 보면 흑자는커녕 18조1천억원 적자를 본 것으로 분석되었다.



주요 대기업들이 미래 성장 엔진을 찾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은 이들의 불안감이 비단 내년 경기의 불투명성 때문만은 아님을 보여 준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해부터 실적에 연연하지 말고 5∼10년 후에도 기업을 먹여 살릴 사업이나 품목을 찾으라고 임직원을 독려하고 있다. 월드베스트 상품을 늘리라는 주문이 한 예다. 구본무 회장이 1등주의를 역설하고 있는 것도 2등 품목으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 의식을 드러낸다.


SK그룹이 3년 전부터 계열사별 기업 가치 제고 전략인 ‘TO BE’모델을 찾는 데 몸부림치고 있는 것도 현재의 그룹 사업 구조로는 승산이 적다는 위기 의식의 발로다. 한국은행의 한 관계자는 “기업들의 최대 고민은 한두 해의 경기 상황이 아니다. 반도체·정보통신·자동차라는 현재의 주력 수출 품목들의 바통을 이을 차세대 성장 엔진을 찾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다”라고 지적한다.
삼성이 주도한 대기업들의 ‘비상 경영’ ‘긴축 경영’바람은 내년도 경기 한파를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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