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도시로 성난 민심 달래나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4.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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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특별법 제정 서둘러…재벌 팽창 부추기는 등 부작용 부를 수도
민간복합도시(기업 도시)가 ‘도마’에 올랐다. 신행정수도 건설 중단 이후 충청권에 대한 대안으로 민간복합도시가 거론되면서 여론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지난 10월23일 MBC가 실시한 전국 여론조사(코리아리서치)에서 민간복합도시는 충청권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안으로 꼽혔다(30.7%). 행정타운 건설(28.7%)이나 행정특별시 건설(10.9%)보다 높은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정부는 민간복합도시가 충청권에 대한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건설교통부 신도시기획단 서종대 국장은 “민간복합도시는 수도 이전과는 상관없이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 왔다”라고 잘라 말했다. 정부가 주장하는 대로 민간복합도시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0월 전경련이 ‘자족형 기업도시 건설안’을 발표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최근 행정수도 건설 중단 이후 민간복합도시에 대한 논의가 더욱 불붙기 시작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민간복합도시가 추진되면 삼성이 현재 건설 중인 아산시 탕정면 ‘크리스털 밸리’가 첫 번째 시범 도시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민간복합도시란 민간 기업이 주도해 산업·연구·관광·레저·업무 등의 주된 기능과 주거·교육·의료·문화 등의 자족적 복합 기능을 갖추도록 개발하는 도시이다. 일본의 도요타 시, 핀란드의 울루 시 등 다른 나라에도 비슷한 형태가 있다(32쪽 상자 기사 참조). 정부가 구상하는 민간복합도시는 형태에 따라 산업교역형·지식기반형·관광레저형·혁신거점형 네 가지로 나뉜다.

정부와 전경련이 구상하는 대로라면, 민간복합도시는 한국 경제에 상당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전경련은 5백만평 규모의 첨단산업형 기업도시를 건설하면 3년간 28조원의 투자가 일어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 경우 3년간 매년 GDP와 총취업자 수가 연 1~2%씩 증가한다.

정부나 기업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와 정치인들 처지에서 기업도시는 장밋빛 꿈을 안겨주는 매력적인 청사진이다. 침체한 경기를 살릴 방안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정부에게 기업도시만한 탈출구는 드물다. 생산 시설 국외 유출과 기업들의 투자 부족으로 인한 고용 문제, 부동산 규제 조처의 일환으로 유발된 건설 경기 침체 등 정부가 고민하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정부는 이 기업도시 건설 특별법 제정을 어느 법안보다 서두르고 있다. 정부 입법으로 할 경우 부처간 협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지난하고 거쳐야 할 절차도 복잡할 것이라고 판단한 정부는 이 법안을 이미 국회로 넘겼다. 국회에서는 이번 회기 중에 이 법을 통과시킬 예정이다. 국회의원들 처지에서도 이 법안 입법을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국회 내에는 열린우리당 강봉균 의원을 필두로 한 여야 의원들이 ‘기업도시 포럼’을 만들어 이 문제를 연구해 왔다. 게다가 의원들 처지에서는 지역구에 민간복합도시를 유치하는 것만큼 표밭 다지기에 효과적인 수단은 많지 않다. 기업도시 유치는 지난 17대 총선의 주요 지역개발 공약으로 이미 등장했다.

지방자치단체 역시 기업 도시는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다. 수조 원이 투자되는 기업도시 건설은 현금에 목마른 지방자치단체에 엄청난 당근이다. 이미 원주 군산 익산 진주 서귀포 등 20개가 넘는 지방자치단체들이 기업도시 건설을 유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전경련을 위시한 기업 집단 처지에서도 괜찮은 ‘미끼’로 이용할 수 있다. 기업도시 건설로 인한 손익 계산은 일부 투자 기업의 몫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특별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기업 집단 전체가 챙길 수 있는 이득은 적지 않다. 기업 집단은 기업도시특별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애를 먹이던 각종 규제를 일거에 해소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기업 집단을 대표한 전경련은 기업도시 제안서에 출자총액제한 예외나 노동통제 강화와 같은 해묵은 숙제들을 끼워넣었다.

정부·전경련 안 차이 많아 ‘쟁점’

전경련의 안과 정부의 안 사이에는 ‘노림수’ 차이에서 오는 몇 가지 쟁점들이 있다(표 참조). 기업의 돈으로 기업도시를 건설할지언정 기존 기업 관련 법 테두리를 통째로 흔들 생각이 없는 정부와, 투자한 만큼 회수하려는 기업 집단 사이에 힘 겨루기는 있을 수밖에 없다.

특별법 제정의 칼자루를 쥔 정부나 국회는 전경련의 요구를 100% 수용할 계획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강봉균 의원은 “국회에서 입법을 하더라도 건교부가 제시했던 안대로 갈 확률이 높다. 일부 기업들은 정부 안대로라면 투자할 의지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전경련은 기업 집단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민간복합도시 건설에 뛰어들 기업은 많지 않다고 주장한다. 전경련 기업도시팀 유재준 부장은 “기업 처지에서 보면 기업도시 건설은 모험이다. 기회보다 위험 요인이 더 많다면 누가 투자하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지난 5월 아산 탕정에 기업도시를 추진하려 했던 삼성전자는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정부가 들어주지 않자 계획을 축소했다.

특별법 제정까지는 정부나 국회가 칼자루를 쥔 셈이지만, 그 이후부터 칼자루를 휘두를 주체는 기업 집단이다. 정부나 국회가 구상하는 대로 법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기업들이 외면하면 민간복합도시 건설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법안을 마련하면서 전경련이나 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이 틈새를 이용해 열린우리당과는 다른 별도 법안을 제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당이 정부안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면, 한나라당은 전경련안에 가까운 법안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 당사자들의 견해를 아우른 기업도시가 추진된다고 해도 장밋빛 청사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단국대 조명래 교수는 “기업도시는 기업의 부침에 따라 지역 경제의 운명이 결정되고, 공공 투자가 공익보다는 기업의 이익에 맞추어 유도되기 쉽다는 함정을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자동차산업이 집적되어 있는 미국 디트로이트 시는 대량 생산 모델이 쇠퇴하면서 이른바 ‘녹슨 도시’로 전락했다. 또 지역 사회에 대한 기업의 지배를 유발할 가능성도 높다. 이 도시에서는 도요타 출신 직원이 의회에 진출하고, 도요타 및 하청 기업 종업원을 모체로 하는 지역 주민 조직이 결성되는 등 ‘도요타에 의한, 도요타를 위한, 도요타의 시’로 변했다.

특히 시민단체들은 전경련안대로 갈 경우 사회적으로 치러야 할 대가가 더욱 크다고 비판한다. 환경정의 박용신 정책국장은 “전경련안에서는 부동산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발 이익을 개발사업자가 전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도 기업에게 토지수용권을 전면 허용하는 것은 사적 재산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성격을 갖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기업도시가 일자리 창출을 매개로 한 재벌 규제 완화의 지렛대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비판한다. 세종대 변창흠 교수는 “기업도시는 지역 균형 발전과 수도권 주택문제 해결이라는 개혁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규제 완화를 통한 기업 환경 개선,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업에 개발특권 부여라는 극단적인 성장만능주의의 정책 수단이라는 측면도 있다”라고 규정했다.

열린우리당 기업도시 태스크포스 팀장을 맡은 이강래 의원은 “개발 이익을 어떻게 환수할 것인가에 대한 시민단체의 제안을 귀담아들을 만하다”고 말했다. 여러 의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속도에는 브레이크가 걸릴 수밖에 없다. ‘속도전’처럼 서두르는 기업도시 논란 와중에 이의원이나 시민단체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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