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날조에 일본 전체가 가담했다."
  • 최무장(건국대 교수·고고학) ()
  • 승인 2000.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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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첨단 과학 도움 없이 불가능… “일본인 전체가 가담한 셈”
2000년 11월 5∼6일 전국 텔레비전과 일간 신문에, 일본 미야기(宮城) 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에서 출토된 60만∼70만 년 전 타제 석기가 완전히 날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사적 사실을 날조해 일본인의 긍지를 높이려는 의도는 후지무라 신이치(50) 개인의 날조가 아니라 일본인 전체의 날조라고 생각한다. 문화에 대한 해석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문화 현상 자체를 조작하는 일은 개인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석기 고고학의 유적과 출토 유물에 대한 해석, 연대 산출 등은 지질학·화학·물리학과 최첨단 과학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유기물체(organic materials)가 없었다 하더라도 타제 석기를 유형학적으로 분류하는 일은 고등학교 출신인 후지무라 신이치의 개인 판단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문제의 가미타카모리 유적 평가는 일본 교토(京都)문화박물관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일본 최고 수준의 구석기 고고학자들이 참여해 그 결과가 발표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1997년 교토문화박물관은 <인류가 걸어온 길>이라는 학술 잡지에 그간 세계 각지 인류사 발견 사례를 앞 장에 제시하고, 그 중간에 가미타카모리 유적을 삽입했다. 여기에는 가미타카모리 유적이 ‘중기 홍적세, 민데 빙하기’에 해당하며, 또한 이웃 중국의 란톈 원인(藍田原人·80만 년 전)과 베이징 원인(北京原人·70만∼20만 년) 사이에 해당하고, 불을 사용했다는 설명도 제시되었다.

위 잡지에는, 60만 년 전 가미타카모리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 8점 중 1점이 불에 탄 흔적이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석기 7점 중 4점은 플린트(수석제)이며, 1점은 화강암 같고, 또 다른 석기는 혈암(shale)제 같은데, 실질적으로 혈암제 타제 석기는 구석기시대 석기로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에 탄 석기는 초퍼(강자갈 석기)로 보이며, 석영암제로 보인다. 그리고 그 다음 사진 ‘50만 년 전의 미야기 현 다카모리(高森) 유적’의 석기(73쪽 오른쪽 위 사진)는 색깔 있는 석영과 수석제 등으로 보이는데, 이는 모두 유럽제 석기라고 여겨진다.

미야기 현 다카모리 유적의 층위는 두 시기로 나뉘는데, 아래층 60만 년 전은 가미타카모리 유적, 윗층 50만 년 전은 다카모리 유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필자가 이번 조작극이 후지무라 신이치 개인의 작품이 아니고 일본인 전체가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까닭이 교토문화박물관이 편집한 <인류가 걸어온 길>에 뚜렷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조작극의 배경으로서 석기가 들어 있던 흙구덩이 사진까지 제시되어 있다. 즉 출토 층위까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 원인 유적은 1921년 스웨덴의 안데르슨에 의해, 동굴 유적 22개 중 1개로 확인되어 1927년에 정식 발굴되면서 원인 화석으로 판정되었다. 그리고 층위 석기와 더불어 뒤늦게 불을 사용한 흔적, 특히 석기 등이 중국인 학자 페이원중(裵文中)에 의해 확인되었다. 베이징 원인 유적은 미국의 재정 지원과 캐나다인 D. 블랙(후에 미국 이주)의 베이징 원인 화석 분류에 의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으며, 특히 베이징 원인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학자 H. 브륄에 의해 평가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자체 능력으로 여러 분야 전문가가 협조해 과학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어떤 분야를 개인이 조작해 인정받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의 현실은, 북한 평양의 대동강가 상원 검은 모루 유적에 대해 60만∼40만 년 설이 제기되었지만, 1966년 발굴되어 35년이 지난 오늘의 시각에서 볼 때, ‘한반도 전기 구석기시대층으로 자갈층에서 타제 석기와 원숭이(Macaca sp.) 등을 동반한 동물 화석 등이 출토되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남한 한탄강 유역 ‘전곡리’ 유적의 경우는, 주먹도끼(Handaxe) 문화 층위로 대표되는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아닌, 중기 구석기시대(8만∼3만5천 년 전)의 층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구석기시대 유적의 문화 층위를 이상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유적의 위치·층위·동식물 화석·인류 화석과 석기가 동반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현실은 야외 유적(open air site)이 모두 산성 토양이어서 유기 물질이 전무하므로 층위와 석기가 연대를 추정하는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중국은 동굴 유적(cave site)과 야외 유적이 비교적 균등하게 산포해 연대 설정에 큰 어려움이 없다. 중국 화베이에는 동굴 유적이 많고 남쪽에는 야외 유적이 많은 반면, 우리나라 북한에는 동굴 유적이 많고 남한에는 야외 유적이 많은 편이다.

중국·한국·일본 등의 구석기 문화 내에서는 시베리아와의 관계도 무시될 수 없다. 문화는 결코 독립·독자 발생을 상상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시베리아 지역의 전기와 중기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주먹도끼가 출토된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주먹도끼는 중기 유물일 가능성이 있지만 뚜렷하지는 않다. 남한의 전곡리 유적에서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극소수의 주먹도끼가 출토된다. 하지만 이것은 주먹도끼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은 아니다.

일본은 최근 교토문화박물관의 잡지에서 5천여 곳에 구석기 유적이 있다고 제시했는데 필자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구석기 고고학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55만㎡ 땅덩이 에서도 일본과 같은 엄청난 수의 구석기 유적은 나오지 않았다.

하한 기원전 1만년부터 상한 50만∼100만 년까지 문화 유적에 대한 연구는 조작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지질·동식물·인류 화석과 석기에 대한 철저하고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지역 제한 없이, 예를 들면 시베리아·중국·한국과 일본 등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일본 나가사키(長崎) 현 후쿠이(福井) 동혈 제3층의 토기 연대가 기원전 1만7백50∼1만4백50년이라는 주장도 거짓이 아닌지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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