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도 잘 노는 '명절 나홀로족'
  • 노순동 (soon@sisapress.com)
  • 승인 2003.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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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올해는 영 추석 특수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우려 섞인 진단 속에서도 ‘명절 신화’는 계속된다. 바리바리 추석 선물을 싸들고 귀성 혹은 역귀성 하는 모습은 올해도 에외가 아닐 터이다. 하지만 이런 명절 스케치가 너무 판에 박힌 것은 아닐까? 남성과 여성이 모두 즐기는 평등 명절을 만들자는 구호도, 실은 기혼자 중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명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무엇보다 싱글족의 증가와 관련이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15.5%를 차지한다. 일곱 가구 가운데 한 가구가 독신 가구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명절 풍습은 여전히, 기혼자들이 대가족의 품을 찾아가는 모습만 그려내고 있다. 자의로 혹은 타의로 ‘나홀로 명절’을 나는 사람들의 속내가 어떨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들의 목소리는 듣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남성들이 더했다. 무책임한 사람들이라는 시선이 두려운 것일까.
동화 작가인 다림씨(예명). 40대 중반인 그는 주변 친구들이 이러저런 스트레스를 호소하기 시작하면 명절이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그런 얘기를 귓전에 흘려 들으면서 다림씨는 ‘나홀로 명절’을 날 채비를 한다. 3년째 그의 행선지는 오세암이다. 특별한 연고는 없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좋아서인데, 앞으로 10년 동안 그곳을 찾을 생각이다.

다림씨의 나홀로 명절나기는 꽤나 역사가 깊다. 20년 전 이혼한 다림씨는 10년 동안 외국 생활을 하다가 10년 전 귀국했다. 이후 명절은 다림씨에게 고역 그 자체였다. 시가쪽과는 인연이 끊겼고, 친정 나들이도 쉽지 않았다. 명절이면 괜히 눈치가 보이곤 했다. 지금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형제도 없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나홀로 명절을 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여성인 그에게는 혼자 명절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절 때면 온 나라가 감옥과 같았다. “제주도에 여행을 갔을 때다. 호텔 직원들이 명절 때 여자가 혼자 왔다고 어찌나 신경을 쓰던지. 게다가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이 흘끔거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해외 여행이다. 가까운 동남아나 친구가 많은 일본을 행선지로 택하곤 했다. 일본의 추석은 양력 8월15일. 물론 그 때도 우리처럼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그는 국내 산행으로 눈을 돌렸다. 고즈넉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데다가 험한 일을 당할 염려도 적고, 또 산사에서 묵거나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 여러 모로 좋다. “무엇보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상대에 대해 꼬치꼬치 묻지 않아서 좋다” 라고 다림씨는 말한다.
30대 중반의 미혼인 홍선화씨는 명절 때면 해외 여행을 선호한다. 국내에서 가볼 만한 곳은 어김없이 막히고,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때문이다. 평범한 직장인인 그에게 해외 여행은 부담이 만만치 않은 일인데, 뭇사람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칙칙하게 명절을 보내는 것보다는 그 편이 오히려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다.

그가 명절 때 해외로 피하는 이유는 부모님을 위해서다. 1년에 겨우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친척들이 명절 때면 몰려와 자신을 흡사 폐기 처분해야 할 쓰레기처럼 여기는 것이 너무 싫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다치고 부모님에게 할 일을 안하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걸 듣고 있을 이유가 없다”라고 홍선화씨는 말한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 만한 딸’이 명절 때 집 밖을 떠도는 것을 못마땅해 하지만, 어머니가 편을 들어주어 홍씨는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난다.

이처럼 ‘나홀로 명절’은 대체로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것이지만,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 그들을 몰아내는가. 나홀로족들은 그 이유로 화석화한 ‘대가족 이데올로기’를 꼽는다. 살을 부딪히며 사는 직계 가족은 그만큼 개인 사정에 밝아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가 적다. 반면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에 마음을 상하거나, 친척 사이에 오래 묵혀 두었던 갈등이 불거지면서 사단이 난다는 것이다.

올해 처음 나홀로 명절에 도전하는 박미경씨(가명)가 그런 경우다. 마흔에 접어든 미혼 여성 박미경씨는 매년 어머니와 함께 차례 준비를 해왔지만 올해는 처음 ‘나홀로 명절’을 보낼 계획이다. 좋은 낯으로 친척들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일종의 ‘도피성 여행’을 작정했다. 그런 그의 사연에는 전형성이 있다.
박씨의 어머니는 여든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어머니는 3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제사를 줄곧 모셔 왔는데 지난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셨다. 박씨가 보기에 이쯤이면 숙부가 할아버지 제사를 모셔가겠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숙부는 거동조차 불편한 형수에게 여전히 큰며느리의 도리를 강조했다.

그렇다고 숙부가 항상 장남 우선인 것도 아니어서 얼마 전에는 알량한 선친 유산을 두고 재산 다툼까지 벌였다. “상대에게는 도리를 주문하고 자신은 실리에만 밝다. 무엇보다 과거와 달리 친척들은 관념적으로만 가까운 사이다. 나이 어린 사람이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이대로 참고 있기는 어려웠다”라고 박씨는 말했다. 평소 답사 여행을 즐겨온 그는 아는 절을 찾고, 등산도 할 계획이다.

2박4일 일정으로 지리산 종주를 계획하고 있는 정영란씨(35). 다른 집과 달리 결혼에 대한 압박이 크지 않고, 친척들이 무심코 던지는 속 모르는 발언은 그러려니 넘길 수 있을 만큼 ‘내공’을 길렀다. 하지만 매년 판에 박힌 일과가 반복되면서 답답함이 커져갔다. 명절 때 그의 일과는 설거지, 조카들과 놀아주기가 고작이다.

홀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대략 스물 일곱 살 때부터. 혼자 여행할 때 제일 괴로운 것은 신변의 위협이 아니라 뭇사람의 힐끔거리는 시선과 남성들의 농짓이다. “기혼·미혼 가리지 않고 수작을 걸어온다. 초면에 밥을 같이 먹자고 하거나 같이 여행을 다니자며 연락처를 달라고 한다. 그냥 웃거나, 말없이 지나쳐야 한다”라고 정영란씨는 말한다.

그래서 정씨는 그런 번거로움이 싫다면 동호회를 통한 산행을 조직하라고 추천한다. 정씨는 정기 워킹 그룹인 그린 클럽과 산악회인 여산회에 가입했는데, 이번 추석 지리산 종주는 여산회가 마련한 것이다.

명절은 홀로 명절을 나려는 사람들을 외국으로, 산 속으로만 몰아내는 것일까? 도심 속에서 휴식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늘고 있다. 서울 압구정동에 자리잡은 보리수 선원이 마련한 추석 수행 프로그램이 한 예다. 9월7일부터 13일까지 열리는 이 명상 수행 프로그램에는 현재 20여 명이 참가 신청을 한 상태다(문의 02-517-2841). 선원에서 합숙할 수도 있고, 출근 수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보리수 선원의 김정균씨는 “몇 해 전부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올해도 기회를 마련했다”라고 말했다. 명상으로 마음을 닦으려는 이들의 연령층은 다양하다. 남녀불문하고 20대와 50대가 많고, 40대는 주부가 눈에 많이 띈다. ‘묵언 명상’을 할 때가 많아 개인의 사정은 시시콜콜 듣지 못한다.

함께 보내는 명절이 아무리 괴로워도 훌쩍 떠날 형편이 되지 않은 이들도 많다. 오랫동안 혼자 명절을 보내본 사람들은 방에 틀어박혀 있더라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로 텔레비전 시청을 첫 손에 꼽는다. 시대착오적인 명절 특집 프로그램 때문에 ‘머리에 쥐가 나기 일쑤’라는 것이다. 재탕 외화에, 대가족의 화합을 설파하는 각종 특집 드라마에, ‘종가를 찾아서’ 류의 전통 문화를 설파하는 교양 프로그램 일색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차라리 만화책이나 비디오, 대하 소설 등을 섭렵하라고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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