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파공작원 동원해 정치 테러 저질렀다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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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5·6공 정보사·보안사 의 ‘비밀 국내 공작 및 공작원 매수’ 증거·증언 최초 공개
5,6공 시절 보안사(현재는 기무사)와 정보사가 일부 북파공작원을 동원해 재야 인사와 야당 지도자들을 상대로 비밀 공작과 정치 테러를 자행했지만 몇몇 사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베일에 가려 있음이 드러났다. 또 16대 국회 이후 북파공작원 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그동안 은폐해온 정치 테러의 진상이 테러 가담자들의 입을 통해 국회에서 불거질 조짐을 보이자, 2000년 말 정보사가 이들에게 입막음조로 적게는 5백만원부터 많게는 3천만원씩 돈을 주어 무마한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정치 테러를 벌인 지 십수 년 만에 일부 테러 가담 북파공작원들에게 보낸 돈의 출처는 국정원이 대책비로 정보사 감찰부에 준 공작 자금이었다. <시사저널>은 최근 이같은 사실들을 입증하는 증거 서류와 증언, 그리고 정보사 감찰부 간부가 일부 정치 테러 가담자들에게 돈을 보낸 은행 증빙 서류 등을 확보했다.

“정보사령관이 1인당 2억씩 주겠다고 했다”

“2000년 가을 국정감사 당시 민주당 김성호 의원이 북파공작원 출신을 국회에 증인으로 부르려고 했다. 정보사는 이때 과거 정치 공작은 말하지 말아 달라는 조건으로 길기봉 감찰과장 명의로 나에게는 5백만원, 다른 한 선배에게 3천만원, 후배에게 5백만원을 통장에 넣어줬다.”

5, 6공 시절에 정보사의 지시로 야당과 재야 지도자의 집에 침입해 각종 문서를 훔치는 등 정치 공작에 가담했던 북파공작원(HID) 출신 이종일씨(52)는 최근 <시사저널>을 찾아 증거 서류를 내놓으며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는 자기를 포함해 일부 정치 공작 가담자들이 지난해 말 연명으로 정보사령관 앞으로 낸 탄원서를 공개했다. ‘우리는 5,6공 당시 정보사령관(이진삼) 감찰과장(이상범) 3처장(한진구) 등의 지휘 아래 운영되었던 정보사 소속 정치공작 테러 조직의 일원으로 채용되어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다수의 정치공작 작전에 투입되어 성과를 거두었으나 당시 약속했던 성과급은 현재까지 지급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령관님의 선처를 탄원하는 바입니다.’

이들은 당시 이진삼 정보사령관과 이상범 정보사 감찰과장 등이 정치 테러에 가담한 이씨 일행 4명에게 각각 2억원씩 지급하기로 약속하고서는 일을 성사시킨 후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탄원서 말미에는 자기들이 수행했다는 수많은 정치 테러 중 다음 다섯 가지를 적었다.
△1985년 11월15일, 상도동 김영삼 민추협공동의장 가택 잠입, 서류 탈취.

△1985년 12월24일, 우이동 문익환 목사 가택 잠입, 서류 탈취.

△1986년 5월, 신대방동 양순직 국회부의장 가택 잠입, 서류 절취.

△1986년 6월, 양순직 국회부의장 린치 사건(신대방동 자택 앞).

△1986년 7월, 민주당 김동주 의원 린치 사건(여의도 삼부아파트 앞).

이들 정치 테러 사건 중 김영삼 전 대통령 사저 침입과 양순직 국회부의장 린치 사건은 1993년 잠시 세간에 회자된 적이 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북파공작원 출신 김 아무개씨가 이 대목만 폭로해 뒤늦게 검찰 수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이진삼 전 정보사령관과 전 감찰과장 이상범 중령이 이 사건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형사 처벌을 받았다.

이종일씨는 김영삼씨 사저 침입 사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1985년 5월 정보사 이상범 중령이 같이 일해보자고 제의해 와서 북파공작원 선후배 사이인 주○○·김○○·정○○과 내가 한 조가 되어 정치 테러팀을 꾸렸다. 서초동 터미널 호텔에서 보름간 숙식을 함께 하며 정보사가 준 김영삼씨 집 약도와 주변 위치를 암기하고 10일간 현장을 정찰한 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침입했다. 정치자금을 댄 재계 인사 명단, 일본 방문 기자회견문, 녹음 테이프 2개를 훔쳐서 정보사 이상범 중령에게 전달했다.”
정보사는 이들이 정치 공작을 한 후 잠시 피해 있도록 도피 자금을 대거나 은신처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들이 몸을 피한 곳은 주로 정보사가 운영하는 안전가옥이었다.

김영삼씨 집을 턴 뒤 이씨는 정보사 이상범 중령으로부터 “양순직 국회부의장이 반정부 발언을 많이 하니 테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북파공작원 동료인 김○○씨와 한 조가 되어 움직였다. “우리 두 사람이 사흘간 양순직 국회부의장을 미행한 뒤에 내가 승용차를 가로막아 문을 열고, 양부총재를 형두가 끌어내 두드려 패서 이빨 두 개를 부러뜨렸다. 다른 두 사람은 망을 보았다.”

이 사건 뒤 야당의 문제 제기로 소란해지자 정보사는 행동대원 김○○씨에게 위장 양심선언을 하도록 교사했다고 한다. 신민당을 찾아가 ‘모르는 사람이 사주하기에 술김에 화가 나서 양부의장을 폭행했다’는 식으로 진술하라고 이른 것이다. 결국 위장 양심선언을 한 후 노량진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김씨와 이씨를 정보사 고위 간부들이 경찰서에 직접 찾아가 벌금 50만원을 대납해주고 빼냈다.

문익환 목사 집에서 서류를 절취했다는 사실은 테러 가담자들이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씨는 “김영삼씨 집을 턴 뒤 정보사에서는 2차 공작으로 우이동 문익환 목사 집을 털어오라고 했다. 들어가 보니 너무도 청렴하게 사는 집이어서 그런 짓을 한 것이 지금도 고인에게 죄송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지금까지 드러난 5, 6공 당시의 정보사 정치 테러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에 야당 정치인 집이나 재야단체 사무실, 재계 인사 집이 털렸다 하면 대부분 정보사의 ‘내수 공작’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가 작업을 한 곳 가운데는 대방동에 있던 두산식품의 한 고위 임원 집도 있다. 그 기업인이 당시 야당에 몰래 도움을 준다고 해서 정보사에서 털라고 지시했다. 몰래 들어가 서류를 절취해 나왔는데 우리가 훔친 서류를 토대로 그 기업에 대해 세무사찰을 했다고 들었다.”

“재야·야당 인사 상대로 수없이 공작했다”

이씨의 증언을 토대로 기자가 정치 테러에 가담한 북파공작원들을 수소문한 결과 그들 역시 당시 정치 테러는 매우 광범위하게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5공 당시 정보사 정치 테러를 주도한 팀장급 한 간부는 “지금 세상에 알려진 것은 YS 사저 절취 사건과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부장 테러(1988년 8월) 사건뿐이지만, 우리가 재야와 야당 정치인을 상대로 벌인 정치 공작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매 사건에 대해 정보사로부터 돈을 받고 차용증을 써준 서류를 갖고 있지만 아직은 공개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치 공작 팀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1980년대 중반부터 정보사는 산하에 북파공작원 중 현역과 예비역으로 각각 따로 구성한 정치 공작 팀을 여러 개 두고 있었다. 이들은 경쟁적으로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군사 정권은 북파 훈련 과정에서 문서를 절취하거나 요인 납치·암살 등 특수 기술을 익힌 이들을 뽑아 각종 정치 공작에 투입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남산대’가 예비역 북파공작원으로 구성된 대표적인 정치 공작 조직이었다는 점이 이번에 처음 드러났다. 6개월에 걸친 <시사저널>의 추적 결과 남산 기슭의 흰색 4층 건물에 사무실을 둔 남산대는 정보사 정치 공작의 산실이었다. 당시 정보사에서는 이상범 중령이 북파공작원 출신을 모아 정치 공작 팀의 실무를 총괄했다. 그는 4명 1조로 구성된 팀을 여럿 꾸려서 각종 정치 공작을 지시했다. 이들은 북파 공작과 구별해 대남 정치 공작을 ‘내수 공작’이라고 불렀다.

남산대에 소속되었던 한 정치 공작 조직원은 “남산대에서는 이효명 대령을 사장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우리가 정보사의 오더를 받아 담을 넘어 서류를 절취한 집이 김영삼 총재·문익환 목사·이 철 의원·양순직 국회부의장 등이었고, 김동주 의원과 양순직 부의장에 대해서는 테러까지 했다”라고 말했다.

이종일씨는 “이상범 중령 산하 남산대에는 우리 팀 외에 몇 팀이 더 있었는데 그 중에서 북파 훈련 동기들인 김○○와 나○○이 소속된 팀에서 ‘우리마당 사건’을 일으켰다. 이 철 의원 사무실도 우리 팀이 털려고 답사까지 했지만 옆 팀에서 털어버렸다”라고 말했다.

우리마당 사건은 정보사 남산대 ‘작품’

우리마당 사건은 1988년 8월17일 새벽에 발생한 재야 문화운동단체 사무실 습격 및 여학생 강간 사건이다. 서대문구 창천동에 있는 우리마당 사무실에 당시 괴한 4명이 습격해 잠자고 있던 최 아무개양을 강간하고 서류를 훔쳐 달아났다. 사건 직후 야당에는 이 사건을 정보사 우이동지대 박○○ 소령 휘하 2개 정치 공작팀 가운데 박○○ 대위 팀 소속 현역 요원들인 김○○ 중사·손○○ 중사·김○○ 중사·나○○ 하사가 저질렀다는 제보가 날아들었다.

야당이 이를 공개하며 수사를 요구하자 당시 군 당국은 그런 이름을 가진 현역 정보사 요원들은 없다면서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경찰 수사도 유야무야 끝나 이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다. 그런데 당시 우리마당 사건에 가담한 행동대원들은 현역 정보사 요원이 아니라 예비역 북파공작원들로 정보사 ‘남산대’ 이상범 중령 휘하 팀원들이었다는 증언이 이제야 나온 것이다.

그러면 북파공작원들을 동원해 각종 정치 공작을 주도하고 은폐한 장본인은 누구일까. 일단 5,6공 당시 정보사령관들은 그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진삼씨와 이진백씨 형제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5공 말기와 6공 초기 정보사령관을 지냈다. 이진삼 사령관 시절에 재야 단체 습격 및 김영삼 민추협 의장·양순직 국회부의장·김동주 의원 등에 대한 가택 침입과 테러 등이 집중 발생했다. 이진백 사령관은 현역 정보사 요원들에 의한 오홍근 부장 테러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두 형제는 물러난 후에도 군사 정권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진삼씨는 노태우 정부에서 체육청소년부장관을 지냈으며, 이진백씨는 역시 오홍근씨 테러 사건으로 물러난 뒤 곧바로 대한중석 사장을 맡았다.

보안사·안기부·경찰 ‘적극 협조’

과거 정보사 정치 테러 요원들을 추적 면담한 결과 정치 테러는 정보사 단독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계획 단계에서부터 보안사와 안기부, 경찰, 정보사가 유기적으로 개입하거나 묵인 방조했던 것이다. 1985년 김영삼씨 사저를 털었던 이들은 진입 당시 경찰이 정보사의 요청에 따라 경비 초소에서 철수해주고, 유사시에 대비해 앰뷸런스까지 대기시킨 상태에서 담을 넘었다고 증언했다. 또 양순직 국회부의장을 폭행한 뒤에는 이진삼 정보사령관이 직접 경찰서에 찾아가 조사받고 있던 가해자를 빼내고, 테러 가담자들이 배후를 불지 않았다며 ‘의리’를 높이 치하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대북 특수 공작이 주임무인 정보사가 단독으로 야당과 재야 등 민간인을 상대로 공작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5, 6공 당시 안기부와 보안사가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치 테러가 기승을 부리던 1985~1986년 안기부장은 장세동, 보안사령관은 이종구, 정보사령관은 이진삼이었다.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 선후배로 뭉쳐 있던 당시 이들 주요 정보기관 책임자들은 긴밀히 결탁해 북파공작원들을 국내 정치 공작에 끌어들였다.

이같은 사실은 1993년 당시 검찰 조사 때도 일부 확인된 바 있다. 당시 대검 공안부가 김영삼 전 대통령 사저 침투 사건을 조사한 결과 한진구 정보사 3처장(예비역 소장)이 보안사 박동준 정보처장(예비역 소장)을 만나보라는 이진삼 정보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김영삼 전 대통령 사저 습격과 양순직 부의장 폭행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안사가 표적을 선정하고 정보사가 행동대원을 뽑아 실행했던 것이다. 테러 활동 자금은 보안사가 냈다. 테러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이종구 전 국방부장관은 “테러 자금 9백만원 중 4백만원은 보안사 박동준 정보처장이 정보사 한진구 3처장을 통해 지원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안기부와의 공모 여부는 잘 모르겠다고 말을 흐렸다.

5공 시절 공권력의 민간인 상대 정치 공작에 안기부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시사저널>은 최근 국정원도 정보사 요원의 정치 공작 은폐와 무관하지 않다는 단서를 확보했다. 북파공작원을 동원한 정치 공작 실무 총책이었던 이상범 전 정보사 감찰과장은 2002년 의문사위원회가 실시한 학생운동 관련 대학생들 실종 사건에 대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2000년 말 정보사 감찰과가 이종일씨에게 보낸 5백만원은 정보사 감찰실의 아는 직원에게 이야기해 정보사 예산 중 안기부로부터 받은 대책비 가운데 남은 돈으로 부쳐준 것이다.”

물론 이상범씨는 돈의 성격에 대해 정치 공작 입막음용이 아니라 생활고 지원 명목이었다고 주장했다. 2000년 말이면 이들이 주요 정치 공작을 벌인 지 15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하지만 정보사가 느닷없이 안기부 예산으로 이들의 생활비를 대주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돈을 받은 이씨 등도 “우리들에게 국회에 가서 정치 테러를 떠들지 말아 달라고 입막음조로 준 돈이다”라고 밝혔다. 2000년 말 이런 식으로 정보사가 안기부 예산을 이용해 공작 요원들에게 생활비 지원 명목으로 보낸 돈은 기자가 확인한 액수만 4천만원에 이른다.

정보사는 요즘도 과거 각종 정치 공작과 테러 진상을 은폐하는 것은 물론 테러범들을 비호하고 있다는 의혹마저 사고 있다. 이미 불법 행위로 처벌받은 테러 가담 정보사 요원들을 대부분 복직시켰다는 점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1993년 구속된 테러 실무 총책 이상범 중령은 재판 결과 이등병으로 강등되었지만 군 상급심에서 바로 풀려나 중령으로 원직 복귀한 뒤 1995년 예편했다. 그는 이후로도 과거 북파공작원 출신 정치 공작 요원들을 관리하면서 정보사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정보사, 처벌받은 테러 책임자들 ‘중용’

또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부장을 테러했던 책임자들도 잠시 구속되었다가 줄줄이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테러 지시와 은폐 과정의 책임자급인 이규홍 준장과 권기대 준장 등은 원래의 계급이 회복되었고, 테러 팀을 이끈 박철수 소령과 안선호 대위 역시 비밀리에 정보사에 다시 특채되었다. 테러 현장 지휘자인 이들의 경우 현재 서기관급으로 승진해 정보사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대북 정보를 다루는 특수 기관이다 보니 정보 업무를 잘 아는 이들의 실력을 썩힐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의 공분을 산 범죄 행위로 처벌받은 테러 책임자들마저 다시 중용하는 정보사의 모습은 과거의 오욕을 씻고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겠다는 요즘 국방부의 공언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군이 진정 신뢰받는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5·6공 시절 북파공작원을 동원해 자행되고 지금까지 조직적 은폐 의혹을 사고 있는 수많은 정치 공작과 테러에 대해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라도 전면적인 재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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