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의 '독립선언'
  • 박기영 (그룹 동물원 멤버) ()
  • 승인 2003.08.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슈퍼 스타 조용필, 그의 역사를 되짚어보기 위해서는 그가 밴드 생활을 시작한 1968년부터 살펴야 한다.

1968년은 한국에 모던 포크 음악이 태동하던 해이다. 1960년대까지의 우리 대중 음악은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 등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이식된 양대 음악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모던 포크 음악은 1970년대 청년 문화의 신화를 이끌며 한국 대중 음악 사상 최초의 세대 혁명을 이루어내고, 기존 주류 대중 음악 질서를 일거에 전복한다.



김민기·한대수·서유석·양희은·이장희·송창식·김정호 등 포크의 명장들이 줄이어 등장했다. 이들은 일본 음악이 우리 대중 음악에 덮어씌운 식민의 굴레와, 광복 직후 숨 돌릴 틈도 없이 밀려든 미국 대중 음악이 채워 놓은 질곡의 사슬을 50여년 만에 끊으며 우리 대중 음악의 독립을 외쳤다.

그러나 이들은 그 최전성기에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지 못하고 유신 정권의 무자비한 철퇴를 맞았다. 1975년, 금지곡 파동과 대마초 파동을 거치면서 이들은 그 화려했던 무대로부터 황망히 퇴장당했다. 이들의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 될 수밖에 없었고 ‘독립’을 향해 터진 물길 역시 다시 식민과 반동의 방향으로 물길을 틀게 되었다. 1975년부터 1980년 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천재들이 구금의 세월을 보내야 했으며 우리 대중 음악은 다시 침체와 매너리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1980년 봄, 비로소 미완의 혁명과 불완전한 독립을 완성시킨 아티스트가 등장한다. 바로 조용필이다. 그의 1집 발표와 동시에 한국 대중 음악사는 ‘조용필 이전 시대’와 ‘조용필 이후 시대’로 나뉘게 된다. 그는 유신과 각종 긴급조치, 대마초 파동 등 정치적·문화적 탄압으로 인해 한국 대중 음악이 처해 있던 암울한 매너리즘의 늪을 단숨에 건너게 한 위대한 선봉장이었다.

신군부가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권좌에 오르는 바로 그 시점에 컬러 텔레비전 시대가 열리고, 대중 음악의 주 수용층이 10대로 이동했다. 이런 지각 변동 속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히트시킨 후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활동을 멈추어야 했던 조용필은 <창 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들고 화려하게 부활해 또다시 통속적인 어법으로 몰락해가던 한국 대중 음악을 기사 회생시켰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가 밴드를 조직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때는 한국 모던포크 음악이 태동하던 시점인 1968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무대는 대학가가 아닌 미 8군 부대였으며, 그의 무기는 학생 아마추어 뮤지션들의 통기타 사운드가 아니라 일렉트릭한 록 사운드였다. 이같은 그의 초창기 음악적 이력은 학생 아마추어 통기타 뮤지션들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음악적·사회적 한계를 극복하고 대중 음악의 진정한 독립을 완성시킬 수 있는 저력이 되었다.


1970년대, 청년 문화라는 이름으로 그 맹아를 드러냈던 한국의 세대 문화는 1980년대 들어 이른바 ‘10대 문화’라는 이름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에 힘입은 경제적 안정과 더불어 한국의 10대들은 드디어 자신들만의 문화를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하이틴 여고생들의 문화, 이른바 ‘오빠 부대’ 문화였던 것이다. 조용필은 이 문화를 최초로 지배하면서 1980년대 한국 대중 음악계의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후 일련의 앨범들을 통해 리듬 앤드 블루스에서 로큰롤, 식민지 시대 이후의 한국 대중 음악의 주류 장르인 트로트와 한국전쟁 이후 자리 잡은 스탠더드 팝, 나아가 민요와 동요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섭렵해냄으로써 10대 취향과 성인 취향의 대중 음악 질서를 완성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초기 작품인 3집 앨범(1981년)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로 시작하는 A면의 트로트 넘버들은 아직도 시장의 다수를 차지하던 20대 후반 이후 세대를 적극적으로 유인해냈고, 한국 록의 기념비적인 넘버들인 <여와 남> <고추잠자리> 등이 자리 잡고 있는 B면은 새롭게 떠오르는 10대와 20대 초반 대중에게 새롭고 충격적인 음악적 경험을 제공했다.

<어제 그리고 오늘> <미지의 세계> <아시아의 불꽃> <여행을 떠나요> 등 폭발적으로 발산되는 ‘청년 조용필’의 에너지로 충만한 7집 앨범과,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등 양인자-김희갑 콤비와의 조화를 통해 침묵하고 있던 성인들을 움직이게 한, 성인 음악 문화 구축의 이정표가 되는 8집 앨범의 절묘한 커플링 역시 음악 문화의 통합을 향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분열이 아니었다. 그는 두 세대에게 두 가지 음악적 경험을 동시에 공유하게 했던 유일한 음악가였으며 이러한 사실에 바로 그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조용필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그가 서양 대중 음악에 일방적으로 기울어 있던 음반 시장과 매스 미디어의 주도권을 한국 대중 음악이 쥐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세계 대중 음악사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반역의 기적’이었다.
조용필 이전 시대만 해도 한국 대중 음악계, 특히 방송 분야는 여전히 서양 대중 음악이 지배하고 있었다. 8 대 2에 달하던 ‘서양 팝 대 한국 대중 음악’의 시장 점유율을 일거에 역전시킨 아티스트가 바로 조용필이었다. 음악 양식의 측면뿐만 아니라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조용필의 음악은 한국 대중 음악의 진정한 독립 선언이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