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의 철길'' 경의선ㆍ경원선
  • 이문재 기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0.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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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륙 정책의 동맥 노릇… 재개통되면 통일 가교로 우뚝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지난 50년 동안 한반도의 남쪽은 ‘완벽한 섬’이었다. 특히 군사분계선으로 가로막힌 북쪽은 전세계에서 가장 완강한 ‘국경’이었다. 섬 아닌 섬에 사는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섬사람이 되어 갔다. 국외 여행이나 외국 여행이 아니고 해외 여행이라고 말해 왔다. 국경은 공항 아니면 항구였다. 국경은 사어(死語)였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은 유럽에서 자동차나 기차로 국경을 넘을 때 남다른 감회에 젖어야 했다.

오는 6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손을 잡는다. 두 정상이 두 손을 맞잡는 순간, 지난 50년 동안 동강 나 있던 남과 북의 경의선·경원선도 ‘두 손’을 맞잡게 될 것으로 보인다. 50년 동안 완벽한 섬이었던 반도의 남쪽이 마침내 아시아-유럽 대륙과 육로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제 두 철로는 침략 정책을 실어 나르는 제국주의의 철로가 아니다. 화해와 공존을 위한 민족의 척추이자, 극동과 아시아-유럽 대륙 사이를 이어주는 인류의 동정맥인 것이다.

경의선과 경원선은 민족 수난사를 고스란히 내장하고 있다. 영화 <박하사탕>처럼 기차 바퀴를 뒤로 돌려, 경의선과 경원선을 거슬러올라가는 길은, 식민지와 분단 시대를 돌아보는 반성의 길이고, 마침내 상극에서 상생의 시대로 나아가는 희망의 길이다.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와 만주로 이어지는 축과 목포에서 원산을 거쳐 간도로 이어지는 축을 교차시키는 이른바 X자형 간선 철도는 20세기 일본 제국주의의 사활이 걸린 대형 프로젝트였다. 정재정 교수(서울시립대·국사학)의 <일제 침략과 한국 철도>에 의하면, 1900년 전후 한반도의 철도 건설은 동아시아 제국주의 형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은 1892년 비밀리에 경부철도 노선 예정지를 다섯 차례에 걸쳐 측량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경부-경의 철도를 타고 만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철도가 갖고 있는 경제성을 간파한 일본 관료들은 경원선과 함경선까지 부설해 시베리아와 일본을 연결해야 한다고 나섰다. 1898년 ‘경부철도합동’이라는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경부철도 부설권은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경의선과 경원선도 마찬가지였다. 당초 대한제국은 경의철도를 프랑스 리브릴르 회사에 허가했다. 프랑스측은 프랑스 차관으로 건설 중인 시베리아철도와 경의철도를 연결하려는 속셈이었다. 일본은 강력하게 항의했다. 동북아시아 정세가 불투명하고 자금 조달이 어렵게 되자 프랑스 회사는 경의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매각하려 했다.

프랑스측 처사에 발끈한 대한제국 정부는 자력으로 경의철도를 건설하기로 작정하고 1899년 대한철도회사를 설립했다. 서울에서 개성까지 토목 공사를 시작했으나 자금을 댈 능력이 없었다. 일본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1903년 일본은 대한철도회사와 ‘경의철도차관조약’을 체결했다. 한국이 철도 부지와 건설 재료, 노동력을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경의철도를 일본 군용 철도로 만들어버렸다. 경부-경의 철도는 일본에서 만주로 이어지는 병참로였다. 정재정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부산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철도 건설은 2천만 평에 달하는 철도 용지를 비롯해 방대한 양의 목재 모래 자갈 우마(牛馬) 식량 등을 빼앗아 갔다. 연인원 1억여 명이 철도 부설 공사에 동원되었다. 경부-경의 철도는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재산 손실과 육체적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1905년 1월1일 초량에서 영등포에 이르는 경부철도(4백31.1㎞)가 완공된 지 3개월 후인 4월3일 용산에서 신의주 사이의 경의철도 5백27.8㎞가 개통되었다. 경부선과 마찬가지로 경의선 공사도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 1904년 3월, 서울-개성, 개성-평양, 평양-의주 등 세 구간(48개 공구)으로 나누어 동시에 진행된 공사는 1905년 4월 완공되었다. 하루 평균 1.2㎞씩 철로를 깔았다. 그만큼 일본은 다급했고, 강제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신음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 노동자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철도에 적대적이었다. 정재정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철도 부설 과정에서 반제국주의를 체험하고 반철도, 반매판 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1904년 2월 이래 경기 평안 황해 충청 경상도 등지에서 전개된 항일 의병 투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의병들은 조직적으로 열차 운행을 방해하거나 파괴했다. 철로변 주민들은 철도 전선을 절단하거나 공사용 재료를 파괴했다.

‘유랑하는 백성의 혼’ 실은 이민 열차

경원선 부설권도 경부-경의 철도 못지 않은 열강의 표적이었다. 원산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과 연결되고, 한반도를 횡단해 인천과 이어진 다음, 뱃길로 중국 대륙까지 오갈 수 있는 중요한 철도였다. 1896년 이래 프랑스와 독일이 달려들었던 경원철도 역시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의 수중에 들어갔다. 경의철도와 같이 군용 철도로 계획된 경원선은, 1905년 착공되었으나 일시 중단되었다가 1910년부터 공사를 재개해 1914년 완공되었다.

한국에 부설된 철도는 일본의 철도보다 우수했다. 일본 국내 주요 철도가 협궤(3피트 6인치)인데 견주어 한국 철도는 표준 궤도(4피트 8인치)였다. 경의선 만포선 함경선 도문선 등 국경 철로를 통해, 표준 궤도를 쓰는 만주 철도와 직통으로 연결하기 위해서였다. 철로와 기관차 성능도 일본 국내 철도보다 뛰어났거니와, 이는 대륙 진출 속도를 앞당기기 위해서였다.
20세기 전반부에 개통된 한국의 철도는 한국인의 피눈물로 건설된 것이었다. 일본 군국주의의 무기와 병력을 싣고 북상을 거듭한 군용 철도, 쌀을 비롯한 한국의 1차산업 생산물을 싣고남행하던 제국주의의 철도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피눈물을 흘리며 오르내리던 ‘수난의 철도’였다. 만주나 간도로 떠나는 북행 열차는 이민 열차로 불렸다.

‘넘기는 백두산 원한에 닳고/건너는 압록강 눈물에 부니/닥치는 요동벌 한숨에 차네(…) 구복(口腹)이 원수돼 기를 악쓰고/만리라 타향에 흘러굴거니/쫓긴 무리 깃들 곳 어디란 말가’ 1929년 <동아일보>에 실린 석영해의 시처럼 철도는 고국을 등질 수밖에 없는 유민의 한을 싣고 달렸다. 시인 박팔양이 보기에 북행 열차는 ‘유랑하는 백성의 혼’을 수송하는 비극 열차였다.

중학교 1학년 때인 1941년 신의주에서 기차를 타고 봉천을 다녀온 적이 있다는 문인원 명예교수(인천교대)는 “군용칸이 가장 고급스러웠다”라고 기억한다. 문교수에 의하면, 경의선 3등칸은 냄새가 고약할 만큼 지저분했다. 중국으로 넘어가면 물이 좋지 않아서 역마다 도시락과 함께 끓인 물(백탕)을 팔았다. “봉천에서 하얼빈 가는 길에 수백 마리 노루가 기차와 함께 달렸다. 장관이었다. 저녁 어스름에는 번쩍번쩍 눈빛이 빛나는 늑대들을 보기도 했다”라고 문교수는 말했다.

전후 세대에게 경의선-경원선은 야유회를 떠떠날 때나 타는 ‘미니 철도’의 이미지가 강하다. 경의선과 경원선 재개통은, 반 세기 넘게 ‘섬 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전후 세대에게 국경 개념과 더불어 대륙적 기질을 되살려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아시아와 유럽 대륙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지정학적 상상력이 새로운 스케일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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