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탈·착잡·분노…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3.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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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민심 르포/부산, 온냉기류 교차…대구·경북은 부산 탓하기도



부산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김기복씨(43)는 1995년 귀한 손님을 태운 적이 있다. 당시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노무현 당선자였다. “택시 기사들이 많이 도와줬는데 죄송하다”라며 노당선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김씨가 ‘한나라당 간판을 달았다면 내가 나가도 당신을 이겼을 것’이라고 하자 노당선자는 격앙되기도 했다고 한다. 택시 요금 4천7백원. 짧은 시간이었지만 김씨는 “참 존경받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김씨는 1번을 찍었다. 사람은 마음에 드는데 당과 불안한 이미지가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김씨는 노당선자가 당선된 것에 대해 불안해 하는 손님이 많다고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여. ‘부산 출신 새 대통령’에 거는 기대로 항도 부산은 술렁이고 있었다. 1월22일 부산 롯데백화점 앞에서 만난 회사원 이기영씨(38)는 “노당선자가 인수위 살림을 잘 하고 있다. 부산을 잘 아는 사람이어서 지역 경제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선 당시 롯데백화점 앞에서 열린 노무현 후보 유세에서 기자와 만난 이씨는 당과 경력을 볼 때 이회창씨가 낫다고 했었다.



“재검표로 당선자 바뀔 것” 유언비어 나돌아



선거 기간에 한나라당 캠프에서 활동했다는 성 아무개씨(41)도 “노당선자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주길 바란다. 한나라당 당직자와 지지자들도 이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2월 새 정부가 출범하면 노대통령에 대한 부산 시민들의 애정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입을 모으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노무현 당선자에 대한 거부감도 만만치 않았다. 1월21∼23일 사흘 동안 만난 부산·대구 시민 중 열에 다섯은 노당선자에 대한 견해를 묻자 ‘모르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자기가 지지한 후보가 낙선해 실망이 큰 듯한 모습들이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공직을 맡는 것이 부담이 된 부산시 정무부시장은 최근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부산 참여자치연대 노승조 기획부장은 “선거 후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실망은 대단했다. 당선 축하 모임을 하는 노사모들에게 대놓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대선을 치르며 지역 감정의 골도 깊어진 듯했다. 자갈치시장에서 조개를 파는 김영철씨는 “국회의원도 못 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노당선자 때문에 전라도 사람들이 설치는 것을 5년 더 봐야 한다는 것이 화난다”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손님은 “<6시 내 고향>에 전라도만 나오고, 텔레비전을 틀면 전라도 사투리만 나온다”라고 거들었다.



이런 기류는 40대 이상·기업가·고위 공직자 등 한나라당 지지 계층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부산지방경찰청의 한 간부는 “부산 공무원 사회에서는 노당선자가 편향되어 있다고 본다. 주변에는 운동권만 포진해 있어 공부만 한 대다수 공무원과는 코드가 맞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노당선자가 부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면 낙선할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선거 기간에 노무현 후보 보좌역으로 활동한 최인호씨는 대선 후 부산 시민의 30%가 텔레비전·신문을 회피하는 등 정서적 공황 상태에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재개표 때 당선자가 바뀔 것이다’ ‘불안 심리로 주가가 폭락할 것이다’ 따위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고 있다고 했다.



부산은 정치에서 눈을 돌리려 했지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산이 버린 새끼 사자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덥석 안아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까지처럼 내칠 수도 없다는 것이 고민의 실체였다.



“5년을 더 기다려야 하다니”



부산에 비해 대구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반 노무현 정서는 반 부산 정서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1월22일 경북대병원 앞 다방에서 만난 60대 건설업자는 부산 사람들이 줏대가 없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부산 사람들은 지난번에는 이인제에게 속더니 이번에는 노무현에게 속아 전라도 사람들에게 정권을 헌납하는 바보짓을 했다. 부산은 몰라도 대구에서는 아직 노무현이 대통령 아니다.”



대구·경북권에서 한나라당에 힘을 몰아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다. 총선에 나오겠다는 인사들이 한나라당에 줄을 서고 있었지만 민주당 주변에서는 그런 기색을 찾기 어려웠다. 한경옥 전 국민통합21 대구 동구지구당 여성부장은 “대구 사람 80%는 DJ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믿는다. 다음 선거에서는 경상도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라고 했다.



보수파들은 5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허탈해 했다. 대구의 대표적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서석구 변호사는 전화 인터뷰에서 “운동권의 도움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 운동권에 발목이 잡혀 있는 노무현씨가 김대중 대통령보다 더 위험하다. 지금처럼 안보와 민주주의가 도전받는 상황이 지속될 경우 노당선자는 국민적 저항에 부닥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아가 수검표 작업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노당선자가 총리를 내정한 것은 ‘경거망동’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재검표가 끝나고 노무현 당선이 확정된다면 그 때는 인정하겠느냐는 물음에 서변호사는 “이 정권에서 이미 거기까지 손을 써 두었다는 소리를 들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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