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미디어 천하 제패하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r)
  • 승인 2004.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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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휴대전화는 ‘휴대전화를 넘어섰다’. 20년간 끊임없이 멀티미디어 기기로 변신을 거듭하더니, 금융·방송·집안 관리까지 일상의 모든 분야로 파고들어 ‘제2의 몸’ 기능을 하고 있다. 휴대전화가 이같은 ‘
그의 나이, 올해로 스물이다. 1984년 그가 이 땅에 갓 태어났을 때만 해도, 세상 사람들은 이 허약해 보이는 아이가 목숨이나 제대로 부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했다.

SK텔레콤 기술전략실 김민석 팀장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차량 전화(일명 카폰) 가입자를 관리할 목적으로 한국통신이 자회사인 한국이동통신서비스를 설립한 것이 1984년 3월29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직원들은 이 회사로 발령이 날까 봐 촉각을 곤두세웠다. 우수한 직원들은 당연히 한국통신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회사 안팎에는 ‘이동통신 같은 것이 과연 되겠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예상 외로 강한 생명력을 과시했다. 이 미운 오리 새끼가 불과 20년 뒤 세상을 지배할 제왕의 자리에 등극하리라고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땅에 이동통신 역사가 시작된 지 20년. 이제 이동통신 기기의 대명사인 휴대전화는 미디어의 최강자로 우뚝 서 있다. 더 이상 휴대전화를 변방의 촌뜨기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지난 20년간 휴대전화는 쉴새없이 진화하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천하를 제패할 야심을 키워 왔다.

‘휴대전화는 전화를 걸고 받을 때 쓰는 물건’이라는 고정 관념을 벗어던진 순간부터 정복의 신화는 시작되었다. 휴대전화는 음성뿐 아니라 문자·동영상 데이터를 자유자재로 주고받는 멀티 미디어 기기로서 진화를 거듭해 왔다(54~55쪽 상자 기사 참조).

2004년 말 현재, 그가 정복을 마쳤거나 정복을 진행 중인 분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본향인 전화 시장에서의 승부는 간단히 정리되었다. 2004년 10월 말 현재 이동전화 가입자 수는 3천6백만여 명. 유선 전화 가입자 수(2천2백만여 명)보다 1천4백만명 가량이 많다. 이동전화는 이미 1999년부터 유선 전화 보급률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2001년 등장한 컬러폰은 정복 전쟁의 막이 올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어 멀티 미디어 동영상 송수신 기능을 본격적으로 갖추게 된 휴대전화는 MP3·디지털 카메라·게임기 시장에 잇달아 도전장을 내밀었다. 카메라폰·MP3폰 같은 고기능 휴대전화가 속속 출현하자, 관련 시장을 지배하던 영주들은 새로운 패자가 자신들의 영토를 잠식해 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휴대전화는 전자 상거래 시장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무소불위 신용카드 또한 휴대전화 앞에서는 기세가 꺾였다. 한국광고단체연합회와 한국인터넷마케팅협회가 공동 주관한 ‘2004 KNP(Korean Netizen Profile) 조사’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물건을 사면서 결제 수단으로 휴대전화(49.3%)를 선택한 사람이 신용카드(42.5%)를 선택한 사람보다 6.8% 포인트 가량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상거래 시장도 빠르게 잠식

은행 창구나 현금인출기·폰뱅킹 대신 휴대전화를 이용하는 사람도 급증하고 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은행 거래가 가능한 모바일뱅킹 전용 휴대전화가 올 한 해 대량 보급되면서 이같은 현상은 더 심해졌다. 금융감독원 통계에 따르면, 지난 3/4분기 휴대전화를 통해 자금 이체가 이루어진 건수가 무려 8백만 건에 달한다(금액으로는 총 2조7천억원). 이는 2/4 분기에 비해 100.9% 늘어난 건수이다.

휴대전화는 최근 GPS(인공위성을 통한 위치 추적 시스템) 시장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차량에 장착하는 GPS와 휴대전화를 이용한 GPS, 어느 쪽이 더 나을지는 쓰는 사람 마음이겠지만 미래학자들은 휴대전화쪽 손을 들어준다. 텔레매틱스(미래형 교통 서비스) 실현에 휴대전화가 더 적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는 자동차를 넘어 집안 관리에까지 손을 뻗고 있다.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나 방배동 LG자이 아파트 주민들은 집 밖에서도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에어컨·세탁기를 가동할 수 있다. 휴대전화를 이용한 무선 원격 제어 서비스가 현실화한 덕분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휴대전화가 요즘 눈독 들이고 있는 신천지가 바로 방송이다. 요금이 비싼 편이어서 이용하는 사람이 적지만 휴대전화를 통해 텔레비전 뉴스나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에 더해 저렴한 위성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DMB) 서비스가 시작되면 휴대전화는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방송국’이 될 것이라고 업계는 전망한다.

“내일은 세상의 틀이 바뀔 거예요”라는 카피를 내건 한 이동통신 회사 광고는, 미디어의 제왕이 되고자 하는 휴대전화의 욕망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SK텔레콤 이혁수 마케팅연구팀장은 “우리는 백화(百貨)를 파는 회사를 지향한다”라고 말한다. 곧 음성 통신은 휴대전화가 제공할 수 있는 수많은 기능 중 하나일 뿐 궁극적으로 휴대전화가 지향하는 것은 생활에 밀착해 ‘내 손 안의 작은 세상’을 구현하는 ‘생활 미디어’이자, 나를 대신하는 ‘라이프 매니저’라는 것이다.

실제로 휴대전화는 ‘제2의 몸’ 혹은 ‘제2의 장기’로 불리며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다. 이제 사람들은, 특히 젊은 디지털 세대들은 더 이상 누군가를 기다리며 책이나 잡지를 읽지 않는다. 신문을 갖고 화장실에 가지도 않는다. 그 자리를 휴대전화가 차지했다. “음, 난데”로 시작하는 대화를 나누건, 문자 메시지를 날리건, 벨소리를 내려받건 어쨌거나 디지털 세대들은 휴대전화 액정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되기까지 2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신동 교수(한림대·언론정보학)의 말마따나 사람들의 생활을,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이렇게까지 단시간 내에 속속들이 바꾸어놓은 미디어는 일찍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특히 더욱 그러했다.

이 땅에 국산 휴대전화가 등장하면서 휴대전화 대중화가 이루어진 것은 불과 8년 전. 그러나 2004년 말 현재 한국은 인구 100명당 75.2명이 휴대전화를 쓰는, 명실상부한 휴대전화 강국이 되어 있다.
한국이 ‘휴대전화 강국’ 된 까닭

그렇다면 왜일까? 한국 사회에 제왕의 지배를 쉽게 한 어떤 특성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일단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휴대전화의 천하 제패를 앞당긴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국내 업체건 외국 업체건 휴대전화 관련 기업들은 한국 시장을 ‘세계적인 테스트 베드(시험대)’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들은 한국이 휴대전화 강국으로 자리 잡은 비결로 다음의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앞선 인프라. 둘째, 앞선 제품·기술 개발력, 셋째, 앞선 소비자. 이 3자는 서로를 견인하면서 휴대전화 발전을 이끌어 왔다(58쪽 상자 기사 참조).

이동성·개인성·연결성 ‘3대 마력’

그러나 넓게 보면 휴대전화의 약진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커뮤니케이션 학계에서는 한국 사회, 나아가 동아시아의 사회문화적 특성으로부터 휴대전화 확산 요인을 찾아보려는 연구가 활발했다. 이 시기 한국·일본·홍콩 등지의 휴대전화 보급률이 유독 북미나 유럽 지역을 앞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연구는 빛을 잃었다. 휴대전화 보급률이 일정한 궤도에 오른 뒤면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는 모든 미디어를 장악해 갔고, 사람들은 점점 더 휴대전화에 중독되어 갔다.

휴대전화가 이처럼 빠른 시일 내에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휴대전화 스스로가 빼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는 이전의 미디어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천부적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 ‘이동성(mobility)’과 ‘개인성(individuality)’이 바로 그것이었다.

무선 전화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전화선에 구애되지 않고도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덕분에 거실에 모여 있는 식구들 눈을 피해 자기만의 공간에서 오롯이 사적인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휴대전화는 이같은 이동성과 개인성을 극대화한 미디어라고 유선영 박사(한국언론재단 선임연구원)는 지적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자질이 바로 연결성(connectivity)이다. 휴대전화가 막 위세를 떨칠 때만 해도 이같은 속성은 별로 눈길을 끌지 못했다. 기술결정론자들은 휴대전화의 발전으로 개인화·원자화한 ‘디지털 노마드(유목민)’들이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본즉 사람들은 개인성·이동성 못지 않게 ‘접속’을 갈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신동 교수는 ‘언제 어디서나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야말로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놓지 못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정보야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얻어도 된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남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휴대전화만이 줄 수 있다. 지난 10월 한국방송학회가 주관한 ‘모바일 커뮤니케이션과 사회 변화’ 학술대회에 참석한 리치 링 박사(노르웨이 텔노어 연구소)는 휴대전화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인간과 사회가 관계 맺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휴대전화는 이미 유대 관계가 강한 사회 집단의 결속력을 더 굳건히 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링 박사는 말했다. 이를테면 10대 소녀들은 낯모르는 타자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보다 휴대전화, 특히 문자 메시지를 통한 소속 집단과의 유대에 매달리며 ‘접속에 대한 의존 혹은 집착’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경향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휴대전화 사용자 전반에서 나타난다.

이런 접속에의 열망을 병리적 증상으로 재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문화사회학자인 데이비드 몰리는 급변하는 현대 사회 내부에 첨단 기술에 대한 소유 욕구와 전통적인 공동체 문화를 향한 향수가 공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휴대전화를 통해 서로 간의 친밀성을 확인하려는 행위의 이면에는 이처럼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선영 박사는 이같은 현상의 이면에 자본의 기제가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끊임없이 옮겨다니고, 끊임없이 접속해 있으라’. 이는 세계화 시대 자본의 보편적인 요구 사항이기도 하다.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심지어 휴가지에 가 있는 동안조차 사람들은 접속을 끊지 못한다. 접속이 끊긴 순간 이 아찔한 ‘속도의 사회’에서 홀로 소외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경쟁자 없어 ‘장기 독주’ 가능성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전망하건 디스토피아를 전망하건, 휴대전화는 발걸음을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휴대전화는 새로 개척한 영토마다 ‘컨버전스’(융합)라고 이름 붙인 동화 정책을 쓰면서 이민족을 지능적으로 끌어안는 중이다. 통신과 금융의 융합, 통신과 방송의 융합…. 이 융합의 물결 속에서 휴대전화는 단지 기선을 잡았을 뿐이라고, 휴대전화가 잘나간다고 해서 디카나 텔레비전이나 개인용 컴퓨터(PC)의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오히려 휴대전화가 잘되어야 이들도 함께 잘살 수 있다고 끊임없이 속삭인다(휴대전화를 통해 텔레비전을 시청하게 된 뒤 정규 시간대에 못본 드라마를 챙겨 보게 되면서 텔레비전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늘었다는 조사가 대표적이다).

휴대전화에게 주어진 또 다른 행운이라면, 특별한 경쟁자가 등장할 가능성이 당분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휴대전화 같은 단말기 없이도 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크 접속이 가능한 진정한 유비쿼터스 시대가 도래하기까지 이 젊은 황제의 독주는 거침없이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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