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 표심이 요동 친다
  • 부산.안철흥, 창원.나권일 기자 ()
  • 승인 2002.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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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만 5백78만명, 전체 유권자의 16.5%가 살고 있는 부산·울산·경남 지역이 올해 대통령 선거의 최대 격전지로 떠오르고 있다. 한나라당의 아성이었지만 경남 김해가 고향인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단일 후보로 떠오르면서 상황이 변한 것.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 나흘 만에 이회창·노무현 두 후보가 두번씩이나 방문하면서, ‘PK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빨리 선거 분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선제 공격은 ‘도전자’ 격인 노무현 후보가 했다. 11월27일 새벽 비행기로 부산에 도착한 그는 민주공원을 참배하고 부산역에서 첫 유세를 하는 것으로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행보는 유세 자체보다 ‘부산 사람’이라는 상징성을 확인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듯했다. 연설 첫마디가 이랬다. “사랑하는 부산시민 여러분, 저 왔습니다. 대통령 후보가 한번 더 돼서 부산에 왔습니다. 세 번 떨어졌지만, 여러분들께서 저를 키우셨습니다.”





노후보가 부산을 떠난 직후인 오전 10시. 부산시 초량동의 오피스텔 3층에 위치한 노무현 후보의 부산 사무실에는 “됐나, 됐다, 파이팅”을 외치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6월 지방 선거 이후 6개월 만에 판을 벌인 것인데, 분위기가 그때와 달리 활기로 넘쳤다. ‘정권 재창출’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이들 사이에서는 금기다. 사무실 명칭도 ‘노무현 후보 부산선거대책위원회’이고, 어깨띠의 문구도 ‘부산 사람 노무현’이 전부다. 민주당 색깔을 없애는 것, 나아가 ‘노무현당’을 만드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이를 위해 민주당 중앙선대위의 양대 축인 정치개혁추진위원회(본부장 신기남)와 국민참여운동본부 산하 백만서포터스사업단(단장 명계남)이 부산으로 아예 본부를 옮겼다. ‘DJ 차별화와 개혁성 강화’를 통해 이 지역의 자발적인 지지를 확보해 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신기남·임종석 의원이 상주하고, 추미애·정동영·송영길·천정배 의원은 반 상주할 계획이다. 명계남씨도 계속 머무를 작정이다. 문재인 선대본부장은 “현재 부산에서만 35% 지지율을 올리고 있다. 40% 목표를 45%로 상향 조정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한나라당 “노풍 심상치 않다” 바짝 긴장



노무현 후보가 부산을 떠난 지 5시간쯤 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울산행 비행기에 올랐다. 울산→부산→창원→대구→김천으로 이어지는 영남 공략을 위해서였다. 오후 4시 울산시 남구 삼산동 롯데백화점 앞 광장에서 첫 유세를 한 이후보는 정몽준 의원의 텃밭임을 의식한 듯 이렇게 외쳤다.


“정몽준 의원에게 지지를 보냈거나 방황하는 분은 이제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저 이회창을 지지해 주십시오.” 그는 이어 버스 편으로 부산으로 이동했다. 6시43분 부산 서면 천우장길 주차장터. 이후보는 공터를 가득 메운 2천명이 넘는 청중이 외치는 ‘대통령 이회창’ 연호를 들으며 연단에 올라섰다. 최병렬 박근혜 이연숙 이부영 서청원 김무성 등 한나라당 의원 20여명과 박찬종 전 의원, 김동길 교수가 그를 수행하고 있었다.


아침에 있었던 노무현 후보의 유세가 소수 정예에 의한 게릴라전 양상이었다면, 저녁의 이후보 유세는 사단 규모 병력이 조직적으로 작전을 펼치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보 또한 ‘6·25 때 부산에 피난 와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 1학년을 보냈다’면서 부산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런 다음 그는 김대중 대통령 흉내를 내면서 연설을 마무리했다. “DJ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하죠.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부산시민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이후보는 밤 9시쯤 부산대전철역 앞에서 두 번째 유세를 마치고, 근처 동래온천의 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선거운동 첫날, 부산의 정치 일정은 이렇게 끝났다.
첫날 유세 대결로만 보면 이후보가 승리한 듯 보였다. 청중 숫자나 열기에서 그랬다. 그러나 승부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이틀 만인 11월29일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2박3일 동안 포항→울산→부산→마산→진주→사천을 돌았다. 유세 현장 분위기도 시간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노후보 유세에 모인 청중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분위기는 역전 기미까지 보이고 있었다. 애초 선거운동 기간에 부산을 딱 한 번만 방문할 예정이었던 이회창 후보가 연신 일정을 변경하면서 이 지역을 찾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부인 한인옥씨가 올 예정이던 첫날 일정을 자신이 직접 오는 것으로 바꾸었고, 1박을 하며 대책회의까지 주재했으며, 나흘 뒤인 12월1일 또 내려왔다.



선거운동 직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은 별로 긴장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윤태경 부산시지부 사무부처장은 이제는 인물이 아니라 정당이 지역을 대표하는 시대라면서 승리를 낙관했다. 부산지역 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는 유흥수 의원도 “격전지는 무슨…”이라며 태연해 했다. 그러나 상황이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급변한 것.



11월28일 아침 부산 동래온천 지역의 한 호텔에서 있었던 한나라당 중앙·부산 선대위 합동 대책회의는 한나라당의 위기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회의에는 부산 출신 한나라당 의원 전원을 비롯한 국회의원 30여명, 부산시 의원 전원, 부산시 구의회 의장단과 중앙선대위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이 날 이후보는 인사말에서 “부산 선거가 매우 중하다”라고 말했고, 서청원 선대위원장은 “노무현 후보는 호남 90% 지지를 바탕으로 부산에서 승부를 걸고 있다. 방심해서는 안된다”라며 지역 정서에 호소할 것을 은근히 독려했다. 유흥수 위원장은 “노무현 후보의 강한 지역 정서 조장과 단일화 영향으로 다소 동요가 있다”라고 보고했다.



한나라당은 부산·경남에서 득표율 70%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비상 전략을 짜고 있다. 이 지역의 모든 지구당위원장이 상주 체제에 들어갔고, 지구당에 직능·청년·노동 등 분야 별로 ‘필승 책임제’를 할당했다. ‘부산상고 동문회 대책팀’과 젊은층을 겨냥한 사이버 홍보팀도 별도로 조직할 계획이다.



노무현, ‘부산 사람’ 이미지 심기 주력



나아가 이회창 후보는 최근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권철현 의원(부산 사상)을 불러 사흘은 서울에 있더라도 나머지 사흘은 부산에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김무성 미디어대책위원장(부산 남구)에게도 비슷한 지시를 했다. 당내에는 ‘김무성·정형근·김진재·권철현·김영일 의원 등 추진력 있는 PK 지역 의원들이 모두 중앙 직책을 맡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부산 민심은 진짜 변하고 있을까. 현지 언론인들은 노무현 후보가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부산방송 정경팀 김병근 차장의 말이다. “과거에는 ‘노무현은 빨갱이’라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제 ‘부산 사람’ 쪽으로 정서가 변하고 있다. 특히 당내 갈등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면서 3당 합당 뒤 YS가 후보를 쟁취해 냈던 모습을 연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부산시청을 출입하는 <부산일보>의 한 기자도 “한나라당 성향인 부동층이 노후보에게 간 것은 아니지만 중립으로 돌아선 것은 분명하다”라고 전했다. 노후보가 단일 후보로 확정된 직후 부산의 한 일간지는 ‘유권자층 급변’이라는 1면 제목을 달았다. 10월 말 부산지역 교수 1백30명의 노무현 지지 선언을 이끌어냈던 이행봉 교수(부산대·정외과)는 “단일화가 된 후 DJ 양자론이나 부패 정권 승계론보다 낡은 정치 청산론이 더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라면서 젊은층의 투표율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런 분위기는 일반 시민들에게서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인쇄업을 하는 이진철씨(60·부산진구 부전동)는 지난 5월 말 <시사저널>과 가진 전화 통화에서 “노무현은 DJ 꼭두각시 같아서 싫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그의 마음은 ‘반노’에서 ‘중립’으로 이동해 있었다. 11월28일 통화에서 그는 “민주당에서 계속 핍박받으면서도 살아나는 걸 보니 저력이 있구나 싶으면서 믿음이 간다”라며 노후보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아직 결정하지는 못한 상태. 그는 이제 누가 되든 상관없다고 했다. 5월 말 “나는 노무현을 지지하지만 친구들은 아닌 것 같다”라고 했던 김창신씨(43·의료기 제조업, 동래구 복천동)도 바람이 서서히 불고 있다며 ‘친구들의 동요’를 전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한나라당 지지’ 목소리가 더 많이 들린다. 부산대전철역 앞 이후보 유세 현장에서 만난 50대 남자는 “냉정하게 봐서 한나라당이 이긴다. 바람은 안 통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하철에서 이후보 일행을 만나 따라왔다면서 이후보와 박근혜 의원에게 사인을 받은 수첩을 꺼내 보였다. 개인택시 기사 백말룡씨(52)도 “이회창이 우세하지 않겠나. 노무현은 당이 민주당이라서 싫다”라고 했다. 그러나 백씨는 “노무현이 동교동계를 확실하게 물갈이할 수 있다면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다”라고 단서를 붙였다.



젊은층과 노동자 계층에서 변화 바람 뚜렷



두 후보가 박빙 접전을 예고하자 지역 상공인을 비롯한 여론 주도층의 분위기도 달라지고 있다. 강병중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은 1998년 부산시장 선거 때 안상영 당시 한나라당 후보 대신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기재 후보(현 민주당 의원)를 지지하면서 한나라당과 갈등을 빚었고, 지금까지 소원하다. 부산상의 부회장과 부산시의회 의장을 지낸 우병택 전 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 집행위원장도 아시안게임을 유치하고 치르면서 한나라당과 감정의 골이 패였다. 이런 상황을 지적하면서 한 지역 언론인은 부산 지역 주류 상공인들의 정서로 볼 때 노후보가 불리한 것이 아니라고 전했다.



노동계의 움직임도 변수다. 특히 한국노총 부산지역본부는 김진수 전 한국노총 부산지역본부 의장이 부산시의회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을 지내고, 지금도 윤성민 부산본부 사무국장이 비례대표 의원으로 가는 등 한나라당 지지세가 강했다. 1997년 한국노총이 DJ 지지를 선언할 때도 이 지역만은 중앙의 결정과 반대로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다. 그런데 최근 한국노총 부산본부 상임부의장 안준노씨가 휴직을 하면서까지 노무현 선대위의 노동특위 위원장을 맡는 등 변화 조짐이 일고 있다. 민주노총은 여전히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소속 80여 노조가 회원으로 가입한 ‘노동자를 위한 연대’에서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박화국씨(38)는 “노조 상층의 입장과는 별도로 일반 조합원들 사이에는 노무현 지지를 밝히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는 부산의 관청가나 한나라당 주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부산시 연제구 연산5동 부산시청 앞 식당에서 부산시청 사무관 ㄱ씨와 이 지역 한나라당 관계자 ㄴ씨의 대화에 끼었다. 두 사람의 화제도 대선과 노무현. 이들의 대화는 자신들의 문제에 이르자 점입가경으로 접어들었다. 한나라당 관계자 ㄴ씨가 “안시장은 탈당 안 하나”라고 말을 꺼내자 사무관 ㄱ씨가 이렇게 받았다. “탈당 안 해도 된다. 이번이 마지막(3연임)인데, 선거 끝나고 나서 줄서도 된다.


그리고 안시장은 지금까지 노후보와 각을 세운 적이 없다. 지난 선거 때도 노후보 비판 안 했다.” 한나라당 관계자 ㄴ씨는 당원들 중에도 속내를 숨기고 있는 이가 많은 것 같다면서, 국정 운영 능력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이 노후보의 과제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한나라당 주변의 이탈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11월30일 아침 권철현 의원의 지역구인 사상구 구의원 7명이 노후보를 찾아와 지지 의사를 밝힌 것.



부산이 점차 선거 열기에 휩싸이고 있는 것에 비하면, 경남은 아직 정중동 분위기이다. 11월28일 오전 10시30분, 창원시 대원동 창원종합운동장 안 ‘만남의 광장’은 이회창 후보의 연설을 들으려는 수천 인파로 술렁거렸다. 대회장은 한 무 남보원 현 철 등 연예인들이 분위기를 잡으면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개사한 “대통령 아무나 하나, 능력 있는 이회창이지”라는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일부 참석자들은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이회창 대통령’을 연호했다.



이곳에서 만난 초로의 택시 기사는 “경남은 원래 한나라당 지지가 많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회사원이라고 밝힌 한 30대 남성은 “(이후보가) 얼굴 차갑고 썩 맘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당은 도무지 싫다”라고 했다. 한인옥씨의 고향인 경남 산청에서 왔다는 40대 후반인 한 과수농은 “저번에는 이인제 찍었는데, 그 덕분에 민주당 좋은 일만 시켰다. 이번에는 이회창 찍겠다”라고 말했다.



경남 지역은 여전히 겉으로는 한나라당 지지 일색이다. 그러나 20∼30대 젊은층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변화 바람도 감지되고 있다. 노무현 후보 경남선대위 직능국장 최태희씨는 “요즘처럼 살맛 나는 세상은 처음이다”라고 했다. 평소 자신을 냉대했거나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한번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온다는 것. 창원지역 민주당 국민참여운동본부에서 만난 노사모 회원 박동주씨(34)도 “동창회나 또래 친구들 모임에서 이회창 후보 찍겠다는 사람들은 왕따당하는 추세이다”라며 고무되어 있었다.



부산·경남 민심은 최종적으로 누구를 선택할까. 노무현 후보는 당내 분란을 극복하고 단일 후보가 되면서 ‘부산 사람’ 대접을 받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반면 ‘노무현이 이기면 다시 DJ 정권이 연장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국 바람 대 조직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지역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급박한 국면인 만큼 바람의 지속성도 짧을 것이다. 노후보가 이곳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이벤트를 두세 차례 더 만든다면 이길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한나라당의 바닥 조직이 점차 힘을 발휘할 것이다.” 박형준 교수(동아대·사회학)의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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