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부대’ 원조 조용필 팬클럽의 어제와 오늘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3.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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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보고 나니까 한강이 눈에 차지 않는다.” 조용필 팬클럽 연합 모임 ‘필21’의 회원인 대학생 박수강씨(26)의 말이다. ‘국민 가수’라는 칭호에 걸맞게 조용필 팬클럽은 10대 청소년부터 60대 노인까지, 모든 세대를 아우른다. 콘서트마다 찾아오는 비구니 스님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 교수(안동대 윤석수 교수)가 팬클럽 회장을 맡고 스타(가수 신해철)가 팬을 자처한다.

조용필 팬클럽은 팬클럽 문화의 원조를 장식한 팬클럽이다. <비련>의 첫 음절 ‘기도하는…’이 시작되면 ‘꺄악’하고 소리치던 단발머리 소녀들이 바로 한국 팬클럽 문화의 원조였다.

조용필씨가 나타나면 ‘오빠’를 외치며 무시로 무대를 부수고 건물 현관 유리창들을 박살냈던 그 소녀들도 이제 세월의 더께가 쌓여가면서 원숙한 중년 여성이 되었다. “나 쫓아다니지 말고 집에 가서 공부하라”는 핀잔을 듣던 그 소녀들은 이제 도리어 조용필씨에게 “오빠, 세상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아. 제발 계산적으로 사세요”라고 충고한다.

조용필씨에게는 한류의 원조 가수답게 일본 팬도 많다. 별도의 일본 팬클럽 사이트(www.cho-yongpil.jp.kr)를 가지고 있는 일본 팬들은 조씨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이번 콘서트에도 일본 팬 4천여명이 관람할 예정이다.

조용필의 음악이 성숙하듯 팬클럽 문화도 성숙했다. 뜨겁던 팬클럽의 열기는 1992년 14집 음반 실패와 조씨가 교통 사고로 활동을 중단하자 한풀 꺾였다. 그러다가 1997년 15집을 발표하자 팬클럽도 긴 동면에서 깨어나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이 무렵 팬들은 비정기 조용필 잡지 <이터널리>를 창간했다. 1997년 고려대 ‘자유 콘서트’ 이후에는 대학생들까지 팬으로 가입하기 시작하면서 팬클럽 활동에 활기가 돌았다.

PC통신과 인터넷을 거치면서 조용필 팬클럽은 더욱 진화했다. 하이텔(킬리만자로의 표범)과 천리안(필)에 팬클럽 커뮤니티가 생기면서 결집하기 시작한 팬들은 인터넷이 출현한 뒤 곳곳에 팬 사이트를 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용필 팬들은 ‘필21’이라는 연합 팬클럽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24시간 조용필의 노래만 트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인 ‘조용필방송국’(www.choyongpil.dj)이 있을 정도이다. 조용필방송국에서는 김진섭씨(19)를 비롯해 DJ 10여명이 조용필 음악을 매일 24시간 방송으로 내보낸다. 얼마 전 조용필방송국에서는 기념 플래시 애니메이션까지 만들기도 했다.

팬클럽의 주요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오보를 정정하는 것. 여느 팬클럽처럼 조용필 팬클럽도 언론사 로비에 신경을 많이 쓴다. 특히 조용필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데 큰 비중을 둔다. 이들은 최초로 일본 NHK 방송 홍백전에 참가한 국내 가수가 보아가 아니라 조용필이라는 것, 맨 처음 베이징에서 공연한 한국 가수도 클론이 아니라 조용필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이를 잘못 보도한 언론으로 하여금 정정 기사를 쓰게 했다.

소속 기획사보다 조씨에 대한 자료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팬클럽의 꿈은 조용필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조용필 박물관을 설계하기 위해서 일부러 건축학과에 진학한 회원도 있다. ‘필21’ 임원인 박연미씨는 “대중 가수에게도 역사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 역사를 정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팬들은 조용필씨가 무대를 지키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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