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이 뽑은 올해의 책
  • ()
  • 승인 1999.12.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우리 궁궐 이야기> 철학<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호모에티쿠스>
<우리 궁궐 이야기〉를 지은 홍순민 박사의 전공은 조선 후기 정치사, 범위를 더 좁히면 당쟁사이다. 역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당쟁의 실체를 파헤쳐 보자는 것이 당쟁에 관심을 갖게 된 문제 의식이었다. 그런데 막상 정치사 연구에 뛰어들자 홍박사의 생각은 크게 요동 쳤다. 정치사 또는 당쟁 연구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를 조선 시대 국왕이, 기존의 선행 연구에 한결같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허전함을 느낀 홍박사는 이 때부터 조선의 국왕에 주목했다.

워낙 기초 연구가 적었던 터라 홍씨는 밑바닥부터 훑었다. 그 밑바닥 중의 하나가 바로 조선 시대 궁궐이다.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국왕이 살던 공간’인 궁궐로 옮겨지게 되었고, 다시 본격적인 학문 연구로 바뀌어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 〈조선 왕조 궁궐 경영과 양궐 체제〉(1996년)를 탄생시켰다. 〈우리 궁궐 이야기〉는 학위 논문의 주제를 일반 독자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쉽게 풀어쓰고 시각 자료들을 덧붙인 책이다.

홍박사는 일반인의 궁궐 인식에 중대한 오해가 있다고 지적한다. 궁궐은 사용자(국왕)가 보자면 총괄하여 경영할 대상이고 실제로도 그랬는데,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처럼 ‘창덕궁이면 창덕궁’ ‘경복궁이면 경복궁’식으로, 별개 독립 공간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홍박사는 “옛날 국왕은 정상적인 국가 경영을 위해 반드시 법궁과 이궁을 갖추어 ‘양궐 체제’로 운영했는데, 바로 이같은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궁궐 변천사에 따른 매우 흥미로운 대목들을 놓치게 된다”라고 강조한다.10년간 ‘외도’한 끝에 홍박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는 〈우리 궁궐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의 국왕, 특히 숙종 이후 역대 국왕의 이야기를 역사 교양서 2탄으로 독자들에게 내놓을 생각이다.
朴晟濬 기자

역사학은 오랫동안 ‘사건과 시간의 학문’이었다. 그래서 과거에 나온 역사서 대부분은, 특히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할 경우 연대기적으로 사건의 경과와 의미를 정리하는 기술법을 채택했다.

그런데 올해 역사학계가 선보인 책과 일련의 사건 들은 역사학이 ‘사건과 시간의 학문’일 뿐 아니라‘주제의 학문’이며 ‘시각의 학문’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다. 그만큼 주제 의식이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해 들어가는 시각·방법론이 돋보인 책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외국 사람에 의해 쓰여진 역사책으로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린 헌트·새물결)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조너선 스펜스·이산)이 꼽힌다. 국내 저자의 책으로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임지현·소나무)가 꼽혔다.

〈고구려사 연구〉(노태돈·사계절)와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체계〉(이종욱·소나무)를 중심으로 고대사 연구 방법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대 논쟁도 역사학이 ‘시각의 학문’임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생활사·사회사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다. 한국역사연구회가 펴낸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전3권·역사비평사),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이재정·지영사), 〈일본이 진실로 강하더냐〉(허동현·당대)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김진송·현실문화연구)는 이같은 흐름을 보여주는 올해의 주요 성과물들이다.

원로 역사학자 강만길씨(전 고려대 교수)가 〈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삼인)라는 책을 통해 ‘분단 시대를 사는 역사가의 책무’를 후학들에게 다시 한번 일깨웠다. 역사학은 오랫동안 ‘사건과 시간의 학문’이었다. 그래서 과거에 나온 역사서 대부분은, 특히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할 경우 연대기적으로 사건의 경과와 의미를 정리하는 기술법을 채택했다.

그런데 올해 역사학계가 선보인 책과 일련의 사건 들은 역사학이 ‘사건과 시간의 학문’일 뿐 아니라‘주제의 학문’이며 ‘시각의 학문’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다. 그만큼 주제 의식이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해 들어가는 시각·방법론이 돋보인 책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외국 사람에 의해 쓰여진 역사책으로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린 헌트·새물결)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조너선 스펜스·이산)이 꼽힌다. 국내 저자의 책으로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임지현·소나무)가 꼽혔다.

〈고구려사 연구〉(노태돈·사계절)와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체계〉(이종욱·소나무)를 중심으로 고대사 연구 방법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대 논쟁도 역사학이 ‘시각의 학문’임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생활사·사회사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다. 한국역사연구회가 펴낸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전3권·역사비평사),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이재정·지영사), 〈일본이 진실로 강하더냐〉(허동현·당대)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김진송·현실문화연구)는 이같은 흐름을 보여주는 올해의 주요 성과물들이다.

원로 역사학자 강만길씨(전 고려대 교수)가 〈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삼인)라는 책을 통해 ‘분단 시대를 사는 역사가의 책무’를 후학들에게 다시 한번 일깨웠다.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김상환 지음·민음사 펴냄

추천인
강유원(출판평론가·동국대 철학박사)
김영민(한일신학대·철학)
이동철(용인대·중국철학)
정호근(서울대·철학)


서울대 김상환 교수가 펴낸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은 딱딱한 철학서가 아니라 예술적 향기가 짙은 한편의 문학 작품으로 읽힌다. 김교수의 책을‘올해의 책’으로 추천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그의 새로운 글쓰기 형식 실험을 주목했고, 유려한 문체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고등학생 시절 이후 20년 동안, 또는 그보다 더 긴 세월을 갈고 닦은 철학적 개념어 운용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주조된 문장은 통념적인 철학적 서술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테면 그의 책은 어엿한 학술서인데도 각주(脚註)를 극히 제한적으로 썼다. 기술법도 다르다. 그는 스스로 가장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근대 형이상학의 거장 데카르트조차 절대로 ‘형이상학적으로’‘목소리에 빳빳한 깃을 세워’ 풀이하지 않는다. 그는 어른·아이, 동요나 시 등 생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말랑말랑한 소재를 내세워 일단 데카르트에게로 유인한 뒤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달려들어 그를 ‘요리’해 버린다.

그의 글쓰기 전략은 물론 자신이 쓰고자 한 책의 내용, 즉 예술적 사유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도 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글쓰기 형식은 오히려 ‘철학하는 방법’에 대한 그의 독특한 경험과 확고한 태도에서 기인한다. 그는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말미에서 스스로 고백했듯이 ‘문학과 철학을 혼동하여’ 철학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철학사에 기록될 만한 작업은 철학 전문가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철학계 밖의 주변 영역에서 새로운 발상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울러 그는 철학이 몇 묶음의 ‘논쟁’으로 인식되는 데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

‘고전 읽기’와 ‘주변 돌아보기’는 그가 철학과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충고이다. 동시에 이같은 충고는 철학하는 사람으로서 김교수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경구이기도 하다.

朴晟濬 기자


올해 철학계 최대의 화두는 단연 ‘인문학의 위기’였다. 그만큼 ‘인문학의 적자(嫡子)’로서 철학계가 이 방면에 보인 관심이 컸다는 얘기다. 위기의 의미를 곱씹어 이를 체질에 맞게 소화하는 방식은 각자 달랐지만, 나와 남의 경험에 따로 경계를 두지 않고 반성의 자료를 취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방식은 일치했다.

이진우 교수(계명대)는 한국에서 사유하는 서양철학자의 처지에서‘우리 사유의 전통으로부터 새로운 이성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한국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민음사)를 펴냈다. 중국 인문 정신 논쟁을 소개한 〈인문학의 위기〉(백원담 편역·푸른숲)가 나오기도 했다.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민음사)를 지은 김상환 교수는 위기의 원인을 인문학이 가진 ‘내재적 한계’에서 찾았다.철학계가 인문학의 위기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고, 이를 위해 인접 학문으로 관심을 폭을 넓혀간 탓에 한 가지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룬 저작은 상대적으로 빈곤했다. 김성도 교수(고려대)의 〈로고스에서 뮈토스까지:소쉬르 사상의 새로운 지평〉(한길사), 문창옥 박사의 〈화이트헤드 과정 철학의 이해〉(통나무) 정도가 그나마 이같은 ‘빈곤’의 간극을 메운 책이라고 전문가들은 꼽는다.

동서양 철학의 이해를 도울 깊이 있는 해설서와 번역서의 존재도 눈에 띄었다. 전문가들은 동양 철학 쪽으로는 〈금강경 강해〉(김용옥·통나무),〈중국 철학사〉(전2권·펑여우란·까치), 〈동양, 서양 그리고 미학〉(장파·푸른숲) 등을 본보기로 든다. 서양 철학 쪽으로는 〈홉스의 사회정치철학〉(김용환·철학과현실사), 〈미적 현대와 그 이후〉(한스 로베르트 야우스·문학동네)가 추천할 만한 책으로 꼽혔다.

탈근대의 의미를 읽어내고, 동서양 사유 전통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이 부단하게 진행되면서 철학계의 20세기는 저물어 가고 있다.

朴晟濬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