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와 기도 그 고난의 행군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3.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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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공사 중단을 염원하는 삼보일배 행렬이 57일 만에 서울에 입성했다. 개발이라는 이름의 생태계 파괴를 엄숙히 성찰할 계기를 제공한 이 ‘이상한’ 시위는 우리 환경운동의 쟁점에
과천에서 서울로 접어드는 남태령 고개에서 성직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 진행팀도 고개를 돌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잠시 쉬어가겠다’는 구령 소리뿐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려는 카메라 기자들의 고함소리만 요란스러웠다.

‘해창 갯지렁이와 지리산 자벌레의 몸짓.’ 시인 이원규씨는 삼보일배에 나서는 성직자들을 이렇게 일컬었다. 수경 스님·문규현 신부·김경일 교무·이희운 목사. 해창 갯벌을 떠난 지 57일 만인 5월23일 서울에 입성한 네 성직자의 걸음은 전혀 꾸물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결연한 행군을 연상시켰다.
지난 5월23일부터 비로소 삼보일배를 허락받은 일반 시민들이 행렬에 동참했지만, 이들은 수행자들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구경꾼들은 그들대로 왠지 모를 죄책감에 말을 잊었다. 오히려 어린아이들은 날래고 경쾌했다. “갯벌에 사는 게와 조개를 살리려고요.” 지난 5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 파주에 사는 샘이(6)는 4보1배, 5보1배로 겅중겅중 따라붙으며 이렇게 외쳤다. 면장갑을 끼고 삼보일배에 동참한 미국인 데이비드 몰리 씨(영어학원 강사·24)는 “땅에 엎드려 보는 세상은 다르다. 전망이 달라지니 생각이 달라지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비폭력 무저항 정신으로 인간의 탐욕 성찰

첫 삽을 뜬 지 10년. ‘새로운 만경과 김제’라는 뜻의 새만금은 어느새 진부한 이름이 되어 버렸다. 보통 사람들의 뇌리에는, 문제가 많다는데 정작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농경지로, 그리고 공업단지로, 혹은 바다 도시·바다 공원으로 10년 동안 입에 올리는 사람에 따라 무수하게 용도가 변경되었다(42쪽 기사 참조). 변명에 변명이 보태지면서 뭐가 뭔지 모를 상황이 되었고, 일반인의 뇌리에서 잊혀갔다.

새만금에 대한 관심은 오로지 네 성직자가 시작한 ‘갯지렁이와 자벌레의 몸짓’ 덕분에 다시 불이 지펴졌다. 지난 3월28일 전북 부안 해창 갯벌에서 네 성직자가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며 서울로 향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이 ‘전무후무한 시위’가 실현되리라고 생각한 이는 별로 없었다.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수경 스님은 “두렵다. 어찌될지 알 수 없지만 길을 나선다”라고 말했고, 문규현 신부는 “1989년 방북 때와 마찬가지 감정을 느낀다”라고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하루 종일 겨우 5∼6km를 진행하면서 장갑이 두 켤레씩 닳아빠지는 강행군이 두달 가까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서울에 가까워지자 비로소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5월22일 이들이 과천종합청사에 도착하자 환경부 한명숙 장관과 농림부 김영진 장관이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기어이 일을 냈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김영진 장관의 말은 다시 쳇바퀴였다. 바로 전 날 기자 회견에서 ‘새만금 개발은 계속된다’고 천명했던 김장관은, 경위를 따져 묻는 문정현 신부에게 “이렇게 온 분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느냐. 제발 멈추어 달라”고 호소할 뿐이었다.

네 성직자가 305km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뜻도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말은 말을 낳고, 서로 꼬투리를 잡으려 들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참회와 기도의 끝까지 가보는 일뿐’이라는 무언의 항변이다. 묵언 증인 네 수행자를 대신해 입을 연 세영 스님(불교환경연대 집행위원장)은 “누구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이기심을 스스로 탓할 뿐, 나를 낮추어 만물과의 인연을 돌아보자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각자 요구를 내걸고 거센 목소리와 힘으로 밀어붙이는 요즘, 삼보일배야말로 ‘비폭력 무저항’ 정신으로 인간의 탐욕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요구는 단 하나. 일단 방조제 공사를 멈추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난 5월22일 국무회의에서 새로 꾸리기로 결정한 ‘신구상 기획단’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진행팀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자신들도 동참하겠노라는 시민들을 뿌리치느라 애를 먹었다. 어느 틈엔가 보면 네 성직자 뒤를 따르며 절을 하고 있더라는 것. 진행팀은 ‘뜻은 고맙지만 너무 힘겨운 일이다. 나중에 동참할 기회를 주겠다’며 이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먹거리를 염려할 틈도 없었다. 원래 길거리에서 숙식을 해결하리라 작정하고 예산을 짰지만,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끼도 해먹을 일이 없었다. 매일매일 어디에선가 밥과 음료수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예약을 받아야 할 판이었다. 그러고도 정작 숙소가 차려지면 근처 사찰이나 성당, 부녀회 등에서 연락이 온다. 하지만 이 가혹한 ‘자해 전술’을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심정은 편치 않다. 진행팀장 이원균씨는 수경 스님이 쓰러진 뒤 자괴감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시계 들고 20∼30분마다 쉬도록 하고, 속도가 떨어지면 휴식 시간을 앞당긴다.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체력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낼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일찍 무슨 일이 나도록 놔두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이씨는 골병이 들대로 든 수행자들을 ‘살아있는 제물’이라고 불렀다. 수경 스님은 최소한 1주일간 절대 안정해야 한다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병원을 빠져나와 기어이 행렬에 동참했다.

내방객이 찾아와도 기도 수행하는 네 사람은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인사는 미소로 대신했고, 필요한 말은 필담으로 주고받았다. 아이들이 내미는 종이에는 하고 싶은 말을 적어 주었지만, 기자들의 질문에는 ‘묵언이라 인터뷰를 할 수 없다’는 답장만 돌려보냈다. 이미 할 얘기는 다 했다는 뜻이라고 진행팀은 말했다.

서울로 들어서자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부쩍 말이 많아졌다. 지난 5월25일 여의도 시민공원에서 열린 시민대회에는 시민 천여 명이 참석했다. 4대 종단을 대변하는 이들이 새만금 방조제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국회의원들의 집단 행동도 눈길을 끌었다. 김원웅 개혁당 대표는 이 날 행사장에서 ‘국회의원 107인이 새만금 공사를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신구상기획단을 통해 논의를 진행하자는 데 동참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 가운데 한나라당 소속 의원이 75명에 달했다.

행사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한나라당 이부영 의원은 “새만금 간척지 100만 평을 미군에 공여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라며 정부를 성토했다. 전북 민심을 감안한 발언도 이어졌다. 새만금이 아닌 다른 대안을 통해 전북의 개발을 도모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는 것이다. 호남소외론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삼보일배 수행팀은 도심을 가로질러 5월31일 서울 광화문에 도착한다. 그 때까지 방조제 공사 중단이 천명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진행팀은 “단식도 불사하겠다고 말한다. 말릴 재간이 없다”라며 애를 태우고 있다. 한편 환경운동가 31인은 26일 새만금 공사 중단을 호소하며 청와대 앞에서 삭발식을 갖고 단식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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