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취소' 일파만파, 중국 팬들 눈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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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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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선양 현지 취재/공연 취소로 중국 팬들 눈물 바다… 대중 상품 황금시장 잃을 수도
지난 10월7일, 중국 선양의 랴오닝성체육관 앞은 오후 5시께부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중국 청소년들이 한국 가수의 공연을 보려고 물밀 듯 밀려들어 체육관 앞 도로가 한때 마비되기도 했다. 체육관 앞마당에는 한국 가수 클론·이정현·홍경민의 노래가 크게 울려퍼졌다.

6시30분, 한국 로커 고려진의 무대로 시작된 공연은 9시20분까지 뜨겁게 이어졌다. 몇몇 10대 여학생은 ‘NRG 사랑해요’라는 한국어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야광봉을 흔들며 ‘NRG! NRG!’를 외치기도 했다. 무대 바로 앞에 자리 잡은 여학생들은 중국 공안(경찰)의 저지를 뚫고 나가 가수 손을 잡거나 손수건으로 가수 얼굴의 땀을 닦아주기도 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관객들은 무대 위로 선물과 야광봉을 던지며 열광했고, 남학생들은 종이 비행기 수십 개를 접어서 날렸다. 이미 중국에서 스타덤에 오른 NRG와 T.T.MA뿐 아니라, 중국에서 처음 공연하는 신인 댄스그룹 MP-5에게도 중국 소녀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선양의 NRG 공연은 중국에서 부는 ‘한류(韓流·한국 유행 음악) 열풍’이 얼마나 강한가를 한눈에 확인시켜 주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일기 시작한 그 바람이 중국 중남부는 물론 동북 지역까지 영향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증명해 보인 것이다.

여학생 팬들은 NRG가 입국한 10월5일 12시30분께부터 그들의 뒤를 따라다녔다. 아예 가수들이 머무르는 쌍마오 호텔에 투숙하거나 호텔 로비에서 밤을 지새우는 청소년도 여럿 눈에 띄었다.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NRG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신인인 MP-5는 입국한 지 나흘 만에 여학생 팬들을 몰고 다니는 스타로 떠올랐다. MP-5는 그 여세를 몰아 10월8일 랴오닝성 텔레비전의 <스타와 함께>라는 쇼 프로그램을 1시간 동안 녹화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선양 공연이 열리기 나흘 전인 10월3일 베이징에서는 선양과는 다른 종류의 한류가 몰아닥쳤다. 1990년 아시안게임이 열린 베이징올림픽체육장에는 한국 가수 클론·안재욱·이정현·NRG·베이비복스를 기다리는 여학생들이 아침부터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날 오후 7시로 예정된 <한류 스타 대출전> 공연에 참가하는 가수들이 베이징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공항에서도 호텔에서도 그들은 이렇게 말했던 터였다. “그들이 온다고 약속했으니 반드시 올 것이다. 우리는 믿는다.”

공연이 취소되어 철거되는 무대를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카메라를 들이댄 CCTV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몇 주 동안 돈을 모아 1백30 위안(약 1만8천8백원)짜리 표를 샀다. 베이비복스 팬인데, 오늘도 새벽부터 기다렸다. 너무 화가 난다.” 그 여학생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자 공연장 입구에는 청소년 수백명이 몰려들어 한국 가수 이름을 연호했다. 어떤 여학생들은 ‘NRG를 사랑해’라고 쓴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입구를 지켰으며, 가만히 서서 눈물을 흘리는 팬들도 눈에 띄었다.

선양 공연에서 NRG는 공연을 끝내며 중국 가수 쑨남의 노래 <이별>을 관객과 합창했다. 공연을 마친다는 의미로 부른 노래였지만, NRG의 선양 공연은 중국에서 그들의 마지막 콘서트가 될지도 모른다. 10월3일 베이징 공연에 불참한 가수들은 물론 한국 가수의 중국 공연 자체가 원천 봉쇄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 정부가 공연이 취소된 것을 두고 ‘인민을 모욕했다’며 강경한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10월3일은 국경절 기간이었다. 10월1일부터 1주일간 전국민이 건국을 기념하는 뜻깊은 ‘명절’이어서 중국 당국의 반응은 어느 때보다 민감했다. 가수들이 머무를 예정이던 베이징 구오지밍란 호텔에서는 10월2일부터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열려 한국 가수 ‘공수 대책’을 논의했다.

그 회의에 참석한 중국 정부의 문화부·공안 관계자와 중국 문화부 소속 상하이연출공사 대표, 중국 기획사 대표 들은 그 이튿날 오후 2시30분까지 밤을 지새우며 대책을 세웠으나, 한국 가수의 공연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회의장 앞에서 취재하며 인터뷰를 요청한 <시사저널> 기자와 MBC 프로듀서에게 그들은 통역을 통해 이렇게 답해 왔다. “이 근처에 있지 말라. 봉변할지도 모른다.”

공연이 취소되자 대책회의는,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그 사실을 호텔·공연장·매표소 앞에 붙였고, 그날 저녁 베이징교통방송과 베이징케이블TV는 취소된 사실과 더불어 중국 기획사의 이름으로 ‘사과한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한국에서는 민간 차원의 촌극으로 끝날 만한 일이, 중국에서는 ‘인민을 우롱하고 중국 정부를 모욕한 중대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사건은 부산의 공연 기획사 메리트21의 이름을 빌려 공연을 추진하다가 10월1일 가수들에게 개런티는 물론 비행기표도 마련해주지 않은 채 잠적한 강 아무개씨가 저지른 일이다. 해당 가수가 소속된 회사 대표들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가 최대 피해자인데, 중국측이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며 반발했지만, 중국 정부는 그것을 잠적한 한국 기획자와 가수를 분리해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한국측의 잘못으로 인식하고 있다. 사기를 치든 피해를 보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국내 사정이기 때문이다.

10월3일 공연이 취소된 후 중국 문화부 주변에서는 제재 조처에 관한 말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소식들은 제재 여부가 아니라 모두 제재 정도에 관한 것들이다.

선양 NRG 공연장에서 만난 신화사 통신 샤오니 기자는 “9월 말에 상하이를 다녀왔는데, 그쪽에서도 10월5일로 예정된 공연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공연이 성사되지 않아 안타깝지만, 전례로 보아 반드시 제재 조처가 따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국에 살면서 중국 사정을 비교적 잘 아는 한국 사람들의 의견도 같다. 중국 정부는 이같은 사건에 대해 반드시 ‘보복’한다는 것이다. 납꽃게 사건으로 한국 정부가 중국 농수산물 검역을 강화하자, 한 달 전 중국 정부가 한국 보따리 장사를 하루아침에 금지시켰듯이.
한국 가수의 베이징 공연 취소 사태는 한 가수의 매니저가 말한 대로 ‘대대적인 무료 콘서트를 열어 중국 팬들에게 사과하고 싶지만, 그래도 안 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간단하게 넘겨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1988년부터 중국을 드나들며 무역업을 해온 최원석씨(장보고통상 대표) 같은 이들이 보기에, 이번 중국 공연 취소는 ‘나라 망신’이다. 재중국한국인회 신영수 회장은 “한국인 전체에 대한 영향이 작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아깝고 아쉬운 것은 한국 대중 문화, 그 가운데서도 상품성과 전파력이 가장 높고 강력한 대중 음악이 중국과 화교권이라는 세계 최대의 황금 시장을 놓칠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그 황금 시장은 1996년부터 중국에 한국 대중 음악의 씨앗을 뿌린 이들(90쪽 관련 기사 참조)에 의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해, 올해 들어서 그 과실을 막 따려던 참이었다.

시장뿐만 아니라, 한류 열풍으로 고양된 한국 이미지가 중국에서 느닷없이 변할 수도 있다. 중국 현지의 한국 공연 관계자나 한국 언론 특파원들이 공연이 취소되자 ‘한국대사관이 빨리 나서서 신문에 사과 광고를 내고, 중국 당국을 찾아가 제재 강도를 낮추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국 대중 음악의 중국 진출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 있기 전까지 한류는 대단한 기세로 중국 전역을 강타했다. 지난 2월 H.O.T가 베이징 공인체육관에서 공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한류 열풍은 베이징을 중심으로 중국 전체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1992년 서태지와아이들 이후 한국 시장을 석권한 댄스 음악은, 최소한 동북아시아에서는 최고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갈수록 화려해지는 춤과 의상, 가수들의 잘생긴 외모는 중국 청소년들에게 문화 충격을 안겨주었다. 발라드가 주류인 중국 대중 음악계에 침투한 한국 댄스 음악은 10대들의 눈과 귀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중국의 젊은 세대는 1990년대 한국 신세대와 비슷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것에 민감하고 변화를 갈망하며, 자기 주장이 강하다. H.O.T 음반을 비롯해 한국 대중 음악 음반 50장을 소개하고 올해 H.O.T·NRG의 베이징 공연을 기획한 우전소프트 김윤호 사장은 “한국 댄스 음악이 중국 10대 문화를 만들어냈다”라고 말했다. 한국 댄스 음악이 중국 10대에게 ‘우리만의 문화’를 통한 세대 정체성을 갖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젊은 세대가 한국 음악에 열광하자 무수한 불법 복제 음반이 나타났다. 베이징·상하이·톈진·충칭·선양 등 중국의 큰 도시 어디에서든 H.O.T·안재욱·NRG의 사진과 노래를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복장과 헤어스타일은 유행을 넘어 이제는 보편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놀라운 점은 한류가 중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5월 인구 60만인 작은 도시 계림에서 열린 아시아나항공 취항 기념 공연에서까지 한국 가수들은 ‘오빠·형 부대’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그 열기는 하이난성·광시성·쓰촨성 등 남쪽으로 더 거세게 번져가고 있다.

중국 청소년이 한국 음악에 깊이 빠졌다 해도 지금까지는 대중에게 ‘입맛 들이기’ 단계였다. 정규 음반은 찍자마자 바로 다음날 복제되는 불법 판에 밀려 상품으로서 제구실을 거의 하지 못한다. 심지어 중국에 진출하지 않은 가수의 불법 음반이 음반 가게 진열대에 버젓이 꽂혀 있으며, 한국의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을 녹화해 만든 VCD까지 판치고 있다.
클론·H.O.T·안재욱·NRG가 그동안 베이징·상하이·선양에서 펼친 정규 공연은 지금까지 ‘외화내빈’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 중국 특유의 공연 환경이 있는 데다, 아직도 공연 티켓 구매층이 일부 청소년층에 국한되는 까닭에 공연 자체는 막대한 적자를 보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월7일에 열린 NRG 공연은, 베이징·상하이 공연 취소 여파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만석 가운데 제값에 팔린 티켓은 천장도 채 되지 않았다. 7천여명이 운집한 공연장의 나머지 관객은 대부분 ‘공짜표’를 들고 들어 왔다. 열기는 뜨겁지만, 열기를 주도하는 10대는 대개 소수 상류층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값비싼 택시를 타고 가수들을 쫓아다니며, 때로는 어머니와 함께 중형 자가용을 타고 가수를 따르기도 한다. 그들은 5백80 위안(8만2천여원)이 넘는 거금을 들여 티켓을 사서 무대 바로 밑에서 객석 분위기를 주도한다. 처음에는 겸손하게 중국 무대에 올랐던 한국 가수들은 그 열기가 곧 돈이라고 착각하게 마련이다. 그 열기는 중국인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중국에 한국 댄스 음악을 심어온 한국 제작자들에게서 나왔다.

이제 막 그 투자가 조금씩 열매를 맺으려 하는 때이다. 마이클 잭슨 공연을 한국 기획사가 투자·주관하고 한국 기업이 스폰서로 나서는 것처럼, 중국 기획사가 조심스럽게 한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내년 2월로 예정된 안재욱의 중국 4대 도시 순회 공연에는 중국 투자자가 2억원을 제시해 가계약을 맺었고, 나머지 가수들도 이제서야 ‘돈이 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중국에 진출한 한국 가수들은 대개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다. 국내에서 2천만원도 받지 못하는 개런티를, 중국에서는 항공료·체재비를 제외하고도 4천만∼5천만 원을 요구하고 있으며, 심지어 팬 사인회를 열어 홍보를 하자는 제안에 2천만원을 요구한 가수 매니저도 있다. 국내에서 하던 ‘한탕주의’ 습성이 중국에서도 발휘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몇몇 한국 가수들은 중국에서 ‘제 맘대로 하기’ ‘남 배려 안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중국의 음악·무대 환경에 맞추어 연출하려는 기획자가 있는데도 ‘제 맘대로’ 공연을 꾸미려 하며, 무대에 함께 서는 후배 가수를 도와주기는커녕 무시·견제하는 양상까지 보인다.

10월7일 선양 NRG 공연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프로그램의 중간에 공연한 NRG는, 다음에 나오는 신인 댄스그룹 MP-5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이별 노래를 부르며 파장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분위기 때문에 관객 30% 가까이가 빠져나갔으며, 후배 가수들은 분위기를 잡으려고 ‘오버’를 해가며 춤추고 노래해야 했다. 이같은 장면은 중국인 투자자를 ‘유혹’하기는커녕 그들을 쫓는 결과밖에 낳지 않는다.
공연과 음반 제작을 통해 중국에 한국 음악을 소개해온 한 기획자는 “중국에서는 장기전으로 가야 하는데, 가수들이 너무 협조하지 않는다. 팬을 확보하려고 개런티 없는 공연도 하는 중국 최고 가수 왕페이의 태도를 좀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일단 한국 가수에 대한 중국의 제재 조처를 지켜본 다음, 내년부터는 아예 중국 신인을 뽑아 한국에서 상품으로 만들어 오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베이징 공연장의 완성된 무대 양켠에는 ‘한류 구펑’이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구펑은 ‘허리케인’이라는 뜻이다. 허리케인 조짐을 보이던 한류 열풍은 앞으로 한 달 내에 발표될 것으로 보이는 중국 정부의 제재 조처에 따라 미풍으로 변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 중국 정부가 초강경 조처를 내린다면 공연은 물론 음반마저 중국 시장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질지 모른다.

이같은 중국 사정을 잘 아는 음악 관계자들이 한국 정부의 신속한 대책을 촉구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처럼 찾아온 절호의 기회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중 한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민간 이벤트에 대해 중국 정부가 조처를 취한다는 것이 대국 처지에서 우스운 일이 아닌가. 만일 불합리한 조처를 취한다면 그때 가서 시정을 요구하겠다”라고 말했다.

중국 공연은 중국 문화부가 ‘비준’을 내주며, 이번 공연의 주최측 가운데 하나는 문화부 산하 기관, 곧 정부 기관인 상하이연출공사였다. 중국 공연은 이벤트 업자들이 꾸미는 민간 차원의 일만은 아닌 것이다.

중국 대륙을 달구었던 <사랑이 뭐길래> <별은 내 가슴에> 같은 한국 드라마와 마치 경쟁하듯이 드넓은 시장으로 나아가던 한국 대중 음악의 기세는 중국에서 ‘한탕’을 노린 강 아무개라는 기획자에 의해 한풀 꺾이고 말았다. 해당 가수들도 큰 타격을 입었지만, 중국 현지 사정은 ‘한국인끼리의 사기극’보다 더 급박하고 심각했다. 최소한 2만여 관객은 중국 정부가 허가한 공연이 취소되는 바람에 국경절의 흥겨운 기분을 망쳤기 때문이다. 공연장에서 무대를 해체하던 한 중국 스태프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가수들은 돈밖에 모르는 것 같다.”

글 성우제 기자 wootje@e-sisa.co.kr 사진 이상철 기자 lee@e-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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