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의 사생아 ‘양공주’ 통곡 50년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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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그리고 약소국의 아픈 상처 ‘양공주’. 6·25가 끝난 지 50년이나 흘렀지만, 분단과 전쟁의 희생양인 양공주는 아직도 민족사 한가운데에서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기지촌에서 미군에게 몸을 팔던 창국 엄마(방은진)는 마을 입구에 놓인 폐차된 버스에서 혼혈아 창국(양동근)과 산다. 그녀는 미국으로 떠난 흑인 남편이 자기와 아들을 데리러 오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편지는 ‘수취인 불명’이라는 직인이 찍힌 채 되돌아올 뿐이다. 1970년대 말 기지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 <수취인 불명>은 전쟁이 빚어낸 ‘양공주’와 혼혈아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창국 엄마처럼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이들을 미군은 ‘스페셜 엔터테이너’ ‘바걸(bar girl)’ ‘비즈니스 우먼’ ‘GI(미군을 칭하는 말) 브라이드’라고 불렀다. 한국 사람들은 ‘양공주’ ‘양색시’ 심지어는 ‘양갈보’라는 모욕적인 이름으로 불렀다.
미군 제2 보병사단 캠프 케이시가 자리 잡은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의 일명 ‘7리’. 1992년 윤금이씨가 변을 당한 곳으로 클럽 66개와 양공주 천여 명이 활동하는 대표적인 기지촌이다. 하선애씨(46)는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양공주 ‘써니’였다. 하씨의 인생은 말 그대로 ‘양공주의 역사’였다. 한국인 여성과 미군 남성 사이에는 한국전쟁 이후 한·미 관계사가 작용하고 있다(60~62쪽 딸린 기사 참조).


“남편의 구타를 피해 스물한 살 때 이곳에서 양공주 생활을 시작했어. 얼마 되지 않아 흑인 메일빈을 만나 동거하다가 운 좋게 결혼해 미국에 갔어. 아들과 딸을 낳았지만 남편은 2년 만에 심장병으로 죽었어. 이후 미군 캐빈을 만났지. 전 남편으로부터 받은 유산이 떨어지자 캐빈은 때리기 시작했고,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어 다시 동두천으로 돌아왔어. 클럽 생활을 하다가 여섯 살 아래인 한국 남자와 결혼했어. 그런데 남편은 내가 몸이 아파 돈을 벌어가지 못하자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가버렸어. 석 달 전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고서야 25년 간의 지긋지긋한 양공주 생활을 접을 수 있었어….”

양공주의 역사는 주한미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945년 9월8일 미군 2개 사단은 인천항의 외곽지 부평에서 38선 이남을 지배하는 점령군으로 주둔하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열린 연합군 환영식에서는 ‘미군 앞에서 한국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로 관중들이 야유와 욕설을 퍼부어 행사가 무산된 적이 있다. 한국인들은 한국 여성들이 미군과 접촉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높은 윤리 의식도 가난이라는 현실의 벽을 오래 버텨내지는 못했다.

양공주는 한국전쟁과 함께 양산되었다. 전쟁으로 살 길이 막막해진 피난민들은 미군부대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이 가운데는 전쟁으로 홀몸이 된 부녀자와 고아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미군을 상대로 하는 클럽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보통 기본급과 자신이 손님에게 판 술값의 20∼50%를 받았다. 이를 ‘드링크 머니’라고 불렀다. 하지만 할당된 주스와 술을 팔지 못할 경우 드링크 머니는 턱없이 줄어들었다. 또 업주들이 월급을 제때 지급하지 않아 양공주들은 미군과 잠을 자야만 했다.

양공주가 되는 까닭은 다른 사창가에서 일하는 것보다 벌이가 나았고,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군과 결혼하면 지긋지긋한 가난과 빚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나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1960년대에 전국 62개 기지촌에 있는 양공주의 수는 2만명을 넘었다.



기지촌이 급격히 늘어난 데에는 양국 정부의 ‘후원’도 큰 몫을 차지했다. 미군측은 가족을 데려오지 못한 미군들을 위한 서비스 공간으로 생각했다. 미군이 훈련할 때 양공주를 ‘담요 부대’로 데리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양공주를 남한의 자유를 수호하는 미군을 즐겁게 해주어 양국의 우호를 증진시키는 수단이자 외화벌이 창구로 보았다.

1961년부터 22년간 경기도 평택 기지촌에서 양공주로 일했던 김 아무개씨(63)에 따르면, 한 달에 한 번씩 군청 관리들이 양공주와 업주를 예식장에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한테 미군을 위안해 주고 달러를 벌어들이는 당신들은 애국자다. 양공주가 없으면 동네 처녀들과 아줌마들이 다 당한다. 당신들이 미군에게 서비스를 잘 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미국 웨슬리 대학 캐서린 문 교수는 자신의 저서 <동맹 속의 섹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 정부는 미군이 한국 주둔군 철수 문제와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이들에게 아첨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매일 밤 미군 장교들을 위해서 기생 파티가 열렸다. 접대였던 것이다. 미군들은 그것을 너무 좋아했다.’

양공주들 사이에도 계층이 존재한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은 클럽에서 일하며 보수도 많이 받는다. 이들은 허가증을 가지고 있고, 매춘을 이유로 감옥에 가지 않는다. 이에 비해 나이 든 ‘베테랑’들은 돈벌이가 안되어 ‘마마상’(관리자)으로 나서기도 한다.

미군과 결혼한 양공주는 양공주 사회의 꼭대기에 위치한다. 이들은 자기가 진 클럽의 빚을 미군 남편이 갚아준 상태여서 클럽에서 호객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된다. 미군 영내에 들어갈 수도 있고, PX에서 산 물건들을 블랙 마켓에 팔아 짭짤한 수입을 챙길 수도 있다. 기지촌 양공주로 일한 특권이다. 동거 양공주들이 그 다음에 위치한다. 미군이 집 열쇠를 갖고 있다고 해서 ‘키 우먼’으로 불리는 그들도 애인의 후원으로 더 이상 클럽에 갈 이유가 없다.

양공주들은 사회 문제를 양산했다. 혼혈아가 대표적이다. 1950년대에 노출되기 시작한 혼혈인은 1970년대 들어 그 수가 만명을 훌쩍 넘었다.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의 혼혈인 수를 펄벅재단은 5천명, 혼혈인협회는 2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정부는 통계치도 없다. 펄벅재단 사회복지사 이지영씨는 “혼혈인들은 의무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30%가 넘을 정도로 극심한 차별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동두천시 보산동에서 사회공동체를 운영하는 전우섭 목사는 “혼혈인들은 사회에서 철저히 버림받아 3대가 양공주가 된 집안도 있다”라고 했다.
동두천시 보산동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한 흑인 혼혈 여학생은 “공주의 반대말은 양공주다. 피부색이 다르게 사는 것보다 다리 없이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라고 말했다.

기지촌 주변에서 계속되어온 주한미군의 범죄 행위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1992년 윤금이씨가 미군에게 무참히 살해되었고, 1996년 평택 기지촌에서는 에바다 농아원생이 성추행당했다. 1998년 군산 아메리카타운에서는 박순녀씨가 숨졌다. 하지만 정부는 불평등한 주둔군 지위협정 규정과 국가 안보라는 미명 아래 주한미군 범죄 행위에 대해 적극 대처하지 않고 있다.
양공주는 미군 감소와 더불어 1980년대부터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양공주는 현재 전국 50여 곳의 기지촌에 만여 명이 있는데, 러시아와 필리핀 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인 양공주는 3천명 정도로 추산된다. 의정부 외곽 캠프 스탠리 옆에 위치한 기지촌 ‘뺏벌’(배나무가 많아서 뱃벌이었으나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뺄 수 없다고 해서 뺏벌로 불린다)에서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단체 두레방을 운영하는 유영임씨는 “한국 여성 수가 줄고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곳은 사정이 달라진 게 없다. 가정 폭력에 시달려 집을 뛰쳐나온 여성들이 정보지를 보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미군의 범죄 행위와 육체적·성적 학대와 같은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나 외면하는 정책을 써왔다”라고 말했다. 캐서린 문 교수는 “한국 정부는 기지촌 매춘 여성들을 미군과 매춘 여성 간의 문제, 즉 미국의 문제라고 여겼다”라고 지적했다.

정부와 사회의 무관심은 양공주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서울 이태원 R클럽에 나가는 순이(가명·21)와 수지(가명·22)는 전문대에 입학하자마자 양공주가 되었다. 순이는 “미국 문화를 익히고 영어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미국인 남자와 결혼해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그녀는 미군을 만나 결혼을 약속하고, 은밀한 곳에 그의 이름과 장미꽃 문신까지 새겼다. 하지만 그 미군은 선물한 반지까지 빼앗아 미국으로 가버렸다. 순이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문신 때문에 이름을 그 미군 이름으로 바꾸어야 했다.

순이는 아직 미국으로 가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순이는 꿈 때문이 아니라 밀린 빚 때문에 오늘도 이태원 언덕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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