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르네상스 활짝 열리는가
  • 고재열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3.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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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장금>의 인기 덕인가. ‘음식 전쟁’의 최전선 서울 청담동 푸드밸리에 고급 한식 레스토랑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세계적 트랜드인 유기농 음식과 결합한 퓨전 한식 또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대한민국 소비 문화 1번지 청담동. 업그레이드 된 압구정동이라는 의미로 ‘윗구정동’이라고 불리는 첨담동에서 요즘 때아닌 ‘전쟁’이 치열하다. 입는 사치에 혈안이던 명품족이 라이프 스타일에 사치를 부리는 웰빙족으로 진화하면서 ‘음식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청담동 푸드밸리의 고급 레스토랑들은 출혈 경쟁을 마다하지 않는다. 주방장이든 식재료든 인테리어든 무조건 최고급을 고집한다. 수억원씩 인테리어 비용을 들이고, 평당 1천만원씩 임대료를 지불하는 고급 레스토랑조차도 유행에 맞지 않으면 6개월을 채 못 버티고 사라진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시작으로 중식과 일식, 퓨전 요리와 아시안 푸드를 거쳐 오가닉(유기농) 푸드까지, 자고 나면 새로운 레스토랑이 들어서고, 먹고 나면 있던 레스토랑이 사라지는 청담동 푸드밸리에 ‘앙팡 테리블’(무서운 신예)이 나타났다. 바로 한식과 한식 퓨전 고급 레스토랑들이다.

궁중 음식을 소재로 한 MBC 드라마 <대장금>의 인기로 탄력을 받은 한식과 한식 퓨전 레스토랑이 차세대 주자로 빠르게 떠오르고 있다. 토박이 ‘청담족’이 한식으로 유턴하면서 청담동 워너비(청담족을 닮으려는 젊은 세대)들까지 한식에 귀의하는 미메시스 효과(모방에 의한 전파)가 일어나고 있다.

신세대 입맛 맞춘 미래의 한식 지향

청담동 푸드밸리의 한식 쿠데타 선봉장은 역설적으로 외국에서 공부한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들이다. 외국 유명 레스토랑들을 두루 경험한 이들은 한식을 고급화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본래 양식이 주름잡고 있던 청담동에 한식의 깃발을 꽂았다.

최초의 퓨전 한식 레스토랑인 ‘드 꼬레’(517-4727)도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구절판으로 애피타이저를 내놓고, 배 샐러드와 만두 수프로 입맛을 돋우며, 메인 요리로 쌈밥 한 상, 디저트로 한식 다과와 오미자차를 내놓는 드 꼬레의 테마는 ‘미래의 한식’이다. 드 꼬레를 기획한 디자이너 케이 킴은 “드 꼬레의 음식은 한국인이 앞으로 어떻게 먹고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를 보여준다”라고 설명했다.
드 꼬레는 고급 한식집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관대작과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고급 한식집이 신세대들의 데이트 명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레스토랑의 노 흥 매니저는 “이곳 음식은 보수적인 입맛을 고집하는 노년층의 혀가 아니라 새로운 맛을 찾는 신세대의 혀에 고정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국수 전골 전문점인 한우리(545-3334)는 전통 식당을 어떻게 신세대 감각에 맞게 변모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우리는 전통의 맛을 선호하면서도 분위기는 현대적인 것을 좋아하는 신세대 미식가의 취향에 맞추어 작가 문준영씨의 공예품으로 실내를 장식했다. 특히 신세대 취향으로 업그레이드한 한우리의 2층은 ‘청담족’의 데이트 명소가 되었다.

외양을 변화시키면서도 한우리는 맛만은 전통을 고집했다. 이곳에서는 전통적인 맛을 유지하기 위해 옥상에 직접 방앗간을 두고 밀가루를 빻고 있다. 김용희 실장은 “입맛이 바뀌는 데는 보통 3대가 걸린다. 요즘 아이들이 서양 음식에 길들어 있지만 한식을 고급화한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청담동 레스토랑 컨설턴트로 꼽히는 노희영씨는 한식이 세계적인 트렌드인 오가닉 푸드와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고 말한다. 한국은 비빔밥 등 재료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먹는 뿌리 깊은 육안 요리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오가닉 푸드와 맞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청담동 퓨전 열풍을 주도하며 바스타 파스타(이태리식), 궁(한식 퓨전), 반(오가닉 푸드), 호면당(아시안 퓨전) 등을 기획했던 그는 최근 오가닉 레스토랑 더 마켓 오(548-5090)를 내놓았다. 더 마켓 오에서는 강진맥우와 오청면(퓨전 해장국)·오선면(퓨전 미역국)·오채면(퓨전 김칫국) 등 한식을 중심으로, 애피타이저와 디저트로는 아시안 푸드를 활용하는 등 각국 요리의 장점을 모은 ‘토털 푸드’를 추구하고 있다. 청담족의 미각이 ‘귀미 본능’을 일으키며 한식으로 유턴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노씨는 조만간 완벽하게 한식 식단으로만 구성된 오가닉 푸드 레스토랑을 열 계획이다.

노씨의 다음 프로젝트 중의 하나는 갤러리아 명품관에 김칫독과 장독을 묻는 것이다. ‘김치 부티크’ ‘간장 부티크’를 만들어 명품 김치와 명품 간장을 선보이겠다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동방에 선남선녀를 보냈듯이 건강에 최선의 가치를 두고 있는 구미인들이 신선하고 담백한 한식을 찾아올 것이다. 그 때를 대비해 한식을 명품화해야 한다.”

고급 생활 도자 전문 업체인 광주요에서 최근 문을 연 더 가온(3446-8411)은 ‘명품 한식’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개장한 곳이다. 청담족은 광주요가 명품 도자에 어떤 음식을 어떻게 담는지를 보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더 가온은 명품 도자를 활용한 다양한 상차림을 보여주며 우리 음식 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했다.

청담족이 더 가온을 주목한 또 다른 이유는 퓨전 요리 전문가 윤정진씨의 변신이었다. 원래 양식을 전공한 윤씨는 청담동에서 퓨전 요리 열풍을 일으키며 승승장구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주특기를 버리고 한식 조리사로 거듭난다는 사실이 청담동 호사가들의 관심을 모았다. 완벽한 변신을 위해 윤씨는 2년 동안 한식의 숨은 고수들로부터 조리법을 전수했다. 숨은 고수들은 바로 각 기업 오너들의 주방 아주머니들이었다. 이름난 미식가인 광주요 조태권 회장댁을 비롯해 각 기업 오너의 주방을 돌며 조리법을 전수한 그는 종가 음식과 함께 전통 음식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사찰 음식을 소문난 공양주 보살님들로부터 배웠다.

한식 수련을 쌓은 윤씨가 내놓은 회심의 요리는 바로 홍계탕이다. 중국 요리 중 최고봉으로 꼽히는 불도장과 맞붙을 한식의 대표 선수로 그가 내놓은 홍계탕은 홍삼을 달인 물에 오골계와 전복·송이를 넣고 끓인 탕으로 체질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좋은 보양식이다. 가장 질이 좋은 홍삼을 가지고 홍계탕을 끓일 경우 한 그릇 가격이 30만원을 호가한다.
윤씨의 변신과 함께 청담족의 관심을 모으는 것은 ‘방배동 아줌마’로 잘 알려진 최경숙씨가 이곳에 레스토랑을 연다는 사실이다. 각 재벌가에서 시집보내기 전에 딸들에게 음식 조리법을 가르치기 위해 초청한다는 최씨의 청담동 입성은 한식 부흥의 화룡점정으로 받아들여졌다. 외국처럼 본격적인 오너 셰프(주방장이 주인인 레스토랑) 체제가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청담동에서는 이미 오너 셰프 체제로 성공한 한식 레스토랑이 있다. 바로 가수 싸이의 어머니로 유명한 김영희씨가 운영하는 쁘띠 씨즌스(546-6782)이다. 30년 맏며느리 경험을 바탕으로 주방장을 맡고 있는 김씨는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 한식 조리사들을 데리고 정통 한식을 선보이고 있다. 화학 조미료를 쓰지 않고 천연 재료로 맛을 내는 쁘띠 씨즌스의 한식은 가장 전통적인 한식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쁘띠 시즌스에서는 외국인이 육회에 달걀을 비비고 갈치조림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서울 음식 위주로 식단을 구성하는 김씨는 “일본에서도 전통에 충실한 교토의 가이세키 요리가 최고로 인정받는다. 궁중 음식과 양반 음식을 되살려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한식 레스토랑은 과연 청담동 푸드밸리에서 맹주가 될 수 있을까? 노희영씨는 “레스토랑은 무조건 맛있어야 잘 된다. 청담족의 단련된 혀는 결국 한식을 선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더 가온의 윤정진 주방장은 “재료는 거짓말을 안 한다. 신토불이 재료로 만드는 한식이 청담족의 입맛을 제패할 것이다”라고 확신했다.

벌써부터 해외 진출 시나리오를 짜고 있는 곳도 있다. 곧바로 더 가온의 중국 지점을 내겠다는 광주요 조태권 회장은 “스시의 세계화는 단순히 일본 음식의 세계화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본 자기와 일본 술(사케)과 차 문화의 세계화 등 일본 문화의 총체적인 세계화였다. 우리도 한식을 통해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청담동 한식 레스토랑 주인들에게는 공통된 버릇이 있다.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밤이면 드라마 <대장금>을 보면서 주먹을 불끈불끈 쥐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속으로 ‘그래 한식이야’라고 되뇌인다. 그들의 열정을 보면 드 꼬레의 서까래가, 한우리의 방앗간이, 더 마켓 오의 장독이, 더 가온의 우리 도자가, 쁘띠 씨즌스의 청사초롱이 뉴욕과 파리에서 한국 문화의 매력을 뽐낼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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