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 실패사에 해법 있다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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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논쟁·정부기관 비협조 등 ‘닮은꼴’…“예산·인력 확보가 성공의 관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거나 통과한 과거사 관련 법안은 13개다. 동학혁명군(1894년) 명예회복에서부터 삼청교육(1980년) 피해자까지 100년을 아우른다. 관련 법안 통과는 피해자 가족들의 눈물 어린 싸움 때문에 가능했다. 4백일 동안 노숙 투쟁을 하고,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골을 발굴하며 진실의 한 가닥을 쫓아왔다.

지난 8월20일 서울 안국동 참여연대 느티나무 카페에 피해자 가족들이 모였다. 지역과 시대를 넘어 뜻을 함께한 단체가 3백29개에 달했다. 이들은 ‘과거 청산을 위한 민간공동위원회’ 구성을 합의했다. 진상 규명을 위한 큰 그림도 제시했다. 국회 밖에 독립적인 통합위원회를 설치하고, 강력한 조사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개별적인 민원 처리 방식이나, 한풀이 차원의 규명을 피해자 가족들 스스로 반대했다.

과거 청산에 주저했던 한나라당도 시민단체 제안에 긍정했다. 물론 이견도 있다. 한나라당은 친북과 용공 활동도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인민혁명당재건위(인혁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이영교씨는 “빨갱이로 몰아 죽음으로 내몬 게 박정희다. 이제 와서 또 빨갱이 사냥을 하자는 것이냐”라고 일침을 놓았다.

건국우선론과 경제우선론 ‘일맥상통’

과거 청산을 둘러싼 해법 찾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해법은 바로 과거사에 나와 있다. 실패한 과거 청산의 역사, 즉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주목되는 이유다. 그 시작부터 닮았다.

반민족행위특별법은 1948년 9월23일 공포되었는데 바로 다음날 서울운동장에서 반공국민대회가 열렸다. 형식은 반공 대회였지만, 내용은 반민법 반대 집회였다. ‘동족간 화기(화해)를 손상케 하는 반민법을 시정하고 공산 매국노를 소탕할 조문의 삽입을 요청한다.’ 친일파 청산을 이념 논쟁으로 몰아간 것이다. 언론도 동조했다. 나중에 반민특위에 체포된 일제 밀정 이종형은 자신이 경영하던 대한일보를 통해 ‘반민법은 망민법’이라고 몰아붙였다.

당시 반민특위 설치를 반대하는 중요한 논리는 건국우선론이었다. 지금의 경제우선론과 엇비슷하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위원은 건국부터 하고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당시 시기상조론이 ‘시간이 흘렀으니 덮자’는 요즘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고 지적했다.

친일파 청산을 주도한 인사에 대한 교묘한 흠집 내기도 반민특위 당시 거셌다. 친일파 청산을 주도했던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이 대표적 희생양이었다. 김부위원장은 일제 말 마포구의 총대였다. 총대는 지금으로 치면 통반장이었다. 총대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그만두었는데, 그 전력을 친일파 경찰이 확인하고 문제 삼았다. 김상돈 해임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해임안은 163 대 4로 부결되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는 물타기 인식이 확산되었다.

정부기관의 ‘비협조’는 반민특위에 이어 최근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당한 고전적인 수법이다. 반민특위가 반민족 행위 피의자 조사를 위해 경찰·세무서·군 등에 자료를 요청하면 돌아오는 답변은 ‘분명치 않음’ ‘곤란’ 등이었다. 물론 그때와 달리 지금은 대통령이 과거사 청산에 적극적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진상 규명 대상인 국정원이나 군이 자발적으로 과거사를 공개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과거사 청산 ‘큰 그림’은 마련된 상태

오는 9월3일 3백29개 관련 단체는 올바른 과거사 청산을 위한 1차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이 심포지엄에서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질 것이지만 전문가들은 이미 대략적인 그림을 그려둔 상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활동을 벌이고 있는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사견임을 전제로 통합위원회 산하에 3개 위원회를 두자고 제안했다. 친일·한국전쟁 민간인 희생·군사정권 시기로 나눌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의문사위 상임위원을 지낸 김희수 변호사도 공동위원회와 3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김변호사는 인력과 예산 지원을 강조했다. 김변호사는 “관건은 인력 확보다. 의문사위처럼 기껏 조사관 두세 명에게 20~30년 전 사건을 파헤치게 해서는 안된다”라면서, 주판알을 튀겨 과거사 문제를 접근하면 하지 말자는 해법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내년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기념이라도 하듯 송병준·이근택 등 을사5적급 후손들이 땅 찾기 소송을 벌이고 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인데, 그나마 민간단체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오는 10월 그 결실을 본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제1권을 발간한다. 일제하 친일 단체 5백여 개와 그 소속 명단이 전격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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