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회창, 제2의 격돌
  • 소종섭 기자 (kumkasisapress.com.kr)
  • 승인 2003.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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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8일이면 대선 1주년이다. 하지만 1년도 안되어 승자인 노무현 대통령이나 패자인 이회창 전 총재나 또다시 심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불법 대선 자금에 발목이 잡혀 한 사람은 정계 은퇴를 배수진으로
청와대 기자실이 순간 술렁였다. 여기저기서 “또야?” “이번엔 정계 은퇴래”하는 쑥덕공론이 오갔다. 그러기를 10여분. 윤태영 대변인이 대통령과 4당 대표의 100분 토론에 대한 공식 브리핑에 나섰다.

“일각에서 공정 수사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대해 노대통령은 ‘측근 문제는 이미 특검법이 통과되어 있으므로, 대선 자금 문제도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면 특검을 통해 검증 받을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당시 노후보측이 쓴 불법 선거 자금의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할 용의도 있다는 게 대통령 말씀이다.”

이 날(12월14일) 회담의 주요 의제였던 이라크 파병안에 대해 정치권이 동의를 하느냐 마느냐 정도를 기사거리로 준비하던 청와대 기자실이 발칵 뒤집혔다. 재신임보다 훨씬 센 정계 은퇴 발언이 대통령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10분의 1이라는 확실한 잣대까지 제시하면서다.

청와대 참모들은 ‘10분의 1’ 발언이 나온 배경을 두 가지 정도로 설명한다. 우선 야당이 제기하는 불공정 시비에 대한 적극적 반박의 의미다. 검찰이 불공정해서가 아니라 절대값에서 워낙 차이가 나는데, 야당이 괜히 편파 수사라고 몰아붙이며 물타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 “이광재 1억이 차떼기보다 큰가” 격노

여기에 큰 도둑과 작은 도둑이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데 대한 반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은 여당일 때는 안기부 국세청을 동원해 불법을 저지르더니 야당이 되어서도 그 버릇을 못 버리고 기업에 대한 협박을 일삼았다. 그런데 그런 파렴치범과 그나마 깨끗하게 선거를 치르려고 노력한 쪽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문제 의식을 노대통령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참모는 “이광재 1억이 한나라당이 현대자동차로부터 받은 100억원 차떼기보다 더 크게 보도되는 것을 보고 노대통령이 몹시 분개했다”라고 전했다. 문희상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이 이를 가라앉히느라 무척 애를 썼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런 청와대측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번 노대통령의 폭탄 발언은 재신임에 이은 제2의 승부수 성격이 강하다.

사실 노대통령 측근인 안희정씨 구속을 계기로 검찰의 대선 자금 수사는 한나라당에서 대통령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검찰 내부에서조차 ‘다음주는 노무현 주간’이라는 예고가 나온 터라, 또 어떤 사실이 새로 드러나 노대통령에게 타격을 가할지 궁금증이 커지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안희정씨가 받은 자금의 사용처도 폭발력이 강했다. 검찰이 공개한 구속영장에는 ‘안희정씨가 강금원씨로부터 받은 4억5천만원 가운데 3억원을 선봉술씨에게 건네 장수천 빚을 갚도록 했다’고 적혀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안씨가 받은 불법 자금이 결국 노대통령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는 얘기가 된다(장수천은 노대통령이 관여한 생수회사다). 노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았느냐 몰랐느냐를 떠나, 한나라당의 ‘차떼기’만큼이나 노대통령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사안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즉각 '당선 무효감'이니, ‘탄핵감’이니 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노대통령은 정계 은퇴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 한마디에 세간의 관심은 이제 사안 하나하나의 불법성보다, 노대통령 쪽의 전체 불법 자금 규모가 과연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느냐 아니냐 쪽으로 옮아가고 있다. 여기까지 계산했는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나, 아무튼 자신을 크게 내던짐으로써, 작지만 더 아픈 상처는 교묘하게 피해 가는 노대통령의 전략이 먹혀들고 있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노대통령은 검찰이나 특검 수사에도 적극 응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법 처리는 당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바닥에 깔고 있다. ‘당선 무효’의 경우 선거법상 회계 책임자로 올라 있는 이상수 의원이 행여 사법 처리를 당한다 해도 공소 시효(6개월)가 지난 터라 더 이상 적용 대상이 아니다. 또한 다른 범법 행위는 재임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는다는 헌법에 따라 다 면죄된다.

따라서 대통령에게 남은 것은 이제 두 번의 정치적 고비를 넘는 일이다. 하나는 대선 자금 수사가 끝난 뒤에 판가름 날 ‘10분의 1’ 고비이고, 다른 하나는 대선 자금과 측근 비리 특검이 끝난 뒤에 닥칠 재신임 고비다.

청와대 참모들은 아무리 털어도 노대통령측 불법 대선 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은 안 넘는다고 자신한다. 자잘한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큰 덩어리는 대충 파악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 고위 인사는 “다해야 20억∼30억 원을 넘지 않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선의 특성상 어느 곳에서 뜻하지 않은 구멍이 발견될지 모를 일이다. 만에 하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은 곧바로 하야 요구에 맞닥뜨리게 된다.

10분의 1이 안되더라도 논란거리는 남는다. 야당에서는 검찰이 짜맞추기 수사를 했을 것이라며 수사 결과를 의심할 가능성이 높다. 10분의 1에 무엇은 넣고 무엇은 빼느냐, 10분의 1이 안된다고 그럼 잘못이 없다는 것이냐는 논란도 예상된다.

열린우리당이 이회창 수사 반대한 속사정

이 때문에 그때 가면 오히려 재신임이 다시 한번 핵심 화두로 등장할 개연성이 높다. 노대통령 역시 지난 11월16일 청와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국민투표도 물건너 갔는데, 왜 이리 재신임을 못 터느냐”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지금은 재신임이 시들하지만 측근 비리 수사에서 뭔가가 나오면 누군가 또 문제 제기를 하고 나올 게 분명하다. 따라서 검찰 수사든 특검이든 다 끝나고 난 뒤 매듭을 지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노대통령이 ‘정계 은퇴’로 승부수를 던진 다음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검찰 자진 출두’로 맞불을 놓았다. 공교롭게도 노대통령이 써먹은 ‘크게 걸어 반전 꾀하기’ 전략을 이씨도 따라 하는 모양새다.
한나라당 수사의 종착역인 이회창씨를 놓고 그동안 여야 간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한나라당 안에서는 이씨의 측근인 서정우 변호사가 구속된 후 LG 1백50억원, 삼성 1백52억원, 현대 100억원 등이 줄줄이 나오자, 결국 이 전총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류가 강하게 형성되었다.

‘당에서 대응하려 해도 도대체 전체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알 도리가 없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일부 당직자는 “당직자들에게 그렇게 짜게 굴더니, 뒤로는 엄청난 돈을 주물렀다”라며 이씨측에 대한 강한 배신감도 표출했다. 이 때문에 ‘이씨가 결자해지하라’는 한나라당 지도부와 ‘제대로 대응도 못하면서 왜 이씨에게만 책임을 돌리려 하느냐’며 반발하는 옥인동(이씨가 사는 동네) 사이에 한동안 갈등이 날카로워지기도 했다.

이에 반해 열린우리당 쪽에서는 오히려 이씨 수사에 신중한 기색이 역력했다. 12월13일 KBS 토론에 나온 김한길 열린우리당 전략기획위원장은 공개적으로 “이 전총재에 대한 수사는 신중해야 한다”라면서, 단순히 이씨의 의지에 따라 이런 비리가 이루어졌다고 보지는 않는다며 이씨를 감싸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이렇듯 열린우리당 쪽이 이씨 수사를 무척 조심스러워한 이유는 순전히 ‘역풍’을 우려해서다. 한 고위 당직자는 “세풍 수사 때도 이회성씨(이회창씨의 동생)를 구속하면서 분위기가 묘해지더니, 허주(김윤환 전 의원의 아호), KT(이기택 전 의원) 등을 수사하면서 역풍이 몰아쳤다. 이회창씨를 그냥 두는 것이 한나라당 내부 분열을 위해서나 대선 자금 수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나 오히려 낫다”라고 말했다. 다른 한 중진 의원도 “자칫 승자가 패자를 탄압한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다”라며 이회창씨 수사를 반대했다.

당초 한나라당의 강경 대응을 주문하던 이회창씨가 전격적으로 자진 출두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이런 정치권의 엇갈린 셈법을 꿰뚫어 본 결과로 해석된다. 이씨는 12월15일 기자회견을 열어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 자금은 모두 대선 후보였던 제가 시켜서 한 일이며, 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감옥에 가겠다”라고 밝혔다. 그리고는 곧바로 대검 중수부로 향했다.

이를 지켜본 정가에서는 당장 ‘희생양 프로젝트’라는 평이 나온다. 자기 몸을 던져 한나라당을 살리고 노대통령을 공격하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한 정치 평론가는 ‘한나라당은 저 이회창을 밟고 지나가서라도 부디 나라를 위하고 국민의 사랑을 받는 정당으로 거듭 태어나주길 소망한다’‘대리인들만 처벌받고 최종 책임자는 뒤에 숨는 풍토에서는 결코 대선 자금의 어두운 과거가 청산될 수 없을 것’이라는 기자회견문에 이런 의도가 배어 있다고 말했다.

이회창, ‘10분의 1’ 발언에 결심 굳힌 듯

불과 열흘 전만 해도 최병렬 대표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총풍·세풍도 버티니 해결되더라”며 당 지도부에게 강경 대응을 주문했던 이씨가 이렇듯 180。 태도를 바꾼 데에는 따가운 국민 여론과 ‘짊어지고 가라’는 한나라당 지도부의 요구, 최돈웅·서정우 등 측근 사법 처리 같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씨를 자극한 것은 바로 전날 터져 나온 노무현 대통령의 10분의 1 발언이라는 해석이 많다. 어차피 대선 자금 특검까지 가야 한다면 일찌감치 매를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낫겠다는 ‘계산’과, 더 이상 노대통령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오기’가 맞불 작전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씨가 갑자기 검찰 수사를 받겠다고 나서자 여권은 허를 찔린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난 대선 때 거둔 불법 자금으로 인해 이씨가 대국민 사과를 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게다가 공조직·사조직의 핵심 측근들이 줄줄이 차떼기나 지하주차장 007 작전에 앞장선 것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이씨의 도덕성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자연스레 이씨의 정계 복귀는 이제 물 건너갔다는 얘기가 정설로 굳어지는 판이다.

남은 것은 이제 이씨가 과연 사법 처리까지 당하느냐 여부다. 그의 기습 출두에 허둥대던 검찰은 어차피 한번은 맞닥뜨려야 할 일이라며 전열을 정비하고 일단 조사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이 과연 어디까지 손을 댈지도 주목된다. 대선 자금 모금과 관련해 이씨 주변 친지들에까지 수사가 확대될지, 대선 자금 용처와 관련해 개인 비리가 나올지, 그리고 이른바 대선 잔금의 실체가 드러날지 등이 주된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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