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중독되어 행복한 사람들
  • 차형석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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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관음증도 이용했죠”

프리랜서 웹 기획자 김은진씨(31)는 블로그 전도사이다. 블로그에 일상을 기록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블로그를 쓰면서 남편과도 한결 가까워졌다. 술자리가 빈번했던 남편에 대한 ‘애교성 으름장’을 블로그에 올렸더니, 뜨끔했는지 며칠 동안 퇴근 시간이 앞당겨졌다.
그가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미니 홈피’를 만든 것은 2001년. 웹 기획 작품을 올리면서 ‘다이어리’ 기능을 추가했다. “사람들은 관음증 같은 것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블로그에 가면 일기는 꼭 보게 된다.” 김씨가 일기 블로그를 만든 까닭이다.
올해 초 임신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블로그(eunjini.com)를 태교 블로그로 바꾸었다.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올리고, 블로그에서 대화를 나눈다. 그에게 블로그는 ‘태교’이자 다른 임신부와의 연결 통로이다. 이따금 전혀 모르는 임신부가 태교 일기를 보고 ‘공감한다’는 글을 남기곤 한다. 오는 11월 출산 이후에는 가족 블로그로 전환할 계획이다. 그는 “그저 평화로운 가족 블로그를 원한다. 다른 사람을 우리 가족의 일상으로 초대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너희가 농사의 기쁨을 알아?

경기도 안성에 사는 농부 임문빈씨(62)는 일본에 사는 40대 재일동포 블로거와 이따금 채팅을 한다. 배·포도 농장을 하는 임씨는 농사짓는 즐거움을 블로그(hulgirang.blog.co.kr)에 올린다. 그의 ID는 ‘흙이랑’. 자연친화적으로 살겠다는 뜻이다.
서울에서 40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던 임씨는 IMF 이후 안성으로 이주했다. 농사하는 법을 익히고, 인터넷으로 과수 시세를 확인하다가 ‘1인 미디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성격이 내성적인 데다, 객지에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도 없던 터여서 무작정 블로그에 접속했다”라고 말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해서 컴퓨터에는 익숙했지만 블로그를 만드는 데 애를 먹었다. 처음에는 글만 올리다가 요즘에는 사진도 올리고 싶어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했다.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많아서인지 도시 사람들이 그의 블로그에 자주 접속한다. 그도 자신의 사이트를 방문한 블로그는 꼭 답방을 한다. 출가한 자녀들도 블로그를 통해 부모님과 접속한다. 그는 “블로그를 하다 보면 남녀노소를 떠나게 된다. 답답하고 한적할 때 내 얘기를 대신 들어주는 것이 블로그이다”라고 말했다.
“블로거 되면 삶이 바뀐다”

웹 프로그래머 송찬호씨(41)와 아들 송민재군(8)은 블로거들 사이에서 ‘엽기 인라인 부자’로 통한다. 송씨는 아들에게 인라인을 가르치면서, 동작 하나하나를 디카로 찍어 초보자를 위한 ‘엽기적인 인라인 스케이트 강좌’를 블로그(songminjae.com)에 연재했다.
인기 폭발이었다. 회원이 하나둘 붙더니 지금은 2천2백명으로 늘어났다. 개인 블로그가 커뮤니티 역할까지 하는 셈이다. 그의 인라인 블로그는 개인 홈페이지로는 드물게 인터넷 순위 사이트 랭키닷컴에서 인라인 부분 11위에 올랐다. 한 인라인 스케이트 업체는 그의 ‘엽기 강좌’를 상업용으로 쓰겠다는 제안까지 해왔다. 하지만 그는 “가족을 위한 순수한 블로그로 남겠다”라고 거절했다.
송씨의 인라인 블로그는 가족 블로그이기도 한다. 여덟 살, 네 살 두 아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블로그를 켜고, 자기 사진을 보고 또 본다. 그는 “애 엄마는 다른 학부모들과 블로그에서 대화를 나누고, 나는 종일 블로그를 열어놓고 수시로 확인한다. 우리 가족은 블로그에 중독되었다”라고 말했다.
송씨는 블로그를 모르는 ‘블맹’에게 ‘블로그 코드론’을 설파한다. 디카와 블로그는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것이다. ‘접속하라. 블로거가 되어라. 그러면 삶이 달라진다.’ 요즘 그의 슬로건이다.
‘디카’로 맛을 찍는다

박진형씨(29)의 친구들은 박씨와 식사하기를 꺼린다. 음식을 먹기까지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음식 블로그(home.blogn. com/topaz20)를 운영하는 박씨는 새로운 음식점을 갈 때마다 디카로 음식을 찍는다. 친구들이 ‘밥 좀 먹자’고 성화해도 끄떡 않는다.
시작은 입구에서부터. 간판을 먼저 찍고, 메뉴판을 찍는다. 식탁에 놓인 숟가락·물잔을 찍고, 음식이 나오면 반찬을 일일이 다 찍는다. 그는 식당에서 숟가락보다 디카를 먼저 챙긴다. 그래서 가끔 식당 주인이 ‘혹시 음식에 문제가 있냐’ ‘기자냐’고 묻기도 한다. 그는 “블로그가 1인 미디어이니, 나는 식도락 1인 기자인 셈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음식을 찍는 이유는 두 가지. 사진 찍는 기술을 키우는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음식점 정보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의 블로그에서는 음식 맛과 사진 기술에 대한 댓글이 오간다. 식당 위치가 어디냐고 문의하는 글도 있다.
‘음식 블로거’ 박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글과 사진을 올리면, 3명의 블로그에 동시에 올라간다. 사진과 음식에 관심 있는 블로거들이다.
매일 오후 10시가 넘어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면, 그 날 박씨가 어디서 무엇을 먹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출출할 시간에 음식 사진을 올려야 반응이 더 좋다”라고 말했다.
석 달 만에 조회 수 17만

홍익대 국문과 02학번 나휘승씨(21)는 세이클럽에서 유명 인사이다. 블로그에 올린 그의 사진을 본 네티즌들이 ‘오늘 몇 시에 어디에서 보았다’는 글을 올릴 정도이다. 지난 6월에 만든 그의 에세이 블로그(hompy.sayclub. com/skgnltmd)는 석 달 만에 조회 수 17만에 이르렀다.
글쓰기·코스프레(만화 주인공의 옷 따라 입기)·특공무술·그림·밴드 활동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진 나씨는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이 답답했다. 동호회에는 여러 성향의 네티즌이 모여 있어 자신만의 색채를 표현하는 데 갑갑했다. 그는 자신만의 공간을 얻고 싶어 블로그를 만들었다.
염색과 피어싱 때문에 생면부지 할아버지로부터 ‘대한민국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말까지 듣기도 했지만, 그녀가 올리는 글은 예상과 달리 주로 동양철학과 고전에 관한 내용이다. 요즘 유행하는 네티즌 언어와 달리 표준어를 준수하고 시종 예의 바른 문체를 궁서체 폰트로 올려 그의 블로거 마니아 사이에서는 ‘나휘승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나씨에게 블로그는 경험을 발견하고, 서로 나누는 것이다. 그는 “캠코더와 카메라폰을 가지고 다니면서 소재거리를 찾다보니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라고 말한다. 접속과 동시에 날아드는 쪽지에 답하느라 그는 매일 4시간씩 블로거로 변신한다.
전국민에게 쓰는 사랑 일기

가방이 똑같다. 티셔츠도 똑같다. 한눈에 연인임을 알 수 있다. 온라인에서도 이들은 ‘한 클릭에’ 연인임을 알 수 있다. 커플 블로그(mm.intizen.com/kami205)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연상 녀(女)·연하 남(男)’인 이문오씨(30)와 이용석씨(25)는 ‘연애 블로그’를 통해 공개적으로 서로 사랑한다고 선언한 커플이다.
이들은 사이버에서 만나, 사이버에서 사랑을 다져가는 ‘사이버 커플’. 올해 1월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한 것도 두 사람이 즐기던 인터넷 게임 사이트에서였다. 누나·동생으로 게임을 하다가 애인이 되었고, 지난 6월부터는 연인 블로그를 제작했다. 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 이문오씨의 바람이었다.
이들의 연애를 지켜보는 사람은 하루 평균 60∼70명.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합법적으로’ 훔쳐본다. 처음에는 ‘닭살’이라는 댓글도 올라왔지만, 요즘은 ‘부럽다, 보기 좋다’는 반응이 주종을 이룬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연애 일지를 쓰면 쑥스럽지 않을까? 이문오씨는 “연애가 숨길 일인가? 오히려 자랑스럽게 사람들에게 알릴 일이다. 우리의 블로그는 내가 아끼는 보물 제1호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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