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개혁 ‘트로이 목마’ 강금실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3.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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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여성 변호사가 서열을 중시하는 법무부 수장 자리에 오르자 검찰 내부가 혼란에 휩싸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첫 내각에서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사법 개혁의 방향타를 잡은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검찰이 되길 바란다. 앞으로는 검사들이 권력을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된다.”(2월27일 장관 임명 발표 후 배경 설명에서).
“권력 기관은 국민을 위한 기관으로 거듭나야 하며 참여정부는 더 이상 권력 기관에 의존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다.”(3·1절 경축사).
강금실 법무부장관을 기용한 뒤 노무현 대통령은 이처럼 기회 있을 때마다 검찰 개혁에 대한 지원 사격을 퍼붓고 있다. 연일 계속되는 노대통령의 사법 개혁 의지 표명은 강장관 임명 과정에 강하게 반발했던 검찰 조직을 상대로 ‘더 이상 오판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도 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측근들에 따르면, 노대통령은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법조계를 우리 사회의 마지막 남은 기득권 집단으로 규정해 왔다고 한다. 따라서 집권하면 가장 먼저 사법 개혁부터 손대겠다고 공언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이 법조 출신이어서 가장 잘 아는 분야지만, 노대통령은 ‘피해자’이기도 했다. 사시 기수·출신 학교·나이 등 서열 구조를 너무 따지는 탓에 변방으로 밀려나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대통령은 검찰이 반발하는 강금실 법무부장관 카드를 꺼내들었다. 노무현 정부는 강금실 카드를 통해 법무부와 검찰을 분리한 뒤 장·단기 사법 개혁 과제를 수행한다는 복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다. 우선 사시 23회 출신 여성 장관이 법무부를 맡음으로써 전통적인 `법무부- 검찰 커넥션 구조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상징적 효과를 얻었다. 이제 남은 과정은 인사 쇄신과 제도 개편을 통한 검찰의 정치 중립화.



검찰은 자신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강법무장관이 내정되자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서울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자체적으로 개혁을 준비해온 검찰로서는 무시당했다는 정서가 강하다. 이런 분위기가 검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 2월부터 전국의 평검사들이 지역 별로 모임을 갖고 개혁안을 만들어 올렸고, 이를 대검이 공식 발표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최병모 전 특검·문재인 수석이 강력 천거



이 과정에서 다수 검사들은 노골적으로 강금실 장관 카드에 대한 반대 여론을 조성했고, 일부에서는 정보기관을 통해 각계 요로에 악의적인 음해성 투서를 뿌리는 데도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다. 검찰 내부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검찰이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을 두지 않았느냐는 의심을 낳기도 했다. 겉으로는 개혁 의지를 밝혔다지만 실제는 조직 이기주의에 급급해 시대에 뒤떨어지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노대통령이 수많은 비 검찰 출신 법조인 가운데서도 검찰의 강한 반발을 불사하면서까지 강금실 카드를 고수한 배경은 무엇일까. 청와대에서는 강금실 변호사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꼽는다. 서열과 남성 관료주의에 50년간 물들어온 검찰 조직을 상대로 노무현호의 개혁 팡파르를 울리는 데 강금실 변호사만한 적임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옷로비 사건 특검을 지휘하고, 그 자신이 유력한 장관 후보 물망에 올랐던 최병모 변호사가 장관 직을 고사한 채 후배인 강변호사를 천거했다. 여기에 문재인 민정수석이 적극 동조했다. 이어서 노무현 대통령이 강금실 변호사를 만나 자신이 구상한 사법 개혁 의지가 강금실 법무부장관 기용과 맞아떨어진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일찌감치(2월 초순) 움직일 수 없는 카드로 굳어진 것이다.



물론 강장관 카드가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강변호사의 순수한 성품을 잘 아는 법조계 주변에서 `거친 검찰로부터 큰 상처를 받지 않겠느냐며 만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6개월 안에 만신창이가 되어 법무부에서 나올 것이라는 악담도 나돌았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강장관도 취임 직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민변의 한 선배가 누군가 해야 할 일 아니냐면서 힘들어도 장관 직을 맡으라고 적극 권유했지만, 맡기까지는 너무 힘든 결단이 필요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사법 개혁에 대한 깊은 뜻을 알고 나서 결연하게 돕자고 결심했다는 것이다(44쪽 인터뷰 참조).






판사 시절 시위 학생 구속 영장 잇달아 기각



그러나 강장관 내정 소식이 알려진 이후 열흘 가까이 음해성 유언비어가 나돌고 검찰의 집단 반발 정서가 언론을 장식했다. 검찰 조직이 50년 관행으로 굳어진 법무부와 검찰의 서열주의·기수 존중 풍토가 무너지는 데 그만큼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이같은 통과 의례에 대해 강장관은 “장관 직을 맡기로 결심하고 대비하는 과정에서 그만한 반발은 예측하고 마음을 다잡고 있어서 반발 자체 때문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강금실 법무부장관은 카리스마적인 이력보다는 법조계 안팎에서 늘 ‘선하고 상식적인 법조인’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부모님 고향은 제주도이지만 강장관은 경기도에서 출생했다. 1975년 경기여고를 수석 졸업한 뒤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 탈춤반 활동을 하면서 암울한 시대 현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인 1981년 23회 사법고시(연수원 13기)에 합격했고, 1983년 9월 서울남부지방법원을 시작으로 14년간 판사 생활을 했다. 강장관은 1980년대 중반 판사 재직 시절 5공화국 독재에 항거하다 붙잡혀온 시위 학생들데 대한 구속 영장을 잇달아 기각하기도 했다. 또 1993년에는 사법부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판사 회의’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강장관은 “법조계 내의 한 신문에 칼럼을 썼다가 거절 당하면서 이 신문 구독 거부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 사법 파동으로 촉발되었다”라고 회고했다. 당시 사법 파동은 양인석·박시환·강금실 판사 등 사시 23회가 주축이 되었다.



강장관은 법조계에 입문하기 직전인 1980년 유신 시절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는 서울대 철학과 출신 김 아무개씨를 만나 4년여 열애한 끝에 1984년 결혼했다.
남편 김씨는 출판사업에 이어 여행업 등에 손을 대 제법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95년 사업이 부도 나면서 부부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남편의 빚을 떠안은 강변호사는 5년여를 버티다가 끝내 부채를 안고 합의 이혼에 이르는 아픔을 겪었다. 이번 장관 임명 과정에서 일부 언론이 강장관에게 위장 이혼 의혹이라는 음해성 유언비어를 보도한 것은 누군가 이러한 사정을 왜곡해 퍼뜨린 탓이었다.



1983년 이후 14년 동안 서울에서 가정법원·민사지방법원·형사지방법원·고등법원 판사를 두루 거친 강장관은 1996년 변호사를 개업했다. 2000년부터는 후배 변호사들과 뜻을 합쳐 벤처 전문 법무법인 지평의 대표 변호사로 활동해 왔다.






여성 최초 법무법인 대표 맡아 맹활약



변호사 재직 중에는 1997년 5월 검찰이 음란물로 기소한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저자 장정일씨에 대한 변론을 맡았다. 1999년에는 민혁당 사건 변론을 맡은 데 이어 11월에는 납북귀환어부 함주명씨를 고문한 혐의로 이근안 전 경감에 대한 고발을 주도하는 등 인권 변론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2000년 5월 민변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강장관의 역정에는 여성 최초라는 별명이 3개쯤 붙어다닌다. 서울지역 최초 여성 형사단독판사(1990년)와 여성 최초 법무법인 대표, 그리고 최초의 여성 출신 민변 집행부(부회장)이다. 이번에 법무부장관을 맡으면서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강장관은 이에 대해 “최초라는 말은 좀 과장됐다. 오랫동안 그 분야에서 여성이 나오지 않다가 내가 맡으니까 남들이 그렇게 부른 것같다”라며 겸손해 한다. 첫 여성 로펌 대표라는 말도 엄밀히 말하면 국제 거래를 다루는 종합 로펌으로 따질 때 최초이지 일반 법무법인 여성 대표는 그 전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강장관이 사회의 눈길을 집중적으로 받은 때는 법무법인 지평 대표를 맡고부터였다. 기존 주요 법무법인들의 내부 관행인 사시 기수별 서열화와 관료주의 타파를 기치로 내걸고 2000년에 출범한 지평이 단시일 내에 업계 10위권 로펌으로 도약한 것이다. 평등주의와 벤처 전문, 봉사활동 등 3대 활동 수칙을 기치로 내걸고 성공하자 법조계 안팎에서는 강금실 대표 변호사가 이끄는 지평이 ‘작지만 강한 법무 서비스 신화를 창조했다’며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런 활약 덕분에 강금실 변호사는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아시아 차세대 지도자 18인’ 가운데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대표, 강우석 영화 감독, 이상엽 한국과학기술원 대표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선정되기도 했다.
강장관은 지평 대표를 맡으면서 얻은 경험을 활용해 법무부를 이끌어가겠다고 말했다. 직급과 서열에 따른 권위적 분위기를 없애고 누구와든지 대화하고 자유분방하게 창의적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조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번 인사 과정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장관 직에 너무 권위와 무게를 두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신껏 일하고 자유롭게 의사를 표명하는 조직 문화가 중요한 것이다. 장관이라고 해서 군림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실제 강장관은 전임자들과 달리 취임 후 모든 직원들에게 존대말과 부탁하는 어법을 사용해 벌써부터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울러 호주제 폐지 방침을 밝히는 등 개혁 장관으로서 발빠른 행보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장관이 검찰의 호응을 받으며 개혁을 성사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높다. 취임 이후 검찰의 노골적인 불만은 사그라졌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자며 분을 삭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상황에서 강장관은 평검사의 건강성에 주목하고 있다. 법무부 인사에서도 직급 별로 평검사들을 적극 끌어들여 함께 가겠다는 것이다. 강장관은 “취임하자마자 평검사 회의 및 직급별 회의를 신설해 개혁 작업이 거기서 이뤄지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강장관은 검사들이 조만간 밀어붙이기를 당했다는 상심에서 벗어나 자신을 믿고 밀어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법조계 생리를 잘 아는 이들도 강장관과 같은 예측을 하고 있다. 초기의 어수선한 파동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의 강력한 신임을 받아 취임한 강금실 장관이 검찰을 무난히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다. 무엇보다도 강금실 장관은 명분 측면에서 검찰의 불만을 압도하고 있다. 장관 임명 직후 한 일간지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81%가 잘된 인사라고 답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다수 국민이 이제 검찰이 강장관과 손잡고 내부 개혁을 통해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평검사들 적극 끌어들여 함께 가겠다”



검찰 내에서도 강장관이 취임 후 검찰 개혁 과제를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이가 많다. 출세 지향적인 검사들은 조직 생리상 법무부 근무를 선망하는 추세다. 따라서 강장관이 법무부 인사를 통해 검찰 개혁의 주도적 방향을 얼마든지 잡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강금실 장관 임명 과정에서 검찰이 집단 반발하고 일부에서 음해성 투서까지 뿌린 행태를 보고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는 검사 출신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의 엘리트라고 자부하는 검찰에서 국민의 상식에서조차 벗어나는 마피아 조직 같은 비열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 자체가 개혁되어야 할 검찰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강장관 체제의 앞날이 반드시 순탄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검찰 개혁호를 흔드는 세력은 기존 서열주의 사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검찰 안팎의 보수 기득권층만이 아닐 수도 있다. 민변의 한 변호사는 “재야 시민·인권 단체의 조급증이 기득권층에 강장관을 거꾸러뜨릴 명분을 주지 않을까 큰 걱정이다”라고 우려했다. 당장 과도한 주문과 기대를 내걸어 한꺼번에 너무 많은 개혁을 이루라고 요구하는 대신 기대 수준을 조금 낮추고 조용히 지켜보아야 할 때라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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