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일그룹 인맥·로비 ‘X파일’
  • 이철현 ()
  • 승인 2003.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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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통령, 총리 등을 고용, 이들의 로비 덕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는 칼라일그룹은 군산복합체의 '화신'인가, '대박' 터뜨린 투자 업체인가.
칼라일그룹은 미국의 미스터리 드라마 에 나올 만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정치 명가’ 조지 부시 가문은 물론 9·11 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오사마 빈 라덴 가문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면, 미국 군수산업체들을 잇달아 인수해 미국 국방부와 무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칼라일그룹은 한반도 상황과 한국 경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칼라일그룹의 실체를 폭로하는 폭스 멀더(의 남자 주인공) 역을 자처하고 나선 인물이 있다. 미국 IT 전문지 <레드헤링> 기자 출신인 댄 브리오디이다. 브리오디는 최근 칼라일그룹을 ‘군산 복합체의 전형’이라고 규정한 <철의 삼각지대:칼라일그룹의 비밀 세계>를 출간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브리오디는 이 책에서 칼라일그룹이 미국·영국과 아시아 지역의 전직 수반이나 고위 관료를 동원한 전방위 로비로 열두 나라에서 엄청난 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단언한다. 칼라일그룹 자문역 명단에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 제임스 베이커 전 미국 재무장관, 아서 레빗 전 미국 연방증권거래위원회 위원장,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 등장한다.

브리오디는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외환 위기 때 한국을 방문해 칼라일의 투자 활동을 지원했다고 주장한다. 브리오디는 당시 부시 전 대통령이 만난 국내 정치인과 경제인 들을 실명으로 거론했다. 심지어 부시 행정부의 대북한 강경 정책이 칼라일 서울사무소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한 부시 전 대통령이 아들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대북 관계가 유화 국면으로 바뀌었다고까지 주장한다.

이 책이 명확한 근거에 바탕을 둔 진실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실체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류의 음모론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상반된 견해가 나오고 있다. 저명한 비즈니스 전문 기자인 크리스토퍼 바이런은 “<철의 삼각지대…>는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진실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조너선 니 컬럼비아 대학 경제학 교수는 ‘진실 규명에 실패한 졸작’이라고 혹평했다.

<시사저널>은 지난 9월24~26일,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칼라일그룹 본사의 크리스토퍼 울먼 공보담당 부사장과 뉴욕에 거주하는 프리랜서 작가 브리오디를 만나 칼라일그룹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을 취재했다. 칼라일그룹 본사 건물은 연방 정부 빌딩이 밀집한 워싱턴D.C. ‘페더럴 트라이앵글’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법무부·국세청(IRS)이 10번가와 펜실베이니아 애비뉴를 경계로 칼라일 본사와 마주 보고 있다. 칼라일에서 서쪽으로 5분만 걸어가면 재무부와 백악관이 나온다. 미국 금융의 중심지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월 스트리트여서 투자금융 업체들은 일반적으로 월 스트리트에 본사를 둔다. 사정이 여의치 않은 업체들은 시카고에 자리를 잡지 워싱턴D.C.까지 오지는 않는다. 연방수사국보다 백악관에 더 가까이 있는 칼라일의 주소지는 경쟁 업체들로 하여금 칼라일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끔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칼라일그룹을 운용 자산 1백62억 달러(20조원 가량)에 달하는 세계 최대 사모(私募) 펀드 회사로 키운 주인공은 최고경영자(CEO)인 데이비드 루벤스타인(70~71쪽 상자 기사 참조)이다. 워싱턴D.C. 출신인 그는 27세 때 카터 대통령의 국내정책 담당 보좌관을 지낸 변호사이다. 루벤스타인은 1987년 뉴욕 맨해튼 메디슨 애비뉴에 있는 칼라일호텔에서 스티븐 노리스·윌리엄 콘웨이·대니얼 대니엘로와 만나 칼라일그룹을 설립했다. 회사 이름은 칼라일 호텔에서 따왔다.

국방장관 출신 칼루치 회장, 인맥 만들기 주도

창립 초기에 회사 경영을 주도한 인물은 스티븐 노리스였다. 메리어트그룹의 합병·매수 전문가였던 노리스는 경영난에 허덕이는 에스키모 기업을 돕고자 시행한 세제 혜택을 우량 기업으로 이전하는 방법으로 수백만 달러를 벌 수 있다는 것에 착안했고, 이를 위해 변호사 출신인 루벤스타인을 끌어들였다. 이 세제 혜택 중개로 수백만 달러를 거머쥔 칼라일그룹은 1980년대에 부실 기업을 인수해 정상화한 후 비싸게 되파는 방식(LBO)으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1989년 1월, 프랭크 칼루치 전 국방장관을 회장으로 영입하면서 회사는 워싱턴D.C. 정계와 관계의 유력 인사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댄 브리오디는 “칼루치는 국방장관을 사임하고 채 1주일이 지나지 않아 칼라일그룹에 입사했다”라고 말했다. 칼루치는 중앙정보국(CIA) 해외공작담당 요원·국가안보보좌관·국방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칼루치 회장은 1993년 2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자 제임스 베이커 재무장관과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을 회사 자문역으로 영입했다. 칼루치 회장이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조지 부시 현 대통령도 텍사스 주지사로 출마하기 전에 칼라일이 인수한 기내식 공급 업체인 ‘케이터에어’의 이사로 활동했다. 칼루치 회장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과도 친분이 두텁다. 이 두 전·현직 국방장관은 프린스턴 대학 시절 함께 레슬링을 즐길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최근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국방 정책과 관련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부시 대통령도 칼라일과 관계 깊다?

칼루치 회장이 취임하면서 칼라일그룹은 군수산업체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1990년 9월 세계에서 가장 큰 방위 컨설팅 업체인 BMD컨설팅을 1억3천만 달러에 매입했고, 군수 차량 생산 업체인 하스코(유나이티드 디펜스의 전신)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이듬해에는 로럴과 노스롭 사와 합작해 LTV 사의 항공방위사업 부문을 4억7천5백만 달러에 사들였다.

전직 고위 관료가 잇달아 영입되고, 정부 규제와 정보 접근이 어려운 군수산업 분야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자 칼라일그룹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브리오디는 “전직 고위 관료들은 재직 때 얻었던 정보를 근거로 칼라일그룹의 투자 전략을 조언했고, 심지어 현직 관료와 접촉해 정부 정책을 칼라일그룹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로비 활동에도 참여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라일의 울먼 부사장은 이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칼라일그룹 고문들은) 현직에서 물러난 후 정부 부처의 주요 정책들이 바뀌어 정책 변화를 예견할 수 없었고, 칼라일의 이익을 위해 관료를 대상으로 로비한 적이 없다.”
브리오디는 부시 현 대통령에게도 총구를 겨눈다. 1995년 3월 부시 대통령이 텍사스 주지사로 취임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텍사스투자관리회사협회(UTIMCO)가 천만 달러를 칼라일 펀드 가운데 하나인 ‘칼라일 파트너즈 Ⅱ’에 출연했다. 오비이락인지 칼라일그룹을 배려한 결정인지는 확실치 않다. 조지 소로스도 1억 달러를 투자한 이 펀드에는 목표액의 2배가 넘는 13억3천만 달러가 몰렸다. 군수산업에 주로 투자한 이 펀드는 35%가 넘는 투자 수익을 창출했다.

브리오디는 “칼라일그룹은 해당 지역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고위 인사를 내세워 펀드를 모집하고, 일단 구성된 펀드는 해당 인사의 인맥과 영향력을 앞세워 투자 활동을 펼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울먼 부사장은 “칼라일그룹 고문들은 전문 분야의 식견을 토대로 투자 활동을 조언하거나 회사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해 연설하는 것이 주업무다. 이들이 직접 영업과 투자에 참여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브리오디 “박태준 전 총리는 칼라일 고문”

브리오디는 칼라일의 전형적인 투자 활동 사례로 한국을 든다. 부시 전 대통령은 1999년 5월27일 한국을 방문해 김종필 국무총리·박태준 자유민주연합 총재·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최태원 SK텔레콤 회장·정인영 한라그룹 회장을 잇달아 만났다. 브리오디는 “부시 전 대통령은 이틀 동안 서울에 머무르면서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연쇄 접촉하면서 칼라일의 한국 내 투자 활동을 지원했다”라고 말했다.

부시 전 대통령이 출국하자마자 칼라일그룹은 외환 위기에 허우적거리는 한국에 1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잇달아 만도기계 인수 협상을 벌이고 한미은행 지분 36.5%를 매입해 1대 주주로 떠올랐다. 울먼 부사장은 “부시 전 대통령은 전직 국가 원수로서 방한한 것이지 칼라일의 이익을 위해 한국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 또 브리오디의 주장과 달리 칼라일그룹이 한국에 투자한 액수는 2억5천만 달러이고 만도기계를 인수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칼라일그룹의 한국 내 투자 활동과 관련해 주목되는 인물은 두 사람이다. 박태준 전 자민련 총재와 김병주 칼라일아시아본부 회장이다. 브리오디는 “박태준 전 총재는 1998년부터 칼라일아시아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칼라일의 한국 내 투자 활동을 직·간접으로 도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울먼 부사장은 “칼라일 웹사이트에 올라 있는 자문단 명단에 올라 있지 않은 인사는 칼라일 고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칼라일 웹사이트에는 박태준 전 총재의 이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박씨는 칼라일아시아와 아무 관련이 없는 셈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김병주 회장이 박씨의 사위다.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생긴다. 사위가 칼라일아시아 대표인데 장인이 도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가 하면, 거꾸로 박씨의 후광을 입고 김회장이 칼라일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김회장의 이력과 투자 성과만을 보면 박씨의 후광에 힘입어 칼라일아시아 대표까지 오르지는 않은 듯하다. 김회장은 골드먼삭스와 샐러먼스미스바니에서 합병·매수 업무를 익힌 하버드 경영학 석사 출신 경영인이다. 1999년 칼라일에 입사해 한국사무소를 이끌면서 한미은행과 강남 센트리빌딩을 매입해 막대한 투자 수익을 거둔 공로로 칼라일아시아 대표까지 승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과 관련된 두 번째 논란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과 관련되어 있다. 부시 현 대통령은 2001년 1월 취임하자마자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했던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을 중단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믿을 수 없는 불량 국가’로 규정하고 대북한 강경 노선을 천명했다. 그때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아들에게 강경 일변도인 북한 정책을 중단하고 유화 정책을 쓰라고 권유하는 메모를 전달했다. 당시 백악관도 이 메모의 존재를 인정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가 작성한 이 메모는 아버지 부시를 통해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전해졌다.
“9·11 테러로 가장 큰 이익 본 곳이 칼라일”

부시의 대북한 강경 정책은 한국의 시장 전망을 어둡게 해 한국에 2억5천만 달러를 투자한 칼라일아시아가 뜻하지 않게 불이익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브리오디는 “아들 부시가 채택한 정책으로 인해 칼라일그룹이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한 아버지 부시가 대북한 유화 정책을 아들에게 권유한 것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울먼 부사장은 “터무니없는 억측이다”라고 반박했다.

이 ‘터무니없는 억측’은 미국 현직 대통령의 아버지이자 전직 대통령인 부시가 로비 논란에 휩싸인 회사로부터 돈을 받으면서 고문 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고 있다. 친공화당 성향 시민단체로 알려진 주디셜와치는 “칼라일그룹이 모양새를 좋게 하기 위해 이 사람들(전직 고위 인사)을 고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 출신이자 현직 대통령 아버지가 사기업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라고 밝혔다.

부시 전 대통령은 또 다른 악재를 만났다. 9·11 테러가 발생하던 날 오전 워싱턴 D.C. 리츠칼튼호텔에서 테러 주모자로 알려진 오사마 빈 라덴의 이복 형제인 샤픽 빈 라덴과 함께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영진·고문·투자자·중동 부호 등이 참석하는 칼라일그룹 연례 투자회의에 부시 전 대통령은 고문 자격으로, 빈 라덴 가문의 자산 관리인인 샤픽 빈 라덴은 투자자 자격으로 참석했다.

브리오디는 “9·11 테러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집단은 군수산업체에 투자한 칼라일그룹 같은 회사였다”라고 말했다. 미국 상·하원은 4백억 달러 규모의 예산을 긴급 승인했고, 3백30억 달러 규모의 2002년 국방 예산안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육군은 6억6천5백만 달러 규모의 크루세이더(자주포) 개발 계약을 유나이티드 디펜스와 체결했다.

칼라일그룹은 또 9·11 사태가 발생한 지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유나이티드 디펜스를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유나이티드 디펜스는 증권거래소 제출 서류에 ‘9·11 테러를 계기로 미국 의회는 국방 예산 지출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날 상장으로 칼라일그룹은 2억3천7백만 달러의 투자 수익을 거두었다.

브리오디는 “아버지 부시는 칼라일그룹에 직접 투자하고 있어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울먼 부사장은 “부시 전 대통령이 칼라일 펀드에 투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군수산업체에 투자하는 펀드에는 자금을 맡기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칼라일그룹은 올해 1월 루 거스트너 전 IBM 회장을 신임 회장으로 영입하고 웹사이트를 전면 개편하는 등 정치 편향의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올해 초에는 웰시카슨앤더슨&스토와 함께 거액을 투자해, 퀘스트커뮤니케이션의 업종별 기업 안내 서비스 업체인 퀘스트덱스를 인수했다. 하지만 온갖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전직 고위 인사의 명단을 웹사이트 명단에서 없애지 않으면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을 듯하다. 울먼 부사장은 “전직 고위 인사를 영입하는 이유에는, 그들이 가진 대중의 신뢰를 활용해 칼라일그룹의 신인도를 높이겠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폭스 멀더는 에서 진실 가까이는 접근하지만 실체를 규명하는 데는 실패한다. 브리오디도 개연성과 추론을 통해 칼라일그룹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칼라일그룹 주위를 배회하면서 진실을 추적하고 있다. 그 진실은 ‘대박’을 터뜨린 투자 업체와 군산복합체의 ‘화신’ 사이 어느 곳에 있을 것이다. 드라마 도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시청자를 애태우며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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