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시대, 거리는 뜨거웠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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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 무슨 일이 있었나/임수경 방북·전교조 결성…과소비로 ‘흥청’
15년 전, 1989년의 거리는 뜨거웠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본격 타오르기 시작한 민주화 열기가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타오른 해였기 때문이다. 올림픽으로 유화 국면이던 학원 분위기는 5월 초에 있었던 부산 동의대 사태로 인해 급속히 냉각되었다.

파출소장이 학생들에게 카빈 총을 난사한 데 항의해 동의대 학생들은 사복 경찰을 붙잡아 학교 도서관에 붙들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경찰이 진압에 나서자 화염병으로 저항하다가 건물에 불을 내고 말았다. 이 사고로 경찰 7명이 순직하면서 노태우 정권은 공안 정국으로 분위기를 몰아갔다. 문재인 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이 학생측 대표 변호사를 맡았던 이 사건의 변호인단에는 노무현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즈음 NL(민족해방) 계열의 주사파가 주도권을 잡은 학생운동권에는 그 해 3월에 있었던 고 문익환 목사와 서경원 전 의원의 방북을 계기로 통일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이런 학원가의 통일 분위기에 방점을 찍은 것은 바로 ‘통일의 꽃’ 임수경의 방북이었다.

당시 외국어대 학생이던 임씨는 6월30일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입북했다.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씨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는 문규현 신부를 급히 북으로 보냈다. 둘은 8월15일 분단 이후 민간인으로는 처음 북에서 남으로 넘어왔다.
임종석 전대협 의장, 3백9일간 도피

임수경씨를 북한에 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당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임종석 의장(현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다. 임종석씨는 계속되는 경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신출귀몰하며 각종 시위와 집회를 이끌었는데, 이 때문에 그에게 ‘홍길동’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러나 임씨는 그 해 12월18일 오전 8시7분 경희대 학생회관에서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3백9일 간의 도피 행각을 끝냈다.

민주화 열기가 뜨겁기는 초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참교육 실천을 기치로 내세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교사 2만3천여 명의 발의로 1989년 5월28일 공식 설립되었다. 전남체육고등학교 교사인 윤영규씨가 초대 전교조 의장을 맡았다. 정부는 전교조 교사를 ‘공부 가르치기 싫어하는 선생, 정치 좋아하는 선생’이라고 매도하고 가혹하게 탄압했다. 탈퇴를 거부하는 전교조 교사 1천5백19명을 파면 또는 해임하고 42명을 구속했지만 전교조는 10년 후 완전 합법화했다.

1989년은 1990년대를 이끌어 갈 두 인물이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린 해이기도 하다. 그 중 한 사람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을 설립한 서경석 목사였다. 그는 경실련을 설립해 새로운 시민운동의 모형을 제시했다. 우지라면 파동과 백화점 사기 세일 등으로 시끄러웠던 당시 사회는 경실련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시민운동에 갈채를 보냈다.

톈안먼 사태에 울고, 베를린 장벽 붕괴에 환호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이회창 대법관이었다. 그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 있던 시절 치러진 동해시와 영등포 을구 재선거는 1노3김의 대리전 양상을 띠면서 불법 타락 선거로 치러졌다. 그는 여야 후보와 선거사무장을 검찰에 기소하고 민정당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 노태우 대통령에게 선거법 위반이라고 경고하는 등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공명 선거가 이루어지지 못한 데 대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한 그를 <시사저널>은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있었던 1989년은 세계사에서도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그 해 6월3일과 4일 이틀 동안, 톈안먼 앞에서 자유를 외치던 1천4백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목숨을 잃고 1만여 명이 부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9년의 국제 사회가 그리 우울했던 것만은 아니다. 키신저와 닉슨이 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하면서 미·중 관계가 개선되었고, 부시 미국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군축에 대한 이견을 좁혔다. 11월9일에는 수십 년 동안 동서독을 갈라놓았던 동서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다. <시사저널>은 동방정책을 펼친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를 초청해 북방정책을 펴고 있는 노태우 정권이 참고할 수 있도록 양쪽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국내외적으로 혼돈의 시기였지만 한국 사회는 과소비가 사회 문제로 등장할 만큼 호황의 정점에서 흥청거리고 있었다. 전국민 해외여행 자유화 조처로 외국에 나가는 사람이 늘었고, 외국 문화 유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UIP 직배 영화로 휘청거리던 한국 영화계는 직배 영화와 홍콩 영화에 완전히 기세가 눌려 있었다. <인디아나 존스> <레인맨>과 같은 직배 영화와 <첩혈쌍웅> <미라클> 따위 홍콩 영화가 극장가를 장악했다. 특히 저우룬파(周潤發), 왕쭈셴(王祖賢)과 같은 홍콩 배우들은 국내 음료 광고에도 등장하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국내 영화 중에서 히트한 작품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와 같은 학원 영화였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등 입시 경쟁에 시달리는 중고생의 고달픈 삶을 다룬 영화가 나와 학생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충무로는 젊은 영화인들의 진출을 거부하고 있었다. 서울영화집단·열린영화 등의 영화단체 소속 영화인들이 <오 꿈의 나라> <상계동 올림픽> 등 독립 영화를 제작했지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가요계는 변진섭과 이승환 등 발라드 가수들이 인기를 끌었다. 소방차와 박남정·김완선 등 댄스 가수도 등장했지만 아직 주도권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국민가수 조용필이 국내 활동을 접고 일본 미국 등 해외 활동에 주력하며 ‘나 홀로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동안 김흥국이 <아싸 호랑나비>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같은 민중 가수들이 주류로 진출하고 정태춘씨를 중심으로 노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그 영향은 그리 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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