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의 다음 선택은?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10.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행정특별시 건설 추진할 듯
헌재 판결 이후 세간의 관심사는 온통 노무현 대통령의 대응 카드에 쏠려 있다. 노대통령이 지금까지 행정수도 이전에 쏟아온 정성이나, 대선자금 수사, 재신임 정국에서 보여준 스타일로 볼 때 이번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묘한 기대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큰일이 터질 때마다 스스로 대안을 찾기보다 무작정 ‘청와대바라기’가 되는 여당은 물론이고, 노대통령을 만만하게 보았다가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 한나라당조차 ‘혹시나’ 하며 불안감을 내비치고 있다.

하지만 이해찬 총리가 대독한 시정연설은 한마디로 밋밋했다. 헌재 판결에 대해 노대통령은 “헌재 결정의 법적 효력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반 수용, 반 유감의 뜻을 밝혔다. 후속 대책에 대해서도 “국민 여론을 수렴해서 가능한 한 빨리 내놓겠다”라는 원론 수준의 답변에 그쳤다.

노대통령은 도대체 어떤 대안을 내놓으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일까.

헌재 판정 직후 여권 핵심에서는 국민투표나 개헌을 통한 정면돌파론이 상당한 힘을 얻었다. “수도는 반드시 서울이 아니어도 된다는 국민투표 결과가 나오면 ‘수도=서울’이라는 관습 헌법 논리가 깨져 헌법 개정을 안해도 되는 것 아니냐” “아예 대통령 중임제 같은 권력구조 개편까지 함께 걸어 개헌을 추진하자”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면돌파론은 일단 뒷전으로 밀린 기색이다. 여론의 흐름이나 시기로 볼 때 정치적으로 ‘올인’할 만큼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판단에서다. 헌재 결정 이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노대통령이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수도 이전을 포기하라는 응답이 더 많다. 이번 <시사저널> 조사에서도 ‘수도 이전 계획을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이 53.9%로 ‘수도 이전 계획을 재추진해야 한다’는 의견 44.1%보다 높게 나타났다. 국민투표를 실시할 경우 찬반을 묻는 질문에서는 정부·여당에 훨씬 더 불리한 결과가 나왔다. ‘수도 이전에 반대표를 던지겠다’가 63.0%로, ‘찬성표를 던지겠다’ 35.6%보다 두 배 가까이 많은 것이다.
청와대·국회 빼고 다 이전한다

대통령 중임제 같은 권력구조 개편안까지 걸어 개헌을 추진하는 것도 부담이 크다. 대통령 4년 중임제에 대한 국민 지지로만 보면 한번 싸움을 걸어볼 만하지만, 지금 권력구조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면 노대통령은 집권 2년차에 레임덕에 빠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노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결국 헌재 결정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수도 이전에 버금가는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밖에 없고, 현재까지 나온 대안 가운데서는 청와대와 국회만 빼고 행정 기능을 다 옮기는 ‘행정특별시’ 건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노대통령 입에서 이런 대안을 둘러싼 언급은 쉽게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이 여권 핵심부의 이구동성이다. 요 며칠 사이 노대통령이 ‘행정특별시’나 ‘행정도시’를 만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돈 데 대해서도 청와대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김종민 대변인은 “당장 대답을 내놓을 만큼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검토하겠다”라고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찬반 논쟁 무르익기 기다리고 있다”

노대통령의 한 참모는 이를 의도된 침묵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을 제출했을 때 한나라당이 의외로 빨리 통과시켜주는 바람에 수도 이전에 대한 국민 설득 작업이 제대로 안 되었던 측면이 있다.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찬반 논쟁이 좀더 무르익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대통령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른 청와대 참모는 “그래야 대안을 추진할 때도 힘이 생긴다”라고 말했다.

여권에서 행정특별시 얘기가 나오니까 한나라당에서 곧바로 ‘통일 외교 안보 관련 부서는 서울에 있어야 한다’ ‘공주 연기가 아니라 대전 유성 쪽에 과학기술도시를 만들자’는 식으로 재차 딴죽 걸기에 나서는데, 거기에 말려들면 노대통령의 구상은 물 건너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권의 전략은 당분간 왜 행정수도를 이전하려고 했는지, 이번 헌재 결정으로 어떤 정책들이 흐트러졌는지 등을 널리 홍보하는 쪽에 맞추어질 전망이다. 노대통령 역시 당장 대응책을 내놓기보다 수석·보좌관 회의, 국무회의 발언 등을 통해 홍보 대열에 동참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당초 목표는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노대통령과 충청권에 제2의 과천 같은 소규모 행정도시를 만드는 선에서 논의를 매듭짓고 싶은 한나라당 사이에 전쟁은 계속될 조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