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표 폭발하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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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표가 폭발했다. 그녀는 점점 ‘육영수’에서 ‘박정희’가 되어가고 있다. 안팎의 공세에 직면한 박대표의 다음 선택은?
 
출렁다리였다. 중간쯤 가자 몸이 좌우로 기우뚱거릴 정도로 다리가 요동했다. 덩달아 마음도 흔들렸다. 기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난 8월28일 신정일 황토현문화연구소 소장을 따라 전남 곡성군 오곡면 송정마을과 고달면 고달마을을 연결하는 ‘두가교’(길이 168.3m)를 건너는 한나라당 의원들도 그랬다. 다음날 한나라당 연찬회는 두가교만큼이나 출렁였다. 주류건 비주류건, 초선이건 다선이건 구분이 없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연찬회에서 비주류의 비판을 정면으로 되받아치면서 한나라당의 당내 갈등은 전면으로 떠올랐다. 곧 정기국회가 시작되면 내부 갈등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지 모르지만 언제든 다시 폭발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두 차례 연이은 대선 패배를 딛고 새로운 보수 세력을 건설하겠다던 한나라당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여권이 던진 이슈에 끌려가면서 내부적으로는 점점 갈등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지난 8월29일 전남 구례 농협연수원에서 벌어진 한나라당 의원들의 토론회는 일찍부터 달아올랐다. ‘당명을 개정하자’는 유인물을 돌린 이규택 최고위원이 첫 번째 토론자로 나와 당명 개정은 대의명분이 있다며 주류측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했으나, 곧바로 김문수 의원이 반격에 나섰다.

“당명을 바꿀 이유가 없다. 박근혜 대표는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 빨리 결단을 내려라.” 박대표를 좋아하고 당의 유일한 희망이기에 드리는 말씀이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김의원의 문제 제기는 매서웠고 딱부러졌다. 의원들의 박수 소리도 제법 컸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박계동·고진화·이재오 의원 등 ‘국가발전전략연구회’(발전연) 트리오가 발언대에 서면서 정점에 달했다. 이들은 “정수장학회를 국가에 헌납하라”(박계동) “노무현 정권을 좌파라고 규정하는 이유가 뭔가”(고진회) “적극적으로 친일 문제를 털고 가야 한다”(이재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에는 열심히 메모를 하는 등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던 박대표는 의원들의 매운 비판이 계속되자 고개를 옆으로 돌리거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등 불쾌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비주류는 ‘총탄’을 박대표에게만 쏘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을 ‘좌파’라고 발제한 박세일 여의도연구소장은 ‘그렇게 규정하는 이유가 뭐냐’는 반박을 받았다. 한마디로 주류 세력은 이 날 총체적으로 난타당하며 정치력의 한계와 응집력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도드라진 것은 박대표의 강경 발언이었다. 상대방의 공격에 좀처럼 맞서지 않으면서 웃음으로 무력화하던 박대표가 더 이상 아니었다. “국민들은 정치권이 싸우는 모습을 제일 싫어한다”라고 강조했던 박대표는 불과 두 달 만에 당 소속 의원들과 치고받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녀의 이미지가 ‘육영수’에서 ‘박정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8월29일 연찬회에서 박대표는 자신에 대한 의원들의 비판이 이어지자 “이런 식으로 하면 정말 좌시할 수 없다”라며 비판 세력의 대표 격인 이재오 의원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내가 대표가 되면 탈당한다더니 왜 안 했냐”라고 응수한 것이다. 김문수 의원이 “상상 외의 충격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박대표의 감정적인 대응은 의원들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한나라당 내에는 박대표가 마음 속에 ‘칼’을 품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온화하고 인내심 있는 이미지 뒤에 강한 결기 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최근 원희룡 최고위원도 그것을 실감했다. 그는 “지난 8월26일 상임운영위원회에서 ‘한나라당이 과거사 문제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가, ‘한나라가 소극적으로 한 것 없지 않습니까?’라며 감정적으로 맞받는 박대표를 보고 놀랐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자가 “최근 들어 박대표의 언동을 보면 감정의 요철이 있는 것 같다”라고 하자 박대표는 “나처럼 잘 참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지만 잘못 알려진 것은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강하게 반문했다.

‘박근혜 회의론’이 확산되고 있는 와중에 잇달아 드러나고 있는 박대표의 강경한 태도가 어떤 효과를 거둘지는 아직 지켜보아야 한다. 한나라당 내에는 최근 여권의 과거사 공세, 박대표 리더십의 한계 등으로 인해 그녀가 결국 대권 후보까지 가기는 힘들 것 같다는 인식이 퍼져가고 있던 차였다. 특히 박대표가 ‘강탈 논란’이 있는 정수장학회 이사장 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박대표가 ‘아버지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보였기 때문이다.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 박대표는 “개인 문제다. 내게 맡겨 달라”고 했지만, 당내에서는 이회창 총재 시절의 악몽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이씨가 두 아들의 병역 문제와 호화 빌라 문제가 터졌을 때 개인적인 일이라며 뭉그적거리다가 결국 침몰했던 전철을 박대표가 정수장학회 문제 처리 과정에서 그대로 되밟고 있다는 것이다.

박대표가 능동적인 상황 돌파형이 아니라 ‘상황관리형 리더’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녀에 대한 회의론이 불거진 한 이유였다. 한 당직자는 “당이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라고 표현했다. 행정수도 이전이나 과거사 문제 등 여권이 던진 이슈에 끌려가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 정체성’이라는 이슈를 내놓기는 했으나 당내에서도 이견이 있을 정도로 힘이 실리지 않고 있다. 이슈의 중요성에 비해 ‘말’ 외에 후속 조처가 이루어진 것이 없을 정도로 사전 준비 또한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여전히 당 지지도는 30%를 넘지 못하고 젊은층에서는 민노당에도 뒤진다. 연찬회에 나온 서울대 총학생회장 홍상욱씨는 “한나라당은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인 이슈를 던지지 못하고 1970~1980년대 발전주의로 돌아가자는 느낌을 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대표 브레인인 박형준 의원은 “여론조사를 보면 박대표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가 여전히 60%가 넘는다. 박대표에 대한 여권의 공세가 먹혀들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의 딸이기도 하지만 육영수의 딸이고, 여성들이 싫어하지 않으며, 충청 지역 지지도가 생각보다 높은 특성이 있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의원은 “당이 이슈를 주도하지 못하고 있지만 차차 좋아질 것이다”라고 낙관했다.

이른바 ‘욕설 연극’(26쪽 참조)도 한나라당이 ‘천막 정신’을 잊은 오만함을 그대로 드러낸 사례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박대표는 당직자 인선을 앞두고 김문수 의원에게 당개혁특별위원장 자리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하는 등 당내에 자신의 지지 세력을 넓히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신보수 세력 태동론도 ‘꿈틀’

이처럼 총체적으로 박대표 체제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가운데 비주류의 대공세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앞날은 불투명성이 높아졌다. 일시적으로 봉합될지 몰라도 비주류가 조직적으로 공격했다는 점에서 양측의 갈등은 2007년 대선 구도와 맞물리면서 물밑에서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발전연 핵심인 이재오·홍준표 의원은 정치적으로 큰 꿈을 꾸는 사람들이고, 이미 박대표와 쌓인 감정의 골 또한 깊다.

주목되는 것은 정가 일각에서 ‘새로운 보수 세력 태동론’이 불거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시대 변화에 맞는 보수 세력으로 환골탈태하는 데 실패한다면 필연적으로 신보수 세력이 출현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연찬회에서 수도권 개혁파인 고진화 의원은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존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나라당 한 전직 의원은 “이대로 가면 합리적이고 건강한 새로운 보수 세력이 출현할 수밖에 없다”라고 예상했다.

박대표의 한계가 벌써 드러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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